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지성의 종착점에서 건넨 다정한 말 한마디

by김별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고, 제자가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얕은 길을 안내해 주는 존재. 소크라테스가, 몽테뉴가, 그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그러했듯 말이다.


인터뷰어 김지수는 마치 모리 교수와 마주했던 제자처럼, 우리 시대의 스승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시간을 바카라 『마지막 수업』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매주 화요일, 두 사람은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을 주제로 대본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연과 필연 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난과 행복, 용서와 종교, 과학과 영성 등 삶의 모든 주제가 자유롭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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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바카라마지막 수업 ⓒ 인터넷 알라딘서점






이어령 선생은 무엇보다 '말의 사람'이었다. 절친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이 그를 가리켜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라 표현했을 정도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우상의 파괴자'로 등장한 그는, 이후 55년 동안 문학과 문화, 과학과 기술을 넘나들며 한국 지성의 지평을 넓혔다.


문화부 장관 시절 그가 제시한 '디지로그 (디지털+아날로그)'라는 개념 역시 미래 문명을 일찍 내다본 탁월한 통찰이었다.


하지만 내가 잊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은 단연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이다. 거대한 세계의 축제 한가운데서,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고요하게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그 장면. 돌이켜보면 그것은 이어령이라는 거인의 세계관을 압축한 한 컷의 영화 같았다. 거대한 올림픽 경기장의 소음 속의 침묵, 세계와 개인이 그 고요한 정적 속에서 비로소 만났기 때문이다.




https://youtu.be/WrJBN7PqTe4?si=4Ac7L-5FP3qe92CZ


88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총괄한 이어령 교수의 굴렁쇠 퍼포먼스에 대한 질문에 답변

"우리는 지금 목청이 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 소음이나 폭탄 터지는 소리보다는 정적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려 했지. 생각해봐요. 굴렁쇠 퍼포먼스 바로 직전,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념의 벽, 빈부의 벽, 분단의 벽들을 부수는 태권도 공연 장면이 펼쳐지고 그 담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새싹이 나요. 그 틈 사이에 잠시 필름이 끊긴 영사막의 공백처럼 텅 빈 공간이 나타나지. 초록색 잔디 위로는 햇빛이 꽂히고 정적이 흐르지. 거기에 하얀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어린아이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요. 군중이 아니지. 주먹 쥔 어른들의 시위가 아니지. 그건 지구의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 속에 나타난 생명이에요. 더 이상 설명하면 정적은 깨지고 굴렁쇠는 그냥 자전거 바퀴에 불과해. 너무 눈부셔 잠시 환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순간으로 그 정적을 재현한 것뿐이에요.”






죽음은 낭떠러지가 아닌 '돌아감'이다

이 바카라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그의 태도였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그는 죽음을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나 병상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 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자연스러운 '계절 '로 받아들였다.

눈을 맞추던 식구, 정원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자신이 누렸던 이 모든 빛나는 선물이 원래 내 것이 아니었기에, 이제 기꺼이 다시 돌려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다'는 말보다 '돌아간다'는 우리말이 참 아름답다고 했다. 애초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는 자신의 인생 영화에서도 엔딩 마크 대신 수많은 시작을 품고 있는 '꽃 봉오리'를 꽂아두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것이 돌아가지만, 결국 생명으로 다시 순환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통찰은 육체와 마음, 영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묵직하게 이어진다. 그는 차가 담긴 유리컵을 들어 마음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한다. 차가 마음이라면 컵은 그것을 담고 있는 몸이다. 컵이 깨지면 차는 흩어지고 컵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컵 안에 존재했던 '비어 있음(Void)', 그 공간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영혼은 어쩌면 바로 그 영원한 '비어 있음'인지도 모른다. 복잡한 철학적 개념을 일상의 컵 하나로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대목에서도 역시 말의 천재 다운 번뜩임이 느껴졌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가 되는 일, 글쓰기

이어령 선생은 글 쓰는 사람을 지독한 '에고이스트'라 불렀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명징 한 진리다. 글쓰기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가장 깊이 천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간 글이 어느 순간 타인의 마음과 맞닿을 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비로소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자아를 철저히 통과한 글만이 만인의 심장을 울릴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평생 학문을 한 분야로 깊이 파고들지 않은 이유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기존 이론을 따라가며 주석을 다는 일이 자신에게는 너무 지루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글을 짓는 과정을 세 단어로 압축했다.



관심, 관찰, 관계.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긴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그렇기에 모든 글은 결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앞선 텍스트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며 새로운 말을 덧붙이는 것, 즉 모든 글은 세상과 서로 빌리고 주고받은 '상호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글쓰기란 결국 세상과 다정하게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는 마지막 갈증이었다.


"글을 쓸 수 없어서,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네."


그렇게 말하던 그는 더 이상 거대한 담론을 쓸 힘이 남아있지 않을 때,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을 썼다. 어느 날 발톱을 깎다가 평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해 온 멍든 새끼발톱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적었다.



발톱 깎다가
눈물 한 방울
너 거기 있었구나


나는 이 짧은 세 줄 앞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는 글은 어쩌면 거대한 철학이 아니라, 평생 곁에 있었지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작고 애처로운 존재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수업』은 죽음에 관한 바카라이면서, 동시에 삶을 묻는 바카라이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강박적인 조언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진 이 '한 커트'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거장의 마지막 당부처럼 읽힌다.



나 역시 언젠가 내 삶의 마지막 문장을 쓰게 될 것이다. 그때 어쩌면 거창하기보다는 이어령 선생처럼 아주 사소하고 다정한 몇 줄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나도 나와 세상의 관계를 관찰하며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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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카라은 에어컨이 나오는 도서관 마룻바닥에 앉아 아주 편안하게 읽은 바카라이다



#이어령#마지막수업#모리의화요일#글쓰기#굴렁쇠#백남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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