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낯선 여행자가 바라본 한국, 그리고 오늘의 우리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당시 여성의 슬롯 진출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자 혼자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낯선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1894년, 한국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그 일을 해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지금 나와 같은 64세였다. 그리고 그녀의 체구도 나 처럼 150센티 안의 단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미 아메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여행기를 펴낸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였다.
그녀를 보며 나 역시 그녀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길 위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30년 전 한국을 카메라에 담다
비숍이 한국으로 떠나려 할 당시 그녀 주변 사람들은 한국이 적도에 있는지, 지중해나 흑해 근처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한국은 서구에 낯선 나라였다. 당시 한국에 관한 자료라고 해봐야 달레 신부의 『한국 교회사』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숍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11개월 동안 한국 곳곳을 답사했다.
그녀는 왕실에서부터 최하층 민중에 이르기까지 직접 만나고, 나룻배와 조랑말, 도보를 이용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그래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 슬롯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 기록이 되었다.
그녀는 이방인의 겉핥기 식 묘사가 아니라 한국의 지형과 기후, 주거와 음식, 결혼과 장례, 무속과 불교, 시장과 주막, 왕실과 지방 관청까지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영국의 흐리고 안개 낀 날씨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한국의 겨울은 매력적으로 비쳐졌기에 그녀는 아홉 달이나 맑은 하늘이 이어지고, 차갑고 파삭한 서리가 내리는 겨울 풍경을 특별히 아름답게 묘사했다. 서울 역시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라고 보았다. 다만 거리의 오물과 불결함이 그 아름다움을 가린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작은 마을이라도 숲과 초원, 시냇물 사이에 낮게 자리 잡은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보았고 흰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남자들과 활기차게 무리를 지어 다니는 아낙네들이 그녀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왕비와 백성, 두 세계를 바라보다
비숍은 고종이 신뢰했던 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명성황후와도 만남을 가졌다. 그녀가 묘사한 왕비의 모습이 역사바카라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만 여긴 명성왕후를 생생하게 그려줘서 귀하게 여겨졌다.
그녀에게 명성황후는 우아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자태가 아름다웠고, 뛰어난 판단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원군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적대 세력에 둘러쌓인채 왕비는 자신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었다. 그러다 명성황후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자 비숍은 그 사실을 가감없이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관심은 왕실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 있었다. 특히 흰옷을 입는 전통 때문에 여성들이 끊임없이 빨래를 해야 했고, 강과 우물, 개울마다 빨래하는 여성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녀에게 ‘백의민족’은 특별히 여성들의 노동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다.
불편하지만 생생한 한국의 얼굴
그녀의 기록을 읽다 보면 때로는 불편해진다.
길거리의 위생 상태, 관청의 부패, 관리들의 무례함등을 매우 거칠고 직설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의 음주문화와 주막의 위생 상태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적나라하다.
어떤 지방 주막의 온돌방은 저장식품과 생활용품으로 가득했고, 지나치게 뜨거운 방에서 벌레와 먼지를 견디며 잠을 자야 했다. 낯선 서양 여성이 묵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스스름없이 옷과 머리핀, 머리카락까지 만져보며 구경하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라면 불쾌하게 느낄 법한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낯설었던 이방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의 그림자와 그녀의 진심
이 바카라을 읽으며 떨쳐내기 어려웠던 나의 의구심은 그녀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원튼 원치 않든 그녀의 여행기록이 제국주의 영국인의 시선으로 읽혀질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례로 선교사와 상인을 보내 지형과 이권을 탐색한 뒤 군사작전을 펼쳤던 서구 열강의 식민지화 수순을 위한 ‘사전 정보 수집’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씁쓸한 추정이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아메리카의 발견과 수탈로 이어졌듯, 그녀의 방대한 자료 역시 그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러시아와 청나라에는 비판적이면서도 유독 일본에 관대했던 그녀의 국제 정세 인식 또한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지지했던 영국입장에서 그녀 역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낡은 적폐를 청산한다면 번영할 것이라면서도, 조선 스스로는 그 개혁을 이뤄낼 동력이 부족하다고 서술한 부분에서는 묘하게 일본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겨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바카라 전반에 흐르는 조선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인류애를 보면 그녀의 여행 동기는 순수했다 보여진다.
동학농민군을 ‘무장한 개혁자’로 보다
내가 비숍의 기록에서 특히 흥미롭게 본 부분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동학군을 단순한 반란군으로 보지 않았고 부패한 관리와 수탈에 저항한 농민들이며, 나름의 확고하고 이성적인 개혁 목표를 가진 집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반란자’보다는 ‘무장한 개혁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했다.
그녀는 관료들이 백성의 삶보다 자신의 배를 불리고, 그 수탈이 농민들을 극단적인 저항으로 내몰았다고 보았다. 결국 그녀가 바라본 조선의 문제는 단순히 ‘게으른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생업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하는 슬롯구조에 있었다고 진단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저력
그녀의 생각이 가장 흥미롭게 바뀌는 곳은 러시아령 시베리아의 한인 정착촌이다.
한국에서 가난하고 무기력해 보였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들은 부농으로 성장했고 근면하고 검소했으며 독립적인 생활력을 보여주었다.
비숍은 이를 보고 본래 게으르다고 보았던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수정한다.
시베리아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린 한인들을 보며 조선인들이 열등한 민족이 아니라, "정당한 정부 아래서 생업의 이익만 보호받는다면 훌륭한 시민으로 번영할 수 있는 잠재력 높은 민족"임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130년 전 가난한 농민의 후손들이 이제 세계적인 산업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나라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의 능력은 민족성이나 타고난 기질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슬롯가 그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기회를 주느냐가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130년 전 여행자가 남긴 질문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덮으며 나는 여행 기록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자는 제 3자의 낯선 시선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을 제대로 비춰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비숍은 130년 전 한국을 걸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허름한 주막집을 전전하며 먼지를 뒤집어쓰며 걸었다. 그녀가 남긴 것은 이국적인 문화와 풍경만이 아니었다. 꺼져가는 왕실의 권력과 민중의 가난, 여성의 노동, 관료의 부패, 농민의 저항, 국경을 넘어 새로운 삶을 만들어낸 한인들의 저력까지 한 시대의 거의 모든 얼굴을 기록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모습이 오늘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은 한국을 평가한 문장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를 끝까지 걸어보고 직접 보고 기록하려 했던 그 용기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비숍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낯선 길 위에 계속 서 있고 싶다.
60대의 늦은 나이에도 미지의 땅을 향한 탐구심을 불태웠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그녀가 두 발로 꾹꾹 눌러쓴 이 방대한 기록을 덮으며, 나 역시 세상의 모든 낯선 틈새를 편견 없이 껴안는 다정한 여행자이자 기록자가 되고싶다는 바램을 다시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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