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마르칸트, 문명은 무엇을 교환하며 성장했을까

유라시아 기행 사마르칸트

by김별


사마르칸트, 문명은 무엇을 교환하며 성장했을까


비단길은 비단만 실어 나른 길이었을까.

2023년 5월,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중앙아시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그렇다.

반은 설렘이고, 반은 두려움이다.


비행기 연착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자정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짧은 잠을 자고 다시 사마르칸트를 향해 길을 나섰다.


고속철도를 타면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봉고차를 선택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며

오래전 실크로드를 따라 걷던 대상들의 발자국을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낙타 행렬과 대상들.

오아시스를 찾아 모여들던 상인들.

그 길 끝에 사마르칸트가 있었다.



실크로드의 심장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지중해.

남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초원의 유목 세계가 이어진다.


사방의 길이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심장이 되었다.

비단길은 이름만 보면 비단을 실어 나른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오간 것은 훨씬 많았다.


중국의 비단과 종이.

인도의 향신료.

페르시아의 유리와 카펫.

아라비아의 천문학.

불교와 이슬람.

그리고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까지.


문명은 이 길에서 단순한 물물교역이 아니라 서로를 배우며 성장했다.




푸른 돔 아래 숨은 역사


사마르칸트의 상징은 레기스탄 광장이다.

세 개의 거대한 마드라사가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푸른 타일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평화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14세기, 철혈의 정복자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정복한 도시마다 장인과 건축가, 학자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수도를 꾸몄다.


가장 잔혹했던 원정은 1398년 인도 델리 침공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황금과 보석, 장인들이 사마르칸트로 끌려왔다.

오늘 우리가 감탄하는 푸른 돔과 화려한 궁전은 그 희생 위에서 세워졌다.

문명은 때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가장 잔혹한 역사를 감춘다.



칼에서 별로


그러나 티무르의 시대는 정복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의 손자 울루그벡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군인이기보다 학자였다.

레기스탄 광장에 마드라사를 세우고 종교뿐 아니라 수학과 역사, 천문학을 가르쳤다.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

그가 남긴 이 말은 지금도 울림을 준다.


할아버지가 칼로 제국을 넓혔다면 손자는 별을 연구했다.

사마르칸트는 정복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학문의 도시였다.



전쟁이 남긴 선물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곳 가운데 하나는 전통 제지공장이었다.

뽕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종이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기술이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계기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었다.


751년 탈라스 전투.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이끄는 군대와 아바스 왕조가 맞붙었다.

전투는 이슬람군의 승리로 끝났고, 포로가 된 중국의 제지 기술자들이 사마르칸트로 끌려왔다.

이후 이곳에는 수백 개의 제지공장이 생겨났다.

종이는 다시 바그다드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지식의 확산에도 이 길이 있었다.

전쟁은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명은 그 상처를 따라 더 멀리 전파되기도 했다.


세계사 명장면 지식도감


문명은 해 뜨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인류 문명 발상지도 나일강만 빼면 다 아시아에서 일어났다. 오늘날로 치면 이라크와 파키스탄,그리고 중국이다. 그렇게 문명은 오리엔트에서 출발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을 통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 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 그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 이후 유럽 문화를 주도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기원전 323년 원인 모를 열병에 시달리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예수도 알렉산더도 다 33세에 죽었다. 인생은 짧고 역사는 그 흔적을 남긴채 문명은 진화해갈 뿐이다.
종이만 해도 뉘른베르크에 제지법이 전수된 것은 1389년의 일이었다고 한다.프랑스가 해협 너머 런던에 제지법을 전수한 것은 1494년 이후였 고, 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전수한 것은 1690년이었다니 정말 정말 중국 후한의 105년에 비하면 동.서양의 차이가 느껴진다.
제지법의 발달이야말로 문화 전파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 전에 중국에서 발명된 갑골문자를 거북 등과 동물 뼈에 새겼다. 이후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에 문자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나 운반이 어려워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까지 파피 루스를 사용했고, 중세 이후로는 양피지를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양피지는 한 장을 만드는 데 양 한 마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 대중화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에 비해 종이 원료는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 도 저렴하여 폭넓게 보급되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코란>의 전사(轉 )와 과학의 발달로 수요가 급증했다. 또한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가 인쇄 기술을 발명함으로써 종이가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제국이 그은 국경


오늘의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곳은 타지크 문화의 중심지였다.

현재의 국경은 오랜 역사의 결과가 아니다.

1924년 소련이 중앙아시아를 재편하면서 정치적 이유로 새롭게 그어진 선이다.

타지크인이 다수였던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편입되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이 연대해서 소련에 반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인종,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서 타지크인이 절대적으로 많은 타지키스탄 소유이던 사마르칸트를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우즈베키스탄 영토로 만들어버렸다.

비슷한 일은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아프리카도, 중동의 국경도, 식민 강대국의 자 위에서 그어졌다.

우리 한반도의 분단 역시 냉전이라는 국제질서가 남긴 상처다.


지도를 보면 국경은 선 하나지만, 그 선 안에는 역사적 상처와 수많은 사람들의 분리로 인해 일그러진 삶이 담겨 있다.



길위의 친절한 사람들


여행 중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환전을 하려다 계산을 잘못해 공바카라 값을 열 배나 비싸게 지불했다. 다시 돌아가서 미안한 마음으로 환불을 부탁했더니 주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웃으며 돈을 돌려주었다.

시장에서도, 식당에서도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제지공장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먼저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손을 내밀었고 모스크앞에서는 소녀들과 사진을 찍었다. K 팝과 드라마로 인해 한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인기다.


실크로드로 수많은 낯선 사람을 만나며 살아온 도시라서일까.

이곳 사람들의 친절에는 오랜 교역의 문화가 스며 있는 듯했다.

문명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아미르 티무르 영묘


티무르는 혈통으로는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몽골족이나 출생지나 받은 교육과 문화는 이슬람 쪽이라 우즈베크 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선조다.

아미르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제국은 1370년부터 1507년까지 중앙아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왕조였다. 그러나 티무르 사후 왕권 쟁탈전으로 제국은 분열되었기에 정치적으로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티무르를 비롯한 여러 왕들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보호와 장려로 화려한 궁정 문화가 발달하여서 중앙아시아 최고의 문화 수준을 자랑했다.


사실 영묘는 묘지가 아니라 대리석관과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궁전처럼 지어져서 무덤이라기보다는 사후궁전처럼 보인다. 티무르가 유언하길 자신의 스승 무덤 발치에 자기를 안치해 달라고 했다 하니 그는 겸손한 용자, 즉 현자였는 지도 모른다.

이슬람 건축물을 볼 때마다 경탄하는 바지만 아라베스크 문양의 화려함과 정교함이 매번 대단하게 여겨진다. 영묘 안의 벽과 천장 문양 장식에만 8kg의 황금을 사용했다 한다.



교역은 물건보다 생각을 옮긴다


사마르칸트를 떠나며 오래도록 레기스탄의 푸른 돔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었다.


비단과 향신료.

종이와 천문학.

불교와 이슬람.

학자와 상인과 장인들


수많은 것들이 이 도시를 거쳐 서로의 세계로 건너갔다.

그래서 실크로드는 길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이었다.


언젠가 부산에서 출발한 철길이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이어진다면, 그 길 역시 물건만 실어 나르는 길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 생각이 오가는 길이 될 것이다.


*고선지~고구려 유민이었으나 당나라 장군이 되어 8세기 중앙아시아 영토를 개척하였다. 영국 탐험가 오렐은 그의 원정을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업적보다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인이라니 방탄덕분에 달려와서 사진찍자던 소녀들


화덕에 구워 진짜 맛있는 빵은 크기도 엄청나다


샤슬릭과 샐러드, 빵


레기스탄 광장

터키나 이집트등 다른 이슬람국에서 주로 모스크만 보다 이 광장의 독보적인 세 마드라사를 한꺼번에 보니 놀라웠다. 14세기 칭기즈칸의 원력을 다시 한번 과시한 그의 손자 티무르제국의 수도로서 위용을 자랑하며 이렇게 광장을 화려하게 지었지 않나 싶었다.


이곳과 중앙아시아 사람들 풍습이 원래 결혼하면 유명한 건물 앞이나 동상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마치 그들의 행복한 결혼이 오래 가게 해달라는 염원을 조상들께 비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 한다.


파란 돔은 전쟁이 없어 평화로운 하늘을 상징하는데 정말 매끄럽게 느껴져 신기했다. 전쟁광이었던 티무르가 이 파란 하늘색을 좋아했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세 개의 마드라사가 함께 보이는 레기스탄 광장 - 왼쪽이 맨 먼저 지어진 울르그 벡, 중앙이 틸라고리 그리고 오른쪽이 사자가 있는 세르도르 마드라사다.


세르도르 마드라사는 세르도르가 사자라는 뜻으로 왕은 동물등 우상을 금지시키는 이슬람법을 어기면서도 자신의 왕권과시를 위해서 사자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돔의 블루스카이색이 볼 수록 매혹적이다.


천문학의 대가였던 왕과 학자들이 존경스럽다


틸라코리 마드라사의 황금방은 실제 노란색 부분이 다 황금이었는데 러시아인이 일부 훔쳐갔다 한다.


잠시 의자에도 앉아보고 ㅎㅎ


'사마르칸트' 식당에서 - 각종 고기 종류별 샤슬릭이 다 등장한 것 같다.


저녁에는 호텔 근처에 그 이름도 사마르칸트인 큰 레스토랑에 갔다. 가족들이 주로 예약해서 오는 곳인데 화려한 이층 건물에 음악도 있고 춤도 추는 곳이다. 그들의 흥겨운 분위기를 보며 일행들과 나는 사마르칸트의 음식과 사람들에 푹 빠져 같이 춤도 추며 그들의 활기와 기쁨에 동참했다.

주로

2023년 5월 28일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성전광장과 공연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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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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