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기행, 그리스 편
그리스를 떠올리면 우리는 먼저 그리스·로마 신화와 민주주의, 철학을 생각한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 교육 속에서 그리스는 언제나 '서양 문명의 발상지'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 그리스의 역사는 찬란한 고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긴 세월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견디고, 독립을 위해 싸우며, 현대에는 유럽 통합의 명암을 가장 극적으로 겪은 나라가 바로 그리스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로마의 정복 이후,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로 천 년을 보냈다.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다시 약 40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 정교회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랫동안 제국의 변방에서 살아야 했다.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유럽 지식인들은 이슬람에게 빼앗긴 '고대 문명의 고향을 되찾아야 한다'는 필헬레니즘에 열광했고, 영국·프랑스·러시아가 개입하면서 그리스는 독립을 얻는다.
그러나 그 독립은 온전히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열강은 이웃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를 초대 국왕으로 앉혔고, 현대 그리스는 처음부터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출발했다.
1981년 유럽공동체에 가입하고 2001년 유로존에 들어가면서 그리스는 마침내 '유럽 본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2010년 재정위기는 그 꿈을 무너뜨렸다. 혹독한 긴축정바카라과 높은 실업률 속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나라는 다시 유럽의 가장 가난한 변방이라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이름을 딴 도시, 아테네.
여신을 만난다는 낭만에 긴 치마를 입고 나섰지만, 한여름 태양 아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며 그 낭만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올리브나무가 늘어선 계단 끝에서 만난 파르테논 신전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대리석은 눈부시게 하얗게 빛났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한 지혜를 지닌 채 태어났다고 한다. 올빼미가 그녀의 상징이 된 것도 어둠 속에서도 진실을 보는 지혜 때문이었다. 같은 전쟁의 신이라도 난폭한 힘을 상징하는 아레스보다, 전략과 이성을 상징하는 아테나가 그리스인들에게 더 사랑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화를 듣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제우스의 끝없는 사랑 이야기와 헤라의 질투는 현대판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신화의 진실은 사건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한 문명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있다.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로 세상을 설명해 왔고, 그리스는 그 이야기를 가장 아름답게 남긴 문명이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언덕위의 '높은 도시'라는 뜻이다. 고대의 도시국가들은 방어가 쉬운 언덕 위에 신전을 세웠고, 그곳은 종교와 정치, 문화가 만나는 중심이 되었다. 22년 내가 갔을 때도 파르테논 신전은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유적은 완성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도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나이가 있는 가이드 아멜라의 설명도 인상 깊었다.
그리스는 지금도 중공업 기반이 약해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대부분 수입하고, 대리석과 관광산업이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했다. 아크로폴리스의 경관을 지키기 위해 고층건물에 대한 제한이 있다.
찬란한 문화유산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현대 산업 발전을 제한하는 또 하나의 운명이기도 하다.
점심 식탁은 놀랄정도로 풍성했지만 물가는 예상보다 저렴했다.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그 뒤에 오랜 경제 침체가 남긴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높이 하얗게 빛나는 아크로폴리스는 여전히 당당했지만, 그 아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은 결코 신화처럼 빛나지만은 않았다.
이후 나는 포세이돈 신전과 델로스, 미코노스, 산토리니를 차례로 만났다.
델로스는 아폴론이 태어난 성지였고, 한때 에게해 무역과 델로스 동맹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돌기둥과 무너진 벽만 남아 있지만, 폐허는 오히려 문명의 흥망을 더 또렷하게 말해준다. 강풍이 몰아치는 언덕을 걸으며 '영원한 문명은 없다'는 단순한 진실을 새삼 실감했다.
산토리니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을 만났다. 새하얀 집들과 푸른 지붕, 강렬한 햇빛과 에게해의 짙은 푸름. 자연은 화산폭발이라는 거대한 파괴 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인들은 이 섬을 전설 속 아틀란티스와 연결해 이야기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은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문명을 꿈꾸며 자신의 기원을 상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역사는 문명의 중심이었던 나라조차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언제든 변방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유라시아를 꿈꾸는 지금, 내가 바라는 연결은 로마의 정복도 아니고, 하나의 제도로 모두를 묶으려 했던 EU식 통합도 아니다.
부산에서 유럽으로 이어질 철길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같은 기준으로 재단하는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각자의 체급을 존중하며 함께 흐르는 길이어야 한다.
아테네의 빛바랜 신전은 과거의 영광보다 미래의 질문을 내게 남겼다.
문명은 지배로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더 오래 남는 것은 연결이다.
에게해와 물병같이 생겼던 특이한 커피잔
식당과 포세이돈 신전 가는 해안도로길
지성미 충만했던 아테네 가이드와 푸짐했던 양갈비 점심
시내에서 올려다 본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올림픽 경기장
그리스는 에게해를 둘러싼 1400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역시 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델로스와 미코노스 여행을 했다.
아침에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한 거센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니 늘 파랗던 바다가 온통 하얀 포말로 점점히 가득 덮혀 있다. 아 이런 날 어떻게 나가나? 하면서도 투어예약을 이미 해 버렸기에 할 수 없이 나섰다.
작은 배를 타고 섬까지 가는 데 괜찮은 가 싶더니 배가 흔들리는데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가서 델로스 섬에 내려 가이드를 따라 세찬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보이는 건 돌무더기에 돌담뿐이요 가끔씩 기둥이 있고 언덕까지 오르려니 바람에 날려갈 것만 같다. 그래도 할머니 가이드 라일라는 열심히 지도와 자료를 손에 들고 설명을 하는데 역시 프로정신인가 싶다.
여기가 방이요, 호텔이요, 신전이며 무엇하던 공간이라고 말해주는데 온갖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그 장면을 떠올려보기도 하며 그렇게 신들의 노함인 지 폭풍의 언덕같은 델로스 투어는 끝내고 벌써 조금은 지친상태로 다시 미코노스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다행히 배멀미도 좀 가라앉아서 이쁜 미코노스를 한 바퀴 하고 나니 정신이 들고 이리저리 다니다 바람도 파도도 가라앉아 무사히 웃으며 돌아왔다.
가운데 디오니소스의 모자이크가 있어 ' 디오니소스의 집'이라 불린다
이 신전앞에서도 바람이 어마무시하게 불어서 가이드의 설명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스 정교회는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제국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고 로마 카톨릭과 달리 자신들의 교황을 선출하는 구조를 갖고있다.
미코노스 항구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인 그리스국기, 우연일까? 그와 깔맞춤인 내 옷
주름진 얼굴에 연륜이 느껴지는 현지인들을 담은 사진
우리나라에서는 이온음료 광고로 더 알려진 산토리니섬에 갔다.
파란 지붕과 하얀 건물이 푸른 에게해와 어우러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화산 섬이다. 멀리서 보면 하얀 조개처럼 화산섬 절벽 위로 다닥다닥 건물들이 붙어있고 이아마을과 섬의 큰 도시 피라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온다. 지나가는데 화끈해서 쳐다보니 불을 피워놓고 싱싱한 생선을 옆에 두었다. 구워서 여행객들에게 팔려고 하는 모양이다.
바다 풍경을 보다 진열된 상품조차도 온통 흰색과 파랑으로 시원한 가게 순례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미로같은 좁은 골목을 지나며 잠시 내가 요정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섬의 흰색과 블루는 당연 그리스 국기의 두 색갈이다. 그런데 그 섬에 부겐빌레아 찐한 분홍꽃이 피어있으니 더욱 화사하다. 어쩌면 색갈의 조화가 이렇게 선명하면서도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지 여기서 확실하게 느껴본다.
햇빛이 강렬한 그리스에서는 이전부터 열을 차단하기 위한 흰색으로 집을 지었다. 그래서 국기도 하얀색에 바다의 블루로 파란색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짧은 워킹투어를 신청했는데 가이드 알렉스는 정말 효율성 가성비 최고다. 버스 잠시 이동 시 속사포처럼 섬 이야기를 쏟아내고 내려선 잽싸게 몇 줄 안내해주고 우리에게 자유시간을 주니 워킹투어는 경비절약과 자유 시간이 넉넉한 두 강점을 지닌다.
다음 화에서는 동서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충돌하고 융합했던 도시, 이스탄불로 떠납니다. 1,000년 비잔티움의 기억과 오스만의 웅장함이 만나는 대륙의 심장부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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