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상처를 딛고 생존한 크로아티아

유라시아 기행 자그레브

by김별


크로아티아의 품으로~!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다음 도시는 어디로 갈까'보다 '잠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찾아온다.

비엔나를 떠나는 아침도 그랬다. 체크아웃을 하면서도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불안했겠지만, 이제는 여행도 삶처럼 흘러가게 두는 여유가 생겼다.


결국 B.닷컴에서 우연히 단기 할인 숙소 하나를 발견했다. 사진 몇 장만 보고 예약을 끝냈다. 선결제까지 해버리고 나니 '괜히 성급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행은 가끔 이런 우연이 최고의 선물이 된다.


자그레브의 숙소는 기대 이상이었다. 주인의 따뜻한 환대와 넉넉한 공간은 며칠 동안 낯선 도시를 집처럼 느끼게 했다. 풍경보다 먼저 사람과 공간이 여행자를 맞아주는 도시. 자그레브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자그레브라는 이름에도 작은 전설이 담겨 있다.


중세 어느 가뭄 속에서 영주가 창으로 땅을 가리키며 "물을 퍼 올려라(Zagrabi)."라고 외쳤고, 그 말에서 도시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보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도시는 언제나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


로마 시대부터 발칸 내륙의 요새였던 자그레브는 신대륙 발견 이후 해상 무역이 번성하면서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리트 같은 항구도시에 주인공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륙에 있었기에 크로아티아의 정치와 문화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를 이해하려면 먼저 발칸이라는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발칸은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이라는 세 문명이 만나는 접경지대다. 북쪽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남쪽에서는 오스만제국이, 서쪽에서는 베네치아가 서로 맞부딪쳤다. 크로아티아는 그 거대한 문명들이 스쳐 간 길목이었다.


그래서 자그레브를 걷다 보면 방금 떠나온 비엔나를 닮은 합스부르크 양식의 건물과 동유럽 특유의 분위기가 한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도시는 건물보다 먼저 역사를 닮는다.


현대 크로아티아를 이야기할 때 유고슬라비아를 빼놓을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는 남쪽 슬라브란 뜻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남슬라브 민족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국가를 선택했다. 그것이 유고슬라비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슬롯주의 체제로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를 하나로 묶었다. 가톨릭의 크로아티아, 정교회의 세르비아, 이슬람 문화가 남은 보스니아는 '형제애와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공존했다. 그러나 통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80년 티토가 세상을 떠나자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분출했고, 1991년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진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남겼지만, 크로아티아는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었고 2013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며 다시 유럽의 일원이 되었다.


자그레브의 평온한 거리도 불과 30여 년 전에는 전쟁의 긴장 속에 있었다.

도시가 고요할수록 그 침묵 속에는 더 많은 기억이 숨어 있다.

자그레브의 중심에는 성모승천 대성당이 서 있다.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 부다페스트의 이슈트반 성당처럼 모두 초대 순교자 성 스테파노를 기리는 이름이다.


유럽의 도시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성당이 있고, 그 주변에는 광장과 궁전, 박물관이 자리한다.

권력과 신앙, 그리고 시민의 삶은 언제나 광장에서 만난다.

반 옐라치치 광장은 지금도 자그레브의 심장이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이곳은 시민들의 약속 장소이면서, 1990년대 독립을 향한 열망이 모였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여행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한 건축보다 사람이다.

길을 묻자 딸기를 팔던 상인은 장사를 잠시 멈추고 한참을 걸어 나와 길을 알려주었다.

숙소 주인집 딸도, 가게직원들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따뜻했다.

오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삶의 소중함을 더 잘 아는 것일까.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풍경만큼이나 사람들의 친절에 자주 감동했다.


구시가지의 '돌의 문' 안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 한 점이 있다.

1731년 대화재로 도시가 불탔을 때 문은 모두 타버렸지만 이 그림만은 기적처럼 남았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촛불을 밝히고 조용히 기도한다.

그곳에서 한 노인이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도는 어쩌면 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신의 시간을 견디기 위한 침묵인지도 모른다.


성 마르코 성당의 화려한 지붕에는 크로아티아 왕국과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한 장의 지붕 위에 역사와 통합의 기억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근처 박물관에서는 농부와 시장, 눈 덮인 겨울 마을을 그린 소박한 풍속화를 만났다.

문명은 거대한 영웅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자그레브의 돌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했다.

유고슬라비아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지만, 서로 다른 역사와 종교까지 하나로 만들 수는 없었다.

억지로 유지된 정치적 통합은 결국 전쟁으로 무너졌다.


반대로 오늘의 유럽은 서로 다른 나라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연결을 선택하고 있다.

유라시아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닮으려 하기보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이어지는 길.

자그레브는 그 답을 조용히 들려주는 도시였다.

전쟁의 폐허를 지나 다시 일어선 도시에서 나는 문명의 힘은 지배가 아니라 공존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자그레브를 '상처를 기억하는 도시'가 아니라 '공존을 배운 도시'로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자그레브 시내 돌락 시장과 담배랑 전철표를 파는 키오스크
반 옐라치치광장과 스테반 성당
어떤 아픔인 지... 돌의 문 앞에서 오래 기도하시던 할아버지

박물관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소박한 풍속화에 오래 머물렀었다.


성마르코 성당. 왼편 문장은 통합되기 이전 세 나라를 상징, 오른편 문장은 자그레브시를 상징



하루일을 마치고 맨발로 돌아오는 모습이 시골 옛 모습인듯


땔감과 수레 할머니 눈길이 크리스마스 카드풍경같다



자그레브를 떠나 크로아티아 두 도시 두브르니크와 스플리트에 열흘을 머물렀다.


도시의 메인인 스트라둔거리와 두브르니크 풍경들
성벽은 10세기부터 짓기시작했다는 성벽과 해물요리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 크로아티아어로 예배 볼수 있도록 투쟁한 주교
스플리트 결혼식이 열렸던 성 도미노우스성당앞
스플리트 스노쿨링과 아름다운 풍경


두브르니크 성벽걷기하면서 위에서 찍은 시내와 거리 뷰


산쪽으로 가는 계단있는 골목과 바다쪽 평평한 골목, 이리저리 둘러보며 좁은 골목길 걸으면 재밌다



시원한 물보라와 녹색,옥색으로 크로아티아가 싱그럽다


포즈 취해주는 스플리트 궁전앞 친절한 병사복 아저씨





발칸의 홀로코스트 종교전쟁


원래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없다. 동족이다. 하지만 종교가 달랐다. 카톨릭을 신앙하는 크로티아는 자신들이 남슬라브 유고슬라비아의 맹주라 여기며 동방정교를 믿는 세르비아를 학살하기에 이른다.


>괴뢰 국가 크로아티아가 수립한 정바카라은 경악스러웠다. 자국 내 200만 정교 세르비아인 가운데 3분의 1은 개종시키고, 3분의 1은 추방하며, 3분의 1은 학살키로 한다. 유대인 학살을 솔선수범했던 독일마저 질겁했을 정도다. 유고슬라비아의 킬링필드가 펼쳐진 다. 난징 대학살을 능가하는 발칸 대학살이었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1 227

독가스 살포를 비롯해 근대적 기술을 활용한 살육이 아니었다. 총도 아니고 칼과 도끼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요구한 것 또한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념 전향이 아니다. 단연 개종이었다. 총검을 앞에 두고 강제 개종이 자행되었다.


거부하는 이들은 정교 성당에 밀어 넣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성직자들이 깔끔 하게 면도하는 가톨릭과 달리, 정교 신부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른다. 그 남다름조차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혐오스런 수염을 베어버리고 눈은 뽑아버리고 코와 귀는 잘라버렸다.

발칸이 경험한 제2차 세계대전은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공산주의 간 전쟁이 아니었다. 명명백백 종교전쟁이었다. 동/서 교회 간 지하드(성전聖戰)가 처절했다.


매우 독특한 현상은 정교 세르비아인의 박멸을 위하여 무슬림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기왕의 종교전쟁, 십자군과는 다른 양상이다. 크로아티아는 가톨릭과 이슬람에 속해 있다고 했다. 가톨릭과 이슬람의 위대한 역사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합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정교 성당을 파괴하는 반면 자그레브에는 새 모스크를 지어주었다. 정권이 준비한 300만의 탄알은 오로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과 집시를 향했다.


무슬림보다 정교도에 더 적대적인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크로아티아인과 한 민족이었 기 때문이다. 한 뿌리이건만 동족상잔도 마다치 않은 것이다.-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1 229~230



~크로아티아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한 사람들 이면에 흘러갔던 역사는 잔혹했다. 그러나 그러한 킬링필드 아픔과 상처가 컸었기에 그들의 마음은 다시 한번 정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무릇 골이 깊으면 봉우리가 높은 법~! 상처가 깊을 수록 그 아픔을 깊이 체험하고 딛고 일어선 마음이 오히려 맑게 정화되고 깊을 수 있는 이치라 짐작해보았다.



다음 화에서는 유라시아 문명의 또 다른 결절점인 이스탄불로 향한다. 고대 그리스의 지혜와 비잔티움의 찬란함이 만나는 길 위에서, 나의 여정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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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