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와 오늘도 싸웁니다]
못 한다고 답할 때가 있다. 할 줄 아는 일에도 안 하겠다고 답한다. 부탁한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모든 일을 맡으면 내 하루는 금세 끝난다. 능력이 있어도 시간이 없는 때가 있다.
회사를 나와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일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할 수 있는 일인가. 하고 싶은 일인가. 시간을 써도 좋을 만큼 궁금한가. 주어진 목록을 보던 자리에서 내가 이 일을 하려는 이유도 묻게 됐다. 고른 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들으면 달력을 먼저 본다. 읽어야 할 글도 있고 써야 할 원고도 있다. 준비해야 할 강의는 또 어떻고.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을 알아야 답을 할 수 있다. ‘그거 하실 수 있죠?’에는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이번 주까지 가능하시겠어요?’에는 다른 답을 할 수 있다. 앞 질문의 대답이 뒤 질문의 약속이 되지는 않는다.
가능하면 돕겠다고 하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말한다. 상대도 그 답을 듣고 다음 일을 정한다. 다른 사람을 찾거나 기한을 바꿀 수 있다. ‘못 합니다’라는 답에도 쓸모가 있다. 더 기다릴지 말지 알게 되니까. 좋은 답만 해주려 하다가 상대에게 필요한 답을 놓칠 수 있다.
가령 금요일까지 원고를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까지 충분히 읽을 시간이 없다. 마음만 앞서 맡으면 상대는 내 검토를 기다린다. 금요일이 돼서야 어렵다고 하면 다른 도움을 구할 시간도 사라지고 없다. 내가 시간을 못 낸다는 사실을 숨긴 답이 상대의 시간까지 날려버린 거다.
가능한 도움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전체는 어렵지만 막힌 한 대목을 함께 볼 수 있을까. 기한을 바꾸면 가능할까. 상대도 듣고 다시 정한다. 내가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만 골라놓고 도움이 됐다고 여길 수는 없다. 정말 막힌 곳이 그 대목인지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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