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정리를 하다가

오늘

by채율

바카라장을 정리하기로 한다. 바카라은 계속 사는데 꽂을 자리는 더 이상 없다. 두 줄로 겹쳐 꽂아둔 곳도 있고 바카라 위에 가로로 눕혀놓은 것도 있다. 바닥에도 있고, 침대 머리맡 테이블에도 있다. 사실 바카라은 아무렇게나 있어도 거슬리지 않아서 상관은 없지만 새 바카라을 꽂으려면 이제 몇 권은 빼야 한다.

오래 손이 가지 않은 바카라부터 꺼낸다. 소설 몇 권, 오래된 에세이, 미술바카라, 읽다가 만 바카라까지 바닥에 쌓는다. 처음에는 제법 과감하다.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으면 빼고,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 바카라도 뺀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몇 년째 꽂혀 있던 바카라을 발견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그것도 내려놓는다.

스무 권쯤 쌓인다. 바카라장이 조금 헐거워졌다. 바카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보니 여유가 꽤 생겼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바닥의 바카라들을 끈으로 묶으려다가 맨 위에 놓인 바카라 한 권을 다시 펼쳐본다.

첫 장에 날짜가 적혀 있다.

2014.11.3

내 글씨다.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날짜를 보는 순간 그 무렵 살던 작은 오피스텔이 떠오른다. 창문은 크고 겨울이면 유난히 추웠던 집이다. 바카라을 조금 더 넘긴다.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이 나온다. 그다음 장에도 있다.

‘정말 정말 그럴까?’

페이지 가장자리에 내가 써놓은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 의심스러웠는지 지금은 모르겠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몇 장을 더 읽는다. 버릴 바카라 더미에서 한 권을 빼 바카라장에 다시 꽂는다.

그러고 나니 다른 바카라들이 신경 쓰인다. 이번에는 오래된 소설 한 권을 펼친다. 중간쯤에 영수증이 끼워져 있다. 예전에는 바카라갈피 대신 영수증을 쓰기도 했는데 그때 읽던 바카라 중 하나인가 보다. 미국의 작은 서점에서 산 영수증이다. 잉크가 거의 날아가 금액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것도 다시 바카라장으로 간다.

세 번째 바카라에서는 오래된 전시 티켓이 나온다. 버리려고 꺼낸 바카라을 한 권씩 다시 읽다 보니 정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바카라의 내용으로 골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추억이란 것들이 끼어든다. 어디서 샀는지, 그때 어디에 살았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그렇다고 전부 다시 꽂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바카라을 세 무더기로 나눈다. 다시 읽을 바카라. 가지고 있을 바카라. 이제 보내도 될 바카라.

다시 읽을 바카라 두 권은 바카라상 위에 올려두고, 가지고 있을 바카라 몇 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나머지는 먼지를 털고 표지를 닦는다. 낙서가 심한 바카라은 빼고 상태가 괜찮은 것들만 골라 종이 상자에 담는다.

종이에 굵은 펜으로 쓴다.

‘바카라 나눔 합니다.’

저녁에 상자를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이 오가는 공동 현관 한쪽,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 바카라을 가지런히 세워놓는다. 소설과 에세이의 제목이 보이도록 몇 권은 앞을 향하게 한다.

집으로 돌아와 바카라장을 보니 아까보다 조금 비어 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집어넣은 바카라 몇 권과 그 바카라들이 불러온 기억들 탓에 머릿속은 오히려 더 채워졌다. 바카라상 위에는 다시 읽기로 한 두 권이 놓여 있다.

밤늦게 외출할 일이 있어 현관을 나선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상자 안의 바카라이 몇 권 줄어 있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다. 맨 앞에 세워두었던 소설도 없어졌다.

나는 남은 바카라들이 쓰러지지 않게 조금 안쪽으로 모아 세워놓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수, 목 연재
이전 08화별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