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후 타 지역에서 지내게 된 아들과의 짧은 이별은 제게 큰 의미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꼴로 올 예정이라는 아들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숙사 짐을 싸서 온 가족이 대전으로 향하는 날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스트 신입생 전용 기숙사 앞에는 저희처럼 아이의 짐을 실어주기 위해 온 부모들로 북적였습니다. 같이 올라가 짐 정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남학생 기숙사라 엄마들은 출입할 수 없어 남편과 아들만 차에 한가득 실어 온 짐을 열심히 옮겼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기숙사 생활을 궁금해할 저를 위해, 아들이 방 정리를 하는 동안 기숙사 곳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습니다. 공동 화장실, 세탁실, 헬스장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무엇보다 깨끗해 보였습니다.
짐 정리가 끝나고 아들과 함께 북측 기숙사 옆 학생 식당인 ‘카이마루’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남편은 아들과 와 본 적 있는 곳이라 감회가 새로운 듯했습니다.
“아들, 여기 와서 밥 먹었던 거 기억나지?”
과학고 입시를 치르고 결과 발표가 나기 전, 남편은 아들과 단둘이 2박 3일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과학고 입학이 제1 목표였지만, 카이스트에 들러 발 도장도 찍고 학식도 먹으며 꿈을 키웠습니다. 이렇게 카이스트생이 될지 모르고 말이죠. 남편은 그래서 더욱 아들이 대견한 듯했습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사실, 카이스트는 공식적으로 학부모가 참석하는 ‘입학식’을 개최합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입학할 당시에는 코로나19로부터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라 입학식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짐을 옮겨다 주는 그날이 아이를 입학시키는 날인 셈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들은 기숙사로 돌아갔고, 저희는 긴 포옹으로 안녕을 고한 후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연히 필수 코스인 성심당을 들러 빵을 한가득 싣고 말이죠.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아들 없이 둘이 내려오면서도 대화 대부분이 아들 이야기였습니다. 집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해가 넘어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컴컴한 집으로 들어섰지만, 장시간 이동에 따른 피곤함이 밀려와 별다른 감정 없이 그날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집이 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저희는 신축 아파트 입주 시기와 기존 집의 매매 시기가 어긋나면서 잠시 셋이 살기엔 좁은 작은 평수의 월세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기숙사 생활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작거리며 지내던 온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한 뒤, 부엌일을 마친 저는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밖에서 지저귀는 까치 소리가 처량했고, 낮은 층이라 들려오는 단지 소음이 성가셨습니다. 아직 집 청소가 남았는데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 거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습니다. 오래된 집이라 창틀이며 베란다며 손 볼 곳이 많았지만,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내 집도 아니고 곧 이사도 할 건데 뭐.’라는 생각에 흐린 눈을 하고 못 본 체했습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밥 먹는 것조차 귀찮아졌습니다. 그 와중에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을 하다, 사과 한 알을 꺼내 베어 물었습니다.
온 정신이 아들에게 쏠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연락하고 싶었습니다. 휴대폰 카톡창을 열어 대화창에 뭔가를 써보려고 하다 꾹 참았습니다. 진상 엄마가 될 순 없으니까요.
저녁노을이 지고 남편이 퇴근한 후에야, 아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학교 생활 어땠어?”
“아직 비대면 수업이 많아서 잘 모르겠어요.”
“저녁은 챙겨 먹었고?”
“동아리 선배들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별일은 없고?”
“네.”
오늘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 주면 좋으련만 무뚝뚝한 아들의 대답에 못내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미성년자라고 걱정했던 아들은 어느덧 대학 생활을 제법 즐기는 듯했습니다. 점점 저희와의 연락은 카톡 안부로 대체되어 갔습니다. 그만큼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뜻인 것을 알면서도, 제 마음속 공허함은 커져갔습니다.
물론 압니다.
이제 부모의 역할은 ‘보호’가 아니라 ‘응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학교생활에서만큼은 부모가 나설 일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지난 긴 시간, 제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아이가 빠져나간 자리는 거대한 구멍 같은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한동안 둘만 남은 식탁이 어색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로 아들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곤 했는데, 이젠 저희가 알지 못하는 아들의 시간이 늘어나 그 ‘현재’를 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떠난 그 휑한 자리는, 20년 가까이 ‘엄마와 아빠’라는 이름으로 바쁘게 살았던 저희 부부가 다시 ‘나와 당신’으로 마주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던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OOO!”
아들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괜스레 불러보는 것이 남편 역시 허전한 듯했습니다. 현관 앞에 마중 나와 있던 저는 그런 마음을 짐짓 모른 체하며 칼같이 대답했습니다.
“없는뎅.”
“그러게, 진짜 없네.”
멋쩍게 웃는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아들 바라기로 살아왔던 시간을 청산하고 이제는 둘만의 계절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웃음이었습니다.
빈집 증후군이라 불렀던 그 공허함은, 어쩌면 아들이 저희 부부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다시 바라볼 시간이라는 선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