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세한도>
행정실장님의 승진전보를 앞두고 친화회에서 롤링페이퍼를 돌리고 있다.
마음을 담은 짧은 손 편지를 쓴다.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보탠다.
그렇게 시작된 빈 종이 한 장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어느새 채워지고 있다.
비슷한 말들이 반복될 거라 생각했지만 신기하게도 같은 문장은 하나도 없다.
표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을 척척 해결해 주는 사람,
됩니다 라는 한마디로 주변을 안심시키던 사람,
먼저 웃고 먼저 움직이던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여러 개의 문장이 모이자 그 사람의 모습이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나도 글들 사이에 마음을 보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00 실장님의 존재감은 참 컸습니다.
"됩니다~~!"
그 시원한 한마디 덕분에 어려운 일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새 학교에서도 그 든든함과 유쾌함으로 많은 분들의 힘이 되어 주세요.
함께해서 참 좋았습니다.
롤링페이퍼를 쓰다 문득 한 폭의 그림이 떠올랐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1844년 제주 유배 중이던 김정희는 세상으로부터 거의 잊힌 사람이었다.
권세는 사라졌고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제자 이상적 만은 달랐다.
그는 먼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스승을 살피고, 귀한 바카라과 문방구를 구해 보내며 안부를 전했다.
김정희는 그 마음에 대한 감사로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건넸다.
겨울 들판에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
얼핏 보면 담백하기 그지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계절 가운데 가장 추운 계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담겨있다.
어려움을 겪고 나면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한도>에는 추사 김정희의 감사가 담긴 긴 발문이 함께 적혀있다.
우선 보시게나
작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집 두 가지 바카라을 보내왔더니
올해엔 백 이십 권이나 되는 우경문 편을 또 보내주었네
이런 바카라들은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만리 머나먼 곳에서
사들인 것으로 한 때의 마음이 내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또한 세상의 도도한 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좇거늘
이렇듯 마음과 힘을 다해 구한 소중한 바카라들을 권세와 이익을 위해
쓰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한 늙은이에게 보내 주었네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력가들을 떠받들듯이 말일세
태사공께서는 권세와 이익으로 어울린 사람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서로 멀어지게 된다고 하였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함 속에 사는 한 사람일진대
그 흐름에서 벗어나 초연히 권세 위에 곧게 서서
권세와 이익을 위해 나를 대하지 않았다 (생략)
- <세한도> 발문 중에서 -
그런데 <세한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품고 청나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당대 문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들은 그림의 품격과 두 사람의 의리를 알아보고
감탄과 존경을 담아 차례로 발문을 남긴다.
그렇게 시작된 발문은 한 사람의 글이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글이 이어져
작은 그림 한 폭은 길이 14미터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한도>는 김정희 혼자 완성한 작품이 아니다.
제자의 변함없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알아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덧붙여져
비로소 오늘날의 <세한도>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쓰고 있는 롤링페이퍼도 그와 조금 닮아있다.
처음에는 빈 종이 한 장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한 사람을 증명하는 기록이 되었다.
짧은 문장들이 모여 실장님이 이 학교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을 완성하였다.
송별회 자리에서 롤링페이퍼를 읽는 실장님의 목소리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진다.
함께 일할 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배려와 바카라임감, 유쾌함과 든든함이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사람은 떠날 때 비로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세한도>의 오른편 하단에는 작은 인장 하나가 찍혀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짧은 네 글자 안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품은 감사와 존경,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나는 오늘 롤링페이퍼에서도 그 마음을 읽었다.
누구도 '장무상망'이라 쓰지 않았지만, 그러나 모두가 그 뜻을 적고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함께해서 든든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도 뜻을 마음껏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세한도>가 그러하듯
우리의 롤링페이퍼 또한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함께 완성한 하나의 작품이었다.
실장님은 새로운 학교로 떠나시지만 함께했던 시간은 우리 곁에 오래 남을 것이다.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가장 좋은 인사는 어쩌면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말아요!
그리고 오래도록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