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에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천국립생태원에서

by뭉클

서천국립생태원을 다녀왔다.

흔히 생태라는 말을 들으면 숲과 나무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천 국립생태원은 풍경뿐 아니라 생태가 곧 생명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서천국립생태원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곳은 사이터스(CITES) 보호시설이었다.

CITES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International Trade in Endangered Species of Wild Fauna and Flora)'이다.

상아와 호랑이 가죽, 희귀 조류와 파충류처럼 인간의 욕망 때문에 사라져 가는 야생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1975년 발표되었으며, 우리나라도 1993년에 가입했다.

서천국립생태원은 불법 거래 과정에서 세관과 수사기관이 압수하거나 구조한 동물들을 임시 보호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실제 밀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여행 가방 속에 숨겨진 거북, 택배상자에 갇힌 파충류, 뱀과 도마뱀, 앵무새까지 종류도 다양한 희귀동물들이 기발하고 불법적인 경로로 밀반입되고 있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생태원 보호시설에는 거북과 뱀, 도마뱀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이렇게 닫히고 좁은 공간에서 살아갈 생명들이 아닐텐데 막상 마주하니 가엽기만하다.

바다에서 살아야 할 거북이, 열대우림을 날아야 할 앵무새, 숲과 사막을 터전으로 삼는 파충류들이

지금도 이 곳에 모여 있다.

인간의 욕망은 그들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렸다.

우리는 밀수라고 하면 물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래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태원 한편에는 이러한 멸종 또는 희귀 동물뿐 아니라 유기동물을 보호하는 시설도 있다.

한쪽에서는 희귀하다는 이유로 생명을 빼앗고,

다른 한쪽에서는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생명을 버린 셈이다.

인간의 욕망과 무관심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결과는 똑같다.


탐방 코스 중에 생태원 온실에서는 이름부터 낯선 식물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이름조차 오싹한 '시체꽃' 일명 '타이탄아룸(Titan Arum)' 이었다.

꽃이 필 때 썩은 고기냄새를 풍겨 꽃가루를 옮겨줄 파리와 딱정벌레를 불러들이는 식물이다.

무려 36도 안팎의 열을 내어 냄새를 멀리까지 퍼뜨린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에게는 악취지만 식물에게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치밀한 전략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생태원의 연구원들은 온도와 습도, 빛과 토양을 세심하게 관리하며 이 식물이 언젠가는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산지인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열대우림에서는 최대 4m까지 자라 거대한 꽃을 피우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피운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원산지에서도 무분별한 개발로 서식지가 점차 사라지면서 번식은 더 어려워지고 있단다.

지금은 멸종위기 식물로 보호받으며 생태원과 같은 식물원에서 보전과 증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살아가는 것과 꽃을 피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아무리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도 고향의 흙과 공기, 계절과 시간, 그곳에서 함께 살아온 수많은 생명들까지 옮겨올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연구원들은 꽃이 피어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연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의 시간을 조심스럽게 이어가려는 노력이다.


생태원에서 인상 깊었던 다른 식물은

'제주고사리삼'이었다.

제주에는 세계적으로도 다양한 양치식물들이

많은데 화산섬이라는 독특한 환경과 곶자왈 그리고 습지가 오랜 세월 이어져 수많은 생명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제주고사리삼'은 더욱 특별한 존재다.

이 것은 단순히 새로운 종의 발견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속(屬)으로 인정된 식물이라 더 의미있다.

그결과 전 세계에서 '제주고사리삼속'을 이루는 유일한 식물이 되었다.

학자들은 이 식물을 기존 분류체계에 억지로 끼워 넣지 않았다.

오랜 시간 다른 식물들과는 별개의 길을 걸으며 독자적으로 진화해온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제주고사리삼은 희귀한 식물이 아니다.

제주의 자연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만의 생태를 지켜 왔는 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며,

오랜 시간이 빚어낸 생명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날 서천국립생태원을 걸으며 '생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태는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질서이다.

자기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다.

인간이 그 질서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무너뜨린 생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바카라임은 있다.

서천국립생태원은 그 바카라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한편에서는 생명을 밀수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수년을 기다린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곁에 오래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미 그 자리를 잃은 생명에게는 다시 살아갈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생태원을 나오며 문득 최재천 교수의 글이 떠올랐다.

생태학은 이제 크고 흉폭한 식인동물들에게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내가 늘 말하듯이 알면 사랑하게 되는 법이다.
- 최재천, 통섭의 식탁, p.139

우리는 흔히 호랑이는 무섭고, 뱀은 징그럽고, 악취를 풍기는 시체꽃은 기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은 아름다운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냄새를 풍기는 꽃도,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도, 사람의 눈에는 불편한 생명도 모두 저마다 생태계 안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

어쩌면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는 그들보다 우리 인간일 것이다.

멸종위기 동물을 밀수하고, 희귀한 생명을 소유하려 하고, 함께 살아가던 반려동물들을 버리는 일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생태를 배우는 일은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면 그 생명을 내 곁에 붙잡아 두려 하지 않는다.

그 존재가 자리 자리에서 자기답게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그날 서천국립생태원은 자연을 보여준 곳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를 조용히 가르쳐 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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