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학교 아래 바닷가 마을로 이어진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바카라로이다.
모내기를 마친 논은 바람이 불 때마다 연둣빛 물결을 만든다.
논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은 들판을 적시고 다시 바다로 흘러간다.
파란 바다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산기슭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은 파랗고 붉은 지붕들을 번갈아 내보이며
바다와 산 사이를 수놓고 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 눈이 시원해지는 아름다운 바다 마을 풍경이다.
그때 드넓게 펼쳐진 밭 가운데 거대한 백년초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초록빛 잎은 두툼하게 물을 품은 채 겹겹이 포개져 있고,
가장자리마다 가시를 세운 모습은 거칠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거친 몸에는 묘한 질서가 숨어 있는 듯하다.
거북등을 닮은 육각의 무늬가 줄기마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남해에서는 오래전부터 '육각선인장'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초록의 육각선인장 위로 노란 꽃이 피어 있다.
선인장밭에 발길이 닿은 것은 멀리서도 환히 보이는 노란 꽃무리 때문이었다.
척박한 땅과 거친 가시를 품은 몸에서 피어난 꽃이라 더욱 환하고 선명하다.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여러 장의 꽃잎.
얇은 비단처럼 투명한 꽃잎 사이로 수십 개의 노란 수술이 둥글게 모여 작은 태양을 만들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노지에 이렇게 맑고 고운 꽃송이로 피어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여름 햇빛 아래에서 꽃들은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꽃들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막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동그란 구멍이 하나씩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는 다시 연둣빛 새순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꽃은 오래 머물지 않지만 그 자리에는 곧 붉은 열매를 밀어 올릴 것이다.
아름다움이 순간이라면 열매는 그 시간을 견뎌낸 삶의 증거가 된다.
꽃은 끝이 아니었다.
꽃은 다음 생명을 위한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작은 생명은 단단한 백년초가 된다.
메마른 흙과 거센 바람을 견디며 몸속에 물을 품과 자란다.
사람들은 그 백년초를 약으로도 먹거리로도 키운다.
그리고 그리고 어느 여름날 다시 노란 꽃을 피워 올린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진다.
마을 길을 따라 다시 걷는다.
논에서는 어린 모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아직은 연약하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논수로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물속에서는 작은 생명들이 바삐 오간다.
왜가리는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들판을 지키며 먹이를 기다린다
그 풍경 뒤에는 언제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다
새벽마다 논의 물길을 살피는 사람,
계절을 믿고 씨앗을 심는 사람,
자연은 저절로 자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기다림과 돌봄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떠올린다.
사원에서의 종교 수련 정도를 제외하면 라다크의 전통문화 내에는
'교육'이라 부를만한 분리된 과정은 없다.
그들에게 있어 교육이란 공동체와 자연환경 사이의 친밀한 유대관계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은 모든 것을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배웠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중앙북스, p.212.
라다크의 아이들은 학교 이전에 마을에서 배웠고, 자연 속에서 자랐다.
어른들의 삶을 보며 살아가는 법을 익혔고,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람이 되어 갔다.
우리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교실에서만 배우지 않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학교에 오고,
논에서 모가 자라는 속도를 보며 기다림을 배우고,
논의 물길을 따라 생명이 이어지는 질서를 배운다.
계절을 따라 변하는 들판을 보며 자연의 시간을 익히고,
학년을 넘어 함께 뛰놀며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 곁에는 부모가 있고, 마을이 있고, 학교가 있다.
자연이 품어 주고, 마을이 보살피고, 학교가 기다려 준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멀리 학교가 보인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학년 구분 없이 함께 어울려 뛰놀고 있다.
웃음소리는 여름 바람을 타고 들판으로 번져 간다.
우리 아이들이 육각선인장의 꽃처럼 빛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그 꽃 위로 스스로 삶을 채워 가는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살리고 품을 수 있는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마을을 한 바퀴 걸으며 나는 자연이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던 삶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