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무기력에서 빠져나왔다.

텃밭에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by산너머 작은집


아래 텃밭에 자리한 고목나무에 발그레한 아기 볼을 닮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렸다.

첫 결실을 맺은 머루 포도나무에도 귀여운 포도송이가 몽글몽글 모여있다.

올해는 수박, 참외, 오이, 호박등 모두 모두 풍년이다.


아침에 눈만 뜨면 텃밭으로 나가 작물 줄기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고 가꾸는 남편 덕분에 올해는 품질 좋은 텃밭 작물을 두루 수확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2년 6개월 전 갑자기 건강을 잃고 육체가 전과 같지 않음을 힘들어하던 남편은 무기력에 빠져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말았다.

산바카라도 마다하고 애지중지 아끼던 손자가 와도 잘 놀아 주지도 않고 텃밭도 쳐다보지 않는다.


어쩔 수없이 나 혼자 텃밭일을 도맡아야 했다. 도시에서만 살아서 농사일은 해본 적이 없지만, 재미 삼아 혼자서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힘들어한 것은 그의 무기력이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자고 잠시 깨었을 때는 말도 없이 유튜브만 탐색했다.


건강했을 때는 잠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성격이라 퇴직하면 어떻게 생활할지 걱정하던 그가 무려 2년간이나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약을 복용시켜 보기도 하고, 힘내라고 용기도 줘보고, 화도 내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가족 여행을 가도 숙소 침대에서 나오지 않아 가족들의 여행만 힘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려주는 일밖에 없었다. 맥없이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단 한 가지 그가 희망을 보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탁구모임에는 나가는 것이다. 건강상 탁구를 많이 치치 못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해 오던 탁구는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나마 그가 탁구 모임에 나가는 시간은 내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다. 그가 없는 시간을 활용해 서예도 쓰고 바카라도 읽고 글도 쓰며 나만의 시간을 알뜰하게 보냈다.


집안일과 텃밭일은 물론 시골 생활에 필요한, 남자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무기력한 남편 대신 내가 하거나 옆집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가끔씩 짜증을 내며 나 혼자 감당할 시골 생활이 너무 힘드니, 다시 도시집으로 가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마다 그는 시골이 좋다며 절대 도시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사실 나도 도시보다는 시골 생활이 좋아서, 도시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자 마음에 없는 말을 자주 했으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고, 나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봄이 되자 긴 잠에서 깨듯 다시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땅을 돋우고 거름을 치고 텃밭 작물을 사다 심더니 아침 산바카라 코스가 되었다.


손에는 호미와 낫을 들고 텃밭 곳곳을 돌보며 예초기를 다시 손에 잡았다. 아직 예초기 사용이 쉽진 않지만 조심조심 둔덕의 풀도 시원하게 깎아 놓는다.


전과 다르게 작은 일에도 꼭 나를 불러 참여시키는 귀찮음도 있지만, 나 혼자 다 감당하던 때에 비하면 너무나 호사다.


적극적으로 농사일을 주관하니 그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의욕이 생기니 예민함도 줄어들고 여유로워졌다.


그가 아프고 난 후, 2년 6개월 만에 내게 긴 휴가가 주어졌다. 그동안의 인내와 수고로움을 한 달간의 미국 여행으로 기꺼이 대신했다.


미국 여행 중 남편이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손자에게 보낼 복숭아 한 상자가 자랑스럽게 놓여 있다.

건강미 넘치는 얼굴로 푹 쉬다 오라는 너그러움까지 보여준다.


이제 긴긴 터널을 다 지나온 것일까.

아니, 살다 보면 간간히 답답한 터널을 또 만날 것이다.


독백처럼 혼자 중얼거려 본다.


긴 터널을 지나고 나면,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해……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