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처럼 지나간 여행
한 밤중에 눈이 떠졌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것일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데크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 강원도의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미국 여행 중 해발 2,600미터에 있는 산장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세상과 단절된 듯 고립된 산 꼭대기에서 손에 잡힐 듯 쏟아지는 별들을 만끽했다.
벌써 그립다.
그곳에서 만난 어미를 잃은 슬픈 눈의 아기 여우가 걱정되고, 다정히 산바카라 나온 엄마 사슴과 아기 사슴, 그리고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이 그립다.
산장의 데크에서 조카며느리 애나가 만들어준 커피와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행복하게 바라본 바다 같은 하늘이 오늘은 무슨 색을 띠었을까?
동생이 월마트 본사를 따라 아칸소에 둥지를 튼 아들을 만나러 가는데, 나도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버지니아에 사는 언니네 가족들도 모두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 즐겁게 여행 준비를 하였다.
챗 지피티의 도움으로 나의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종 도착지는 아칸소에 있는 XNA공항.
무려 13시간의 비행 끝에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다. 댈러스 공항에서 2시간 30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아칸소 XNA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로 환승해야 한다.
댈러스 공항에 내려서 짐을 다시 찾고 부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잠함에 약간 긴장했지만, 환승시간이 길고 내 손 안에는 든든한 효자 챗 GPT가 있으니 별 무리 없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짐을 찾아 다음 장소로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짐을 찾아 다시 부치기 위해 막 세관을 통과하려는데, 키가 큰 중년 백인 남자 직원이 우리를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까딱하였다.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순간 ‘어른한테 손가락질이라니 참 예의가 없네’ 하고 생각하다가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들에게 있어 손가락 신호는 무례가 아니라 보통의 몸짓일 뿐임이 생각났던 것이다.
'우리를 왜 부르지?' 하는 잠깐의 염려가 있었으나 살짝 미소 지으며 "Hello" 하고 인사하며,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Hello.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는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권위적인 모습으로 내가 갖고 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눈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들었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속으로 '참 뻣뻣하군' 하고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우리가 가져간 물건들 중 문제 될만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는 정확한 한국말로 “김치? 고춧가루?” 하고 물었다.
나는 김치는 없고 고춧가루는 있다고 말했다. 혹시 생물로 오해할까 봐 “dry!!”를 강조했다.
계속된 그의 굳은 표정에 anchovy도 가져왔다고 이실직고하면서 “뭐가 문제야?” 하는 표정으로
anchovy 역시 완전 건조식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시 한번 정확한 우리말 발음으로 "아, 멸치" 하였다. 우리말 발음은 정확한데 뻣뻣한 그의 태도가 불쾌해서 내 얼굴도 굳어졌다.
그는 그제야 조금 딱딱한 표정을 풀더니 “Do you have 인쌍?” 한다.
발음이 영어 같지는 않고 어색하여, 인쌍이 어느 나라 말인가 의아해하면서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답을 찾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답답한 듯 큰 소리로 “Do you have 인쌍! 인쌍!” 한다. 마치 화를 내는 듯한 억양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침착하게 “인쌍이 무슨 뜻 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며 “Ginseng.”이라고 말했다.
“아~~ 인삼? 인쌍이 아니고 인삼이에요. 인삼” 하며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나를 따라 “인쌈, 인삼” 하며 열심히 발음 연습을 하였다.
그제야 그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운 이유를 알았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고, 한국인이 자주 가져오는 물품 중 몇 가지 아는 단어를 한국인인 우리 앞에서 말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우쭐해서 “그래도 그렇지. 우릴 대하는 태도가 너무 예의 없네. 괜히 긴장했잖아!”
동생이랑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그 남자가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즐거운 여행 하라고 인사를 한다. 그 인사에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우리나라 언어에 대해 애정을 갖고 한국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그 관심이 고맙고 흐뭇했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짐을 부치고 게이트 이동을 위해 댈러스 공항의 명물인 스카이 링크를 탔다. 우리는 보통 셔틀이라고 말하는데 왜 스카이 링크라고 하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스카이 링크를 탔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처럼 지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 공중에 둥그런 라인을 따라 달려갔다. 한눈에 댈러스 공항을 내려다보며 신나게 놀이기구를 즐겼다.
XNA 공항에 도착하자 조카와 조카며느리 애나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와 우리를 맞는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애나가 "exciting"을 외쳐댄다. 한국에서 시어머니와 시이모가 와서 너무 신난다며,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한다. 애나의 따뜻하고 다정한 환대에 긴 여정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는 짐을 풀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거의 못 잤지만 시차 적응을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다. 동네 구경도 할 겸 아침 산바카라을 나가려는데 조카가 길을 잃어버린다며 그냥 집에서 쉬란다.
손짓발짓 다 동원해서 찾아올 테니 걱정 말라며 동생과 산바카라을 나갔다.
넓은 땅을 네모 반듯하게 도시계획한 신도시로 잘 정돈된 마을은 한눈에 봐도 무척 깔끔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나라, 미국 땅은 막힌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밖으로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서툰 영어로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에 집을 나오기는 했으나,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누구한테 길을 묻겠는가.
전화도 안되는데 행여 조카에게 폐를 끼칠까 봐 두 눈에 불을 켜고 길을 외우며 동네 인공호수까지 걸어갔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분수대가 열심히 물을 뿜어 올릴 뿐 산바카라하는 사람은 두어 명뿐이다. 분수대 옆에는 강아지 전용 공원이 있다. 넓은 강아지 공원에는 강아지가 놀 수 있는 몇 가지 놀이시설과 위생시설을 갖춰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15년 전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땅에 놀랐고, 또 하나는 어디를 가나 장애인을 최우선으로 하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참 많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집 앞마당에 방울토마토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빨간 방울토마토가 방울방울 달려있다. 먼 이국땅에서 우리 집에 있는 방울이와 똑 닮은 방울이를 보니 정겨운 마음이 들었다.
동생에게 "얘, 저기 우리 집에 있는 방울이가 여기에도 있다!" 하며 반가운 마음을 내비쳤다.
방울토마토 한 그루에 뭘 그리 반가운 걸까. 혹시 벌써 집이 걱정되는 건가? 하고 내 마음을 짚어보았다. 이왕 떠났으니 아무 생각 말고 여행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보듬었다.
여행이란 평소 내가 있던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이다. 그런 만큼 평소에 갖고 있던 걱정과 염려를 다 내려놓고,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재 충전하는 소중한 기회다. 나는 여행을 하고 난 후에는 한동안 어지간한 일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다. 아마 마음속의 찌꺼기를 다 비웠기 때문에, 다시 거친 찌꺼기를 담아둘 공간이 넓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