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나는 첫 가출에 실패했다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던 날들- 상처#3

bybloom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쫓겨난 나는 갈 곳을 찾아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순간, 나의 첫 번째 가출이 시작되었다.


복도 계단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교회로 갔다.

오빠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지갑 안에는 학생용 버스 승차권 세 장과 13,000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하트 모양으로 접어 놓은 만 원짜리 한 장.

버스 안에서 조심스럽게 펼쳐 보니 모두 23,000원이었다.


이 돈으로 배고픔도 해결해야 했고, 어디든 가게 된다면 이왕이면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었다.

승차권 한 장을 내고 버스를 타 대전역으로 향했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바로그집 떡볶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떡볶이 1인분을 먹고 어묵 국물을 몇 번이고 받아 마셨다.


배가 부르니 졸음이 밀려왔다.

바로그집 앞 지하상가에는 커다란 스크린과 의자들이 길게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바둑을 두기도 하고, 노숙자들이 잠을 자기도 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중 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앞으로 뭘 하지?

어딜 가지?

학교는 안 가도 되나?

그래.

가출했는데 학교를 갈 리가 없지.

이 돈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여기서 그냥 잘까.


복잡한 생각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가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집에 들어가고 싶어지는 내가 싫었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학생, 여기서 기차 타려면 어디로 가야 혀?"

마침 할 일도 없었다.


"아,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렇게 할머니를 안내해 드렸지만 할머니의 질문은 계속됐다.


"학생이 참 착하네."

"근데 기차표는 어디 가서 사는 겨?"

"학생, 밥은 먹었어?"

"삶은 계란 있는데 하나 줄까?"


그렇게 삶은 계란 하나를 받아 들고 기차표 창구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혼자 대전역 안에 남아 있으려니 문득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그래, 서울.


오빠와 함께 뉴스로 봤던 삼풍백화점이 있는 곳.

언젠가 오빠와 탈출을 꿈꾸던 곳.

그리고 우리가 아주 오래전 살았던 동네가 있는 곳.

갑자기 그곳이 궁금해졌다.

그래.

서울 가자.

나는 매표 창구 앞으로 걸어갔다.


"서울 가는 표 주세요."

직원이 물었다.

"가장 빠른 걸로 드릴까요?"

"아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가장 싼 걸로 주세요."

"입석으로 드릴까요?"

"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가출은 서울을 향해,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로 커지고 있었다.





서울역.

서울역을 혼자 이렇게 찾아오다니.

스스로도 내가 대견스러웠다.


'배미영. 쩔어.'

하지만 곧 현실이 밀려왔다.


자, 이제 뭘 하지?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잘 곳도 찾아야 했다.

막막했다.


기차 안에서 조금 자서 그런지 졸리지는 않았다.

대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러다 한 역 이름에 시선이 멈췄다.


홍대입구역.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

자유롭고 화려한 젊음의 거리.


그래.

가 보고 싶었잖아.

가 보자.


첫 번째 가출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나는 또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혼자 서울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오... 배미영 아주 못하는 게 없어~'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은 무서웠다.

불안했다.

그래서 더 신난 척했다.

마치 여행이라도 온 사람처럼.


그런데 문제는 나는 지금 교복 차림이었다.

'누가 말 걸면 외국인인 척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이게 뭐람.'

괜히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서울 처음 온 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모습이 가출 청소년이라는 걸 더 티 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와.

개 멋있어.


화려한 간판.

번쩍이는 불빛.

늦은 밤인데도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이 시간에 내가 집 밖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집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시간.

그런데 나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교복부터 어떻게 좀 갈아입고 싶은데...


모르겠다.

화려한 간판들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버스킹 하는 사람도 보이고 벽에 락카로 낙서가 된 것까지 모두 다 신기하고 멋있는 곳이었다.


'와.. 대박'


버스킹 하는 사람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앞에 보이는 것이.. 돈통..

몇 번의 유혹이 있었지만 한참을 그 돈통만 째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음악 소리.

화려한 조명.

맛있는 음식 냄새.

그 사이에서 나는 돈통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그다음에는 부러움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저 안에 얼마쯤 들어 있을까.'

'저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다.


결국 눈물이 났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공연이 끝났다.

박수가 쏟아졌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학생."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기타를 치던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네."

"음악 듣다가 운 거예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음악 때문은 아니었는데.


"아.. 아니에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학생 잠시만"

부르더니 그 기타 치던 사람이 후드잠바를 벗어 내 허리에 감싸 묶어주었다.


'아 맞다. 생리.'


"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거 잠바 제가 돌려드려야 할 텐데.."

"나 내일도 오니까 그때 돌려줘"


"아.. 네네.."


생리대부터 사야 했다. 얼마 없는 돈으로 생리대부터 사야 하다니. 너무 아깝다.

그리고 잘 곳을 찾아야 한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속옷도 문제다.


그렇게 생리대를 사고 근처 화장실에서 해결을 하고 옷에 묻을까 봐 어디 앉는 것도 불편했고, 무작정 걸어서 걷다 보니 홍대 정문도 구경하고 미술학원, 미대입시 간판을 보고, 신촌에 고시원, 여성전용 고시원 월 12만원. 또는 17만원. 이렇게 붙은 것들이 보였다


그것들을 보면서 알았다.


나는 잠시 지갑을 열어 보았다.

남은 돈을 세어 보지도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 가출은 실패했다. 나중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돈도 최대한 많이 모아서 다시 와야겠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명분. 그것을 만들어서 서울로 다시 오고 말아야지. 그리고 미술학원들이 즐비했던 거리를 보며 디자이너의 꿈을 꾸게 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기차비,

그리고 허리에 묶인 후드집업,

이 상태로 학교를 가야 한다는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 오래오래 버티고 싶었는데..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가출. 준비가 안된 가출. 인정하고,

가출에 대한 계획을 잘 짜서 다시 서울로 오기를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난 어릴 적 나를 키워주셨던 큰어머니 집으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고,

큰어머니가 어머니께 연락을 했고, 그다음 날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가출은 끝이 났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도 혼내지도 않으셨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엄마."

"왜."


"나 생리 시작했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만 바라보던 나는 생각했다.

서울은 생각보다 멀었고,

나는 생각보다 어렸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도
결국 나를 데리러 오는 건 어머니였고,
경찰서에서도 나를 데리러 오는 건 아버지였다.

나는 아직,
누군가가 데리러 와야 하는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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