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던 날들- 상처#4
첫 번째 가출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큰어머니집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갈 땐 이미 자포자기였다.
씻고 싶었다. 생리가 묻은 옷도 갈아입고 싶었다. 무엇보다 잘 곳이 필요했다.
'찾았다'라는 안도감과 '어떻게 벨을 누르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일렁였다.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지 못하고 껑충껑충 뛰어 대문 넘어 집에 불빛을 보았다.
아직 안 주무시나 보다.. 더 늦기 전에 벨을 눌러야 할 텐데..
그 순간 마당에서 자던 개 한 마리가 짓기 시작했다.
'헛..' 순간적으로 왜 몸을 숨겼는지 모르겠다.
개가 한참을 문 쪽을 보며 짓자 마침내 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몽실이 왜 그래 먼일이야.. 밥 먹었잖아 ~ 왜 그래~ 이 밤중에 짖으면 안 되지.."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 숨겼던 몸을 일으켜서 용기를 내봤다.
"큰엄마..."
큰엄마는 한 번 뒤를 돌아보시더니.. 다시 문쪽으로 걸어가셨다.
"큰엄마. 저 미영이에요"
다시 뒤를 돌아보시더니 큰어머니는 상상치도 못한 일에 화들짝 놀라셨다.
"아이고 미영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
나를 보자마자 안아주셨다.
왈칵 안겨 나는 그동안 설움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잘 왔어. 잘 왔어."
큰어머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아시는 것 같았다.
"잘 왔다."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집에 들여보내고 수프를 끓여주시더니 큰엄마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네 엄마한테 연락하지 말까?"
그 어릴 적 듣던 '너네 엄마'라는 말조차 다정하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큰어머니는 씻고 갈아입을 옷을 주셨고, 내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켜주셨다.
잠결이었다. 큰어머니의 전화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다 컸어. 그 어릴 적 기억이 다 나는지 여길 찾아왔어.. 여전히 바쁘고?"
"암튼 힘들면 말해. 여기 하숙생들도 있고, 미영이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암튼 자고 있으니까 내일 퇴근하고 와."
전화통화를 끝낸 큰 어머니는 내 머리맡에 물 한잔 떠 놓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릴 적부터 자다가도 깨서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자던 버릇을 큰엄마도 기억을 하고 있는데. 울 엄마는 내게 왜 이렇게 무관심할까..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이 어렵지 않으면 나도 서울에서 큰엄마랑 살고 싶다'
아침이 되자 부엌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나와봤더니 큰어머니는 안 보이고 어제 통화로 들었던 하숙생 언니들이 알아서 밥을 떠서 먹고, 반찬도 떠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설거지 통에 넣어두고 일어나는 것들이 보였다.
나도 똑같이 언니들 하는 것을 따라 했다.
눈칫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언니들이 먹었던 그릇까지 설거지를 해 놓았다.
하숙생 언니들은 하나 둘 집을 나가고 난 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가 배고프면 밥을 떠먹고 TV도 보고 개도 쳐다보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어머니보다 더 빨리 도착한 울 어머니..
"짐 챙겨 나와"
어머니는 집안에 들어오지도 않으셨고, 차를 타라 하셨는데.
말도 없이 찾아와 인사도 없이 가는 것이 죄송했다.
그렇게 차를 타고 나는 서울에서 다시 대전집으로 갔다.
차 안의 공기는 숨이라도 잘못 쉬면 폭탄이 터질 것 같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도 혼내지도 않으셨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엄마."
"왜."
"나... 생리 시작했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응답이 더 이상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눈을 감고 자는 척이라도 하려 했는데 난 그렇게 잠이 들었다.
차가 섰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깨서 봤을 땐 어머니는 차에서 내리고 없었다.
키가 꽂혀있었고, 차의 창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보니 금방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렁크가 열리고 닫혔고, 그리고 어머니는 다시 차를 타셨다.
그렇게 또 한 번 차가 섰고, 어머니는 내리셨다가 또 트렁크가 열리고 닫혔고, 어머니는 다시 차를 타셨다.
집에 다 도착해서는 어머니가
"딴 데로 세지 말고 집에 올라가 있어"
그렇게 난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안 계셨고, 오빠의 방이 먼저 보였다.
여전히 내쫓기던 날 그때처럼 성경바카라은 찢겨 있었고, 오빠가 교회에서 연습하던 시나리오 대본도 찢겨있었다. 그것을 보면 오빠도 가출 이후 아직 집에 안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씻고 나서도 아무도 집에 안 들어와서 난 TV를 틀었는데 틀자마자 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리모컨을 정리하고 난 방으로 후다다닥.. 뛰어 들어갔는데.
어머니 그리고 오빠. 같이 들어왔다.
오빠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났다. 아버지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때 막아내던 오빠의 모습이.
"방 치워놓고 나와"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 손에 한쪽에는 케이크 한쪽에는 통신사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눈빛으로 오빠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방을 치우고 나왔는지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무슨 날이야? 이게 다 뭐야?"
"미영이도 나오라 그래"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대로 쏙 들어가 등을 돌리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오빠가 문을 열고 "미영아. 나와봐."
내가 꿈쩍을 하지 않자 오빠는 귀에다가 속삭였다.
"미영아. 좋은 일인가 봐. 케이크가 있어. 얼른 나와~"
그 순간. 머지? 웬 케이크?
눈을 떴다.
오빠가 웃으며 서 있었고, 손을 내민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정말이다.
엄마가 식탁에 앉아 계셨고, 식탁에는 케이크가 있었고, 초가 1개 꽂혀있었고, 빛이 나고 있었다.
"미영이가 여자가 된 날이야. 불어봐"
꿈인 것 같았다.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엄마는 오늘 날짜가 아닌 어제 날짜에 꽃송이 하나를 그려 넣으셨다.
후.... 초를 끄고 어머니는 오빠와 내게 핸드폰을 주셨다.
"니들 오고 가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핸드폰은 있어야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식탁에서 웃으며 케이크를 먹는 시간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어머니가 낯설었다.
받아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핸드폰을 받아 들어 전원을 켜보니 개통도 되어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케이크를 먹고,
서로 번호를 저장하고,
처음 받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삐삐삐삐. 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자.
어머니도 모르게 "얼른 챙겨서 니들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을 하셨다.
핸드폰을 챙겨 후다다닥 방으로 들어왔고,
오빠도 방으로 들어갔고, 먹던 케이크는 어머니가 정리를 하고 계셨을 텐데.
또 술병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뭐 나와보지도 않아?" 소리에 오빠랑 나는 나와서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하고 다시 방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또 술이야? 그러다 또 재발하지.. 어쩌려고 맨날 술이야?"
"뭔데. 뭐. 나 없이 니들끼리 케이크를 사다 먹고 사람 본 척도 안 하고 후다닥 숨어들기 바빠?"
"하휴.. 당신은 몰라도 돼요."
"뭔데 뭔 날인데 뭐야 당신 생일이야?"
"됐어. 생일은 무슨.."
"저것들이 맘대로 가출을 했는데 왜 데리고 들어왔어?"
"그만 좀 해요."
어머니는 케이크를 치우려고 하셨던 것 같다.
"뭔데 난 맛도 못 보게 치운데.. 내놔봐"
"아 그럼 당신이 먹고 치우든가. 난 몰라"
어머니는 그렇게 발소리가 멀어졌고 안방문이 탕.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난 한참 새 핸드폰을 만지고 다이어리에 적어놨던 번호들을 입력하기 바빴다.
문자 메시지도 오빠한테 보내봤다.
"오빠.. 신기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핸드폰이라니.."
"몰라.. 근데 너도 집 나갔었어?"
"아.. 응 ㅋㅋ 큰엄마집에 갔다가 붙잡혀왔어"
"대단하다.. 서울은 어떻게?"
"기차 타고.. 몰라 그렇게 됐어.. 오빠는 어디 갔었어?"
"병원에.. 그건 그렇고, 아빠 술 또 찾으시나 보다"
한참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아버지는 술을 다 드셨는지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안방으로 들어가시려고 했는 것 같은데 또 소리를 지르신다.
"이놈의 여편네 문은 왜 걸어 잠갔어.. 문 안 열어? "
나는 방 안에서 새 휴대폰을 꼭 쥔 채 숨을 죽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