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모르고 견디는 아이 - 기억#4
학교에서는 날 부잣집 딸내미 혹은 코드명, 또는 배명이라고 불렀다.
코드명이라고 하면 뭔가 수학적 지식을 가진 과학자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콩코드의 ‘코드’에, 미영을 합친 말이었다.
내 이름 배미영을 빠르게 발음하면 배명이 된다.
“야! 배명~ 가방 열어봐.”
가방을 열었을 때,
소위 잘 나간다던 선배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
술이나 담배를 잘 숨겨 가져오면 난 코드명이 되었다.
"오오.. 역시 코드명 ~"
만족스럽지 않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을 땐
선배든 친구든 상관없이 맞았다.
발길질도 여러 번 당했고,
화장실이나 옥상으로 자주 끌려갔다.
아버지가 숨겨둔 술과 담배를 베란다에서 꺼내
전달해 주기 시작했고,
집에서도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었다.
학교에 잘 숨겨 가져가서 전달만 하면
나는 하루 정도는 안전할 수 있었다.
술이든 담배든,
잘 숨겨 가져다주면
그날의 나는 ‘코드명’이었다.
임무라도 끝낸 사람처럼 불리는 이름.
칭찬 같아서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늘 힘들었다.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하는 날도 있었고,
지각이라도 하는 날엔
교문 앞에서부터 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가방 안에서 병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고,
무겁기도 했다.
“가방 열어봐.”
선생님에게 걸려 혼나기도 했다.
이래 맞나,
저래 맞나.
맞는 것은 똑같은데 선생님한테 맞는 것이 제일 견딜만했다.
출석부 또는 지시봉으로 한두대로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챙겨 온 물건들을 뺏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난 왜 왕따를 당할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단순히 부잣집 딸내미라서?
모르겠다.
물어본 적은 없다.
더 비웃을 게 뻔했고,
설령 이유를 말해준다 해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땐 한 번도 덤빌 생각조차 못 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없는 듯 지내는 건 익숙했다.
학교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다니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숨겨뒀던 술과 담배를 어머니에게 들킨 뒤부터였다.
더 이상 선배들에게 가져다줄 수 없게 되었다.
“야, 부잣집 딸내미. 이게 다야? 요즘 일 안 해?”
“담배 좀 사 와.”
방과 후,
집으로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아파트 입구에서
그들은 늘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 돈… 없는데.”
그 말을 하면 더 맞았다.
“ㅎㅎㅎ 돈 있으면 사 올 수는 있고?”
“구해와야 할 거 아니야~”
선배들은 날 찌르고,
발길질하고, 머리를 툭툭 쳤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아버지가 때리는 것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몇 번은 동네 슈퍼에서 담배를 훔쳤다.
그러다가 결국 걸렸다.
교복을 보자마자
슈퍼 아저씨는 학교로 연락했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빌고 또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슈퍼에서는 이미 내가 여러 번 훔친 걸 알고 있었다.
범인을 못 잡아 벼르고 있었던 건지,
그동안 모른 척 보호해 준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그날의 아저씨는 유난히 집요하고 무서웠다.
“너 선생님 오신다 했으니까 그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
어린 게 벌써부터 담배나 훔치고…”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도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오는 손님들마다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무도 날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저씨… 저 학원도 가야 하고요.
학원 안 가면 혼나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도둑질하는 건 안 혼나고? 어딜 가.”
도망치려다 귀를 붙잡혀 끌려왔다.
“아… 아파요…”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날 데리러 온 사람은 엄마였다.
“헉… 엄마…”
“데리고 갈게요.”
슈퍼 아저씨께 대충 인사만 하더니 엄마는 말했다.
“뭐 해? 당장 안 나와?”
나왔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방향이 아니었다.
엄마는 빠르게 걸었고, 나는 뒤를 따라갔다.
“엄마… 엄마?”
엄마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경찰서 앞이었다.
“엄마… 다시 안 그럴게요.”
“끌려들어 갈래? 니 발로 들어갈래?”
엄마는 먼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아아~”
두 명의 경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마치 왜 왔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검은 의자에 앉자마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경찰서를 나가버렸다.
들어오기 전까지 경찰서는 나쁜 사람들만 오는 험악한 곳인 줄 알았다.
근데 생각보다 따뜻했다.
따뜻한 형광등이 있었고,
조용한 목소리가 있었고,
나를 때리는 사람도 없었다.
엄마가 나간 뒤,
적막을 깨고 경찰아저씨가 말했다.
“도와줄 것은 없니?”
그 말이 너무 따뜻했다.
너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음이 눈 녹듯 무너지면서 억울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졌다.
근데 이상하게도,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신 안 그러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온기가 좋아서,
나는 경찰서에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울다 울다가,
경찰아저씨를 화나게 하면
경찰서에 오래 갇혀 있을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면 학교에도,
집에도 안 가도 되는 줄 알았다.
근데 난 경찰아저씨를 화나게 하는 방법조차 몰랐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있자
경찰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말을 해야 도와줄 수 있어.”
아저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부모님의 학대까지도.
근데 왜 그랬는지,
난 엉뚱한 말만 쏟아냈다.
“전 상습범이에요. 저 좀 잡아가세요. 절 가두어주세요.”
그날 처음으로, 집보다 편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바라는 것이 생겼다.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