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나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보며 탈출을 꿈꿨다

상처를 모르고 견디는 아이 - 기억#6

bybloom


아버지가 퇴원하고 들어오셨지만

수술이 잘된 건지, 치료가 잘된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반항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빠한텐 관심 없어.’

그러니 제발, 내게도 관심 꺼주세요.


어머니는 마치 오늘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해 돌아온 사람을 대하듯 아버지를 대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집에 가정부 아주머니가 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식단도 중요했고,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밀린 집안일까지 감당해야 했던 것 같았다.

기도 때문이었을까. 나는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세 번 집에 오셨다.

청소를 하고, 저녁을 차려놓고, 반찬거리까지 만들어두고 가셨다.

아주머니가 오기 시작한 뒤부터 집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생겨서였는지, 부모님은 집에 더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아주머니에게 밥 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어깨너머로 설거지와 집안일을 배우며 부모님 없는 집에서

오빠와 둘이 밥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 부모님이 안 들어온다고 연락이 오는 날이면,

아주머니는 우리가 저녁을 다 먹는 것까지 확인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주방 불까지 끄고 가셨다.

나에게 직접 연락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몇 번 반복된 패턴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폭력에서 조금 멀어졌고, 동시에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오빠와 둘이 지내는 시간만큼은 숨을 쉬며 살 수 있었다.


"학교 선배들이 오빠 가져다주래" 선물을 전달하고

난 오빠에게 컴퓨터 게임도 배웠다. '페르시아의 왕자'였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내게 모험 게임이 아니었다.

가시 함정을 넘고, 무너지는 바닥을 건너고, 감옥을 빠져나가는 연습이었다. 현실에서는 갈 수 없는 곳을 게임 속 나는 매번 탈출하고 있었다.


오빠는 고등학생이라 과외도 하고 학원도 다녀 나보다 훨씬 바빴다.

혼자 집에 있을 때 오빠방에 있는 컴퓨터로 하라고 오빠가 알려주었다.


그래도 가끔은 혼났다. 그날은 그냥 부모님 기분이 안 좋은 날이다.

대부분 TV를 보다 걸린 날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지자 오빠와 나는 거실로 나와 TV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부모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날이면 우리는 재빨리 리모컨을 정리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도 어머니는 TV 뒤를 손으로 만져보곤 하셨다.

TV뒤에 열기가 남아 있으면 우리가 TV를 봤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TV열기로,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다 안 먹었을 때, 식탁 정리를 제대로 안 했을 때,

그냥 기분에 따라 어느 날은 아는 척도 안 한다고, 어느 날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그냥 그렇게 기분에 따라 매일 이유는 달라졌지만 혼났다.

어느 날, 오빠와 TV를 보다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오빠가 물었다.


“미영아. 넌 저런 거 보면 무슨 생각 들어?”

“무슨 생각?”

“난 저런 사고 보면 왜 저 근처에 없었을까 싶어.”

“왜?”

“사고 난 척이라도 해야 이 집에서 없어질 수 있잖아.”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적이었지만,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늘 원망은 했어도 한 번도 진짜 사라질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빠는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린 집 나가야 살아. 근데 그러려면 명분이라는 게 있어야 하잖아.”

오빠는 TV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런 큰 사건 하나 터지면 난 그냥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고 싶어.

오빠가 공부 왜 열심히 하는지 알아? 엄마가 못 찾을 만큼 먼 나라로 갈 거야.”

“뭐 되고 싶은 건 있고?”

“없어. 그냥 멀리 가고 싶어.”

그 말을 하는 오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하나도 웃겨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오빠도 오래 참고 있었다는 걸.


“나도 데리고 가…”

내 말에 오빠는 한숨처럼 웃었다.

“으휴. 내가 너까지 어떻게 바카라임지냐.” 그리고는 다시 TV를 보며 말했다.

“공부하다 안 되면 군대 갈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 살길은 네가 찾아.”

오빠는 나와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빠가 사라지는 순간을.

군대를 가거나, 집을 나가거나, 어딘가로 없어지는 순간.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공부라도 잘하면 나도 따라갈 수 있을까.

명분.
우리가 이 집을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

결혼?
그거 말고는 없는 걸까.

명분 있는 가출.
결혼 그건 너무 멀고, 나에게는 없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처음엔 오빠가 공부를 잘해서 오빠만 사랑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공부를 잘해도 맞았고, 못해도 맞았다.


나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어디서든, 없는 사람처럼.


공부를 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받는 오빠도 본 적이 없었고,
공부를 못한다고 더 혼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혼나는 이유는 성적 때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도 탈출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힘이 생겼다.

공부.

그래, 공부해야겠다.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탈출이 조금이라도 빨라질 것만 같았다.


학교에 가서 바카라을 펼치고,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필기를 하고, 교과서에 밑줄을 그었다.

처음이었다.


늘 없는 사람처럼 지내던 내가 마음 하나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날부터 선생님과도 눈이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배를 부여잡고 엎드려 있으니 선생님이 보건실에 가보라고 했다.

보건실.


초경이었다.

약을 먹었지만 생리대도 필요했고 갈아입을 속옷도 필요했다.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내 얼굴을 본 선생님이 조퇴를 허락해 주셨다.

이상하게 그날은 다크서클이 있는 내 얼굴이 좋았다.


조퇴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통통 튀듯 가벼웠다.

배가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바카라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교복 치마를 다시 입고,
속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엄마는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순간, 스치는 생각.

‘설마… 아빠?’

그때였다.


“하하하… 호호… 아잉~ 왜 그래… 오빠, 뭐야…”

낯선 여자 목소리가 안방에서 흘러나왔다.


문을 열어야 할지, 모른 척해야 할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안방에서는 낯선 웃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아잉~ 왜 그래… 진짜…”

처음 듣는 말투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저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나는 방문 앞에 서서 손에 쥔 속옷만 구겨댔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방 안에서도 들릴 것 같았다.

아버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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