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그녀는 쭈뼛쭈뼛 집으로 들어와 내 방에 자신의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소파 위 널브러져 있던 바카라들만 정리해서 테이블 위로 올렸다. 급히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어지럽혀져 있진 않았다. 어제 집안 청소를 좀 해 놓은 게 신의 한 수였다.
"너 밥은 먹었어?"
내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쩌면 하루 종일 굶었을지도 모르고... 나는 먹을 게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열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나 역시 요즘 뭘 제대로 안 챙겨 먹는 탓이었다. 멋쩍어진 나는 뒤돌아 그녀를 보며 물었다.
"...시켜 먹을까?"
그녀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음식을 주문하고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냈다. 음식이 도착해 밥을 먹는 내내 어색함이 맴돌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고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계속 이렇게 어떻게 지내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색하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너도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내는 동안 네가 불편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편하게 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 쪽을 보지 않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너도 불편하잖아."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였다.
"너야말로 나 때문에 괜히 집에서 불편하게 있을 필요 없어."
나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좀 상했다. 좋은 마음으로 얘기한 건데 왜 저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다물었다. 지금 감정적으로 대꾸했다간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서 싸우면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아냐. 안 불편해. 나는 그냥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래."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받아치지 않은 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마지막에 계속 싸워댔었지.
"그러니까 내 눈치 보지 마. 그거면 돼."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자 그녀도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다 먹은 뒤, 나는 서랍을 뒤져 사용하지 않은 칫솔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칫솔을 건네받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건은 욕실 안에 거울 장 열어보면 있어. 드라이기는 여기. 혹시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나 역시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을 그녀에게 내어 주었으니 당분간 나는 이 방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그녀가 내 방에서 잠을 잔다. 그 사실만으로도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강우진. 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찰이야.
"저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틈으로 갑작스럽게 들린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있는 방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 클렌징할 오일이나 폼 같은 건 없겠지? 포인트 리무버들도... 챙긴다는 거를 깜빡했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반도 못 알아들었다.
"어?"
"세안 용품..."
"아."
나는 몸을 일으키고 점퍼를 꺼내 걸쳤다.
"어? 어디 가게?"
"우리 집에 그런 게 어딨어. 사 와야지. 니가 갈 순 없잖아. 목록 알려줘."
내 말에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최근에는 계속 나를 노려만 보던 그녀였기에 화가 나지 않은 표정은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적어준 리스트를 손에 든 채 신발을 신고 있는 내 뒤에서 그녀가 작게 웅얼거렸다.
"미안. 매니저 오빠한테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신을 신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회사에서 그녀가 우리 집에서 지낸다는 걸 알면 그 사납게 생긴 매니저는 어떤 반응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괜찮아. 근데 이걸 어디서 사야 하는 거야? 편의점 가면 팔아?"
"아니, 그런 데는 없어. 올리브영 가면 다 있을 거야."
나는 리스트를 한 번 들여다보았다. 이름도 요상한 것들이 잔뜩 쓰여 있었다. 내가 과연 이걸 전부 다 제대로 사 올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어서 오세요, 올리브영입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종류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디서 뭘 찾아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았다.
"저기... 제가 정말 하나도 몰라서 그런데요. 약산성 클렌징 폼이 뭡니까?"
"아, 네 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직원이 추천해주는 여러 가지 제품 중 그냥 제일 비싼 걸 담았다. 비싸면 좋은 거겠지 싶어서였다. 제일 어려워 보이는 걸 해결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립앤아이 리무버... 클렌징 오일... 화장솜... 마스카라 리무버..."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화장 한 번 지우는 데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7만 8천 원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계산대에 서서 카드를 내밀며 다시 한 번 여자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을 지우는 데만 7만 원이 넘는 돈이 든다니.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신세계였다.
"왔어?!"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나는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도 없는 나인데 마치 집에 강아지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녀는 내게서 쇼핑백을 받아들곤 신이 나 보였다.
"얼마 나왔어? 보내 줄게."
"얼마 안 나왔어. 둬."
나는 나간 김에 사 온 음식들을 채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동안 뭘 해 먹지 않고 살아서 속이 텅 비어 있던 냉장고는 그녀를 위해 꽉꽉 채워졌다.
그녀가 씻는 동안 나는 그녀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노트에 써 내려갔다. 공동현관 비밀번호, 집 현관문 비밀번호, 와이파이 비밀번호 따위였다. 한 번도 집 현관 비밀번호를 남에게 알려줘 본 일이 없던 터라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세안 용품을 잔뜩 산 일도 그랬다. 내가 살면서 여자 세안 용품을 잔뜩 살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처음 해보는 일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마음 한쪽은 시큰하게 아려왔다. 연인이었을 때 못 해본 일들을 헤어진 마당에서야 하고 있었으니까.
헤어진 지가 일 년, 최근에 만났을 때는 서로 상처를 주며 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며칠만이라고 해도 매일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지내야 한다니. 과연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어색할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막상 연인일 땐 만나지 못해 서러웠는데 헤어지고 나니 매일 봐야 하는 사이가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는가.
그녀가 다 씻고 나온 뒤 나 역시 씻기 위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욕실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욕실, 세면대 위에 나란히 놓인 칫솔 등이 그녀가 당분간 이곳에서 함께 지낼 거란 사실을 새삼 실감 나게 했다.
씻고 나와 방에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
"어? 아니 아직!"
방 문을 열자 그녀가 편의점 봉투를 내 눈 앞으로 내밀었다. 식탁 위에 모자와 마스크가 놓여 있는 걸 보니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맥주 한 잔 할래?"
나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 술만 한 게 더 있을까 싶었다. 독한 술도 아니고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럴까? 근데 너 지금 나갔다 온 거야? 나를 시키지."
내가 그녀에게서 봉투를 받아들자 그녀는 몸을 돌려 거실 쪽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집에만 갇혀 살면 숨 막혀서 죽어."
"그래도..."
"그만. 잔소리하지 마. 나갈 때 사람도 별로 없었고, 알바도 나 못 알아봤으니까."
누가 알아보는 게 문제가 아닌데...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 계속 집에 갇혀 지낼 순 없는 노릇이긴 했다. 김기태가 당장 우리 집 근처에서 나타날 일은 없으니 일단은 괜찮겠지 싶었다.
나는 맥주 중 일부는 냉장고에 넣어 놓고 안주를 담을 그릇을 꺼냈다. 그동안 그녀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우리는 마주 앉아 맥주 캔을 한 번 부딪혔다. 초반에는 둘 다 별로 말을 하지 않아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렇게 말없이 몇 모금 마시던 중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맞아 쉽지 않긴 하지. 안 쉬워, 안 쉬워."
나는 농담으로 그녀의 무거운 말을 넘겼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혼자 산 지는 오래 됐어?"
그녀는 가벼운 말투로 우리 집 거실을 한 번 둘러보며 물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응. 성인 되고부터는 쭉 혼자 살았지."
"가족들은?"
나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혀로 아랫입술을 한 번 훑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처음 그녀를 떠나야 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아직 미국에. 형이 거기서 자리를 잡았거든."
내 대답에 그녀 역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우린 아직 십여 년 전 이별에 대한 마무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다 말을 돌렸다.
"근데 너 집 진짜 깨끗하게 잘 해놓고 산다. 직접 다 치우는 거야?"
나는 화제가 돌려진 것에 감사했다.
"응. 나 제법 살림꾼이야."
"대단해. 나는 주에 2~3번 오시는 이모님 안 계시면 아마 큰일 날걸?"
"우리 집은 너희 집과 달리 작잖아."
"남자들이 원래 여자들보다 더 깔끔하대."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우리 팀장님 자리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던데..."
"그래? 팀장님은 어떤 분이신데?"
"능글맞아. 내가 절대 이길 수가 없는 분이지."
우리는 한참 동안 소소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맥주가 한 캔, 두 캔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 편해졌고, 이따금 깔깔 웃는 그녀의 미소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꽁꽁 얼어 있던 우리 집은 그렇게 그녀가 가져온 온기에 조금씩 녹아들며 봄을 맞고 있었다.
첫날 조금 편해져서인지 다음 날 아침도 약간은 덜 어색했다. 출근하기 전에 나는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깬 건지 그녀도 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작게 하품하며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았다.
"벌써 일어났어?"
"보통 온라인 게임인은 이 정도 시간이면 출근이란 걸 하거든."
나는 그녀의 앞으로 방금 만든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우와. 아침 해 먹어? 엄청 부지런하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아주 잠깐 눈을 굴렸다. 사실 아니다. 아침을 이렇게 챙겨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준비했다고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다.
"가끔."
그녀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뭐야? 이거 왜 맛있어? 뭐지?!"
나는 겨우 빵 하나에 놀라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게 내가 그녀에게 해준 첫 요리라는 게 떠올랐다. 이상하게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또 시큰거렸다. 나는 그런 모습을 들킬까 싶어 얼른 몸을 돌렸다.
"우유 줄까?"
나는 그녀의 앞에 머그컵을 놓고 우유를 가득 따랐다. 그녀는 내가 따라 놓은 우유를 마시고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베어 물 때 작게 "앙" 소리를 내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차려 준 아침을 맛있게 잘 먹는 걸 보니 조카 생각도 났다. 그러니 내가 지금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진짜 그냥 조카 같아서인 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집 안에는 그녀의 물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욕실 선반에 놓인 병들은 이제 어느 게 그녀 것인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퇴근하고 들어올 때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만 그런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소파에 앉아 바카라을 읽을 때도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발치에 앉아 핸드폰을 보기도 했다. 그런 침묵도 이제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번 편하고 익숙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집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걸 깜박하는 경우도 더러 있긴 했다.
긴급 출동 건이 있어 새벽 늦게서야 들어온 날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도착했을 즈음엔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뭐 영화나 드라마처럼 방을 헷갈린 건 아니었다. 나는 잘 씻었고, 내가 쓰는 방에 잘 들어갔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작은 해프닝은 아침에 일어났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깬 나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너무 피곤해서 눈도 잘 떠지지 않아 비몽사몽한 상태로 거실로 나섰다. 문제는 내가 잘 때 습관이 옷을 벗는다는 것이었다.
"...으악!! 야! 옷을 입고 나와야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내가 지금 상의를 홀딱 벗은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내 아랫도리를 살폈다. 다행히 반바지는 걸치고 있었다.
"아, 미안. 깜빡했어."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으로 따랐다. 이왕 나왔으니 물은 마시고 들어가야 하니까.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한 번 더 소리쳤다.
"옷 입으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 벗은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더 큰일은 그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내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벌컥 들어와버린 것이었다. 문을 잠그는 건 당연히 생각도 못했던 터였다.
"무...문을 잠가야지!!"
그녀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고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혼자 살면서 욕실 문 잠그는 사람 있나? 있으면 손 들어보라지.
그땐 정말 다 벗은 상태였고, 그건 좀 수치스럽긴 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내가 욕실에서 나올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을 지나갈 때도, 그녀는 괜히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는 척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뭐가?"
그녀는 그러는 내가 얄밉다는 듯 입을 앙다물고 씩씩대더니 방으로 훽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맞다. 일부러 그러는 거. 젖은 머리, 은은히 풍기는 샴푸나 바디워시 향 같은 건 옷을 입고 있어도 야릇한 기분을 들게 한다는 거. 아주 잘 안다.
이미 진작에 서로 벗은 몸을 다 본 사이임에도 내 작은 도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나는 이제 그런 장난도 칠 만큼 그녀가 편해져 있었다.
며칠만 있겠다던 그녀는 벌써 일주일째 우리 집에 있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그녀가 우리 집에 있는 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오늘은 몇 시에 와?"
출근하려는 내 뒤에서 그녀가 물었다.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내 퇴근 시간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보자 그녀가 멋쩍은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저녁을 어떻게 할까 해서..."
"같이 먹게?"
"너 늦으면 나 먼저 먹고."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작게 말을 했다.
"...일곱 시 전엔 올 거 같아."
"...그럼 기다릴까?"
그녀의 질문에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첫날 같이 저녁을 먹은 이후로 사실 제대로 된 식사를 함께 한 적은 없었다. 내가 자주 늦게 퇴근한 탓도 있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다이어트를 위해 샐러드 같은 걸 시켜 먹는 탓도 있었다.
"시간 맞으면. 혹시 내가 너무 늦어지면 먼저 먹어."
내 말에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찍 와~~~"
나는 그날 자꾸 하늘로 올라가려는 광대를 내리며,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사건이 터진 탓이었다.
"우진아, 효범이 데리고 출동 좀 해야쓰겄다. 그 저 앞에 큰길에 둘리 슈퍼 알제? 거 강도 들었댜. 그 새끼 지금 도주 중이니께 가서 애들이랑 합류 햐."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아침에 현관 앞에서 나를 보며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 나 오늘 늦어.]
나는 급히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차에 올랐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지만, 확인할 새는 없었다. 우리는 도주 방향을 따라 나뉘어 움직였다.
동선을 좁혀가는 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놈은 큰길을 피해 계속 골목만 타고 도는 듯했고, 우리는 그 뒤를 한참이나 쫓았다.
놈을 발견한 건 좁은 골목 안이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뒤돌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야 인마! 거기 서!"
나와 흩어져 놈을 찾아다니던 효범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 반대편 골목 끝을 막아섰다. 효범이를 발견한 놈은 잠깐 멈칫하더니 곧장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쪽이 도주로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이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놈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언제든 덤벼들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앞뒤로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놈이 주머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안 비켜!?"
나를 협박하며 나이프를 휘두르는 놈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나이프도 진짜 쓸 각오로 꺼내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놈일수록 예측이 어려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방심할 순 없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 그가 나와 거리를 좁히기를 기다렸다. 놈은 나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나는 익숙하게 몸을 틀어 칼끝을 피했다.
칼을 휘두르는 폼을 보니 역시 배운 놈은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허공에 찔러대는 녀석의 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막았지만, 딱 한 번 미처 피하지 못한 칼끝이 팔뚝을 스쳐 지나갔다. 예리한 통증이 순간적으로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상처를 확인할 틈은 없었다.
나는 다음번 칼이 날아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팔을 감아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꺾어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밖으로 돌렸다. 내 힘에 눌린 놈이 휘청이는 틈을 타 나는 안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어깨를 밀어 벽에 붙이자 녀석의 손에 힘이 풀리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얼른 발로 칼을 멀리 밀어 버렸다. 효범이도 나를 도와 놈의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효범이가 몸을 비틀며 반항하는 녀석을 바닥에 눌러 엎드리게 했다. 그가 수갑을 채우고 체포 사유를 고지할 때가 돼서야 나는 내 팔뚝을 내려다봤다. 점퍼가 조금 찢어지고 그 아래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 씨..."
"강 경위님! 괜찮으세요?! 어! 찔렸어요?!"
뒤따라온 팀원들에게 범인 인계를 마친 효범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아냐. 살짝 스쳤어. 괜찮아. 칼 챙겨."
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붙잡고 손목에 찬 시계부터 보았다. 벌써 시간은 8시가 다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