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이 필요해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image.png서비스 스틸컷 _ XXX_SOUND 테오 (본명 마테오)




41. 경력직이 필요해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에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김기태의 정체를 숨긴 것보다, 스토커처럼 그녀의 생활을 쫓은 것보다, 내가 사용한 존칭에 더 충격을 받은 듯해 보였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뚝뚝 흘러넘쳤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으므로 차마 손을 뻗지 못한 채 주먹만 움켜쥐었다.


"우리 진짜 이렇게 남인 채로 있을 거야? 계속?"


그녀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상태로 내게 애원하듯 물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는 목이 멘 채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어 간신히 말을 뱉어내었다.


"... 너는 어떻게 나를 잊는 게 매번 그렇게 쉬워?"


그렇게 뱉어진 그녀의 말은 기어이 내 상처를 벌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쥐고 있던 주먹을 더욱 꽈악 쥐었다.


헤어지자고 말을 처음 뱉었던 건 나였지만, 나를 밀어낸 건 그녀였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녀를 보지 못해 괴로웠고, 내가 잘못 뱉어버린 말 한마디로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슬픔에 죽을 것만큼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나는 그녀를 잊지 못했고, 아직도 내 상처는 아물 새도 없이 계속 덧나고 있는 중이었다.


"... 쉽다고? 내가?"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날들 중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다. 비단 이번 1년뿐 아니라, 처음 우리가 헤어졌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목구멍으로 치미는 뜨거운 것이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슬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너야말로 너무 쉬운 거 아니고?"


"... 뭐?"


그녀는 수없이 찍혀 있던 나의 부재중 전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전화를 거절한 것도, 나를 계속 밀어낸 것도 너잖아."


"그건...!"


"... 내가 너를 쉽게 잊었다고?"


나는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 여러 번에 나누어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마침내 크게 숨을 들이쉬고 소리쳤다.


"나를 너무 쉽게 버린 건 너 아니야??!"


나는 결국 예쁘지 못한 말로 그녀에게 내 상처를 되돌려주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토해냈다.


"...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건 너였잖아...!"


그녀는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고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며 울고 있었다. 나는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 사이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 자존심이고 뭐고, 그냥 매달려보려고 전화도 걸었어. 그런데 넌 그때 민유정이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민유정 싫다고 그랬잖아!! 넌 왜 매번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어?"


"넌 내 말 제대로 듣고? 너도 하나도 들으려 하지 않았잖아. 나는 뭐 상처 안 받는 줄 알아?! 그날도 그냥 그렇게 전화 끊어버리고, 다시 해도 받지도 않고. 계속 거부하고 밀어내고...!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는데!! "


나도 결국 참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가 쏟아내는 이 감정들은 그동안 애써 무시하던 것들이었다. 이 감정들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밀어낼까 봐, 그래서 우리가 진짜로 여기서 끝나 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 마음속 아주 깊은 구석에 밀어놨던 것들이었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다 내 탓으로 돌리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아니 그게 더 쉬웠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나를 계속 옭아매며 자신을 괴롭혀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결국 끝끝내 참지 못하고 속에 감추었던 그것까지 토해놓고 말았다.


그 감정의 이름은 '원망'이었다.


나는 그녀가 미웠다. 오수빈을 통해 우리의 관계를 끝냈던 그녀가, 수많은 부재중 목록을 보고도 다시 걸어주지 않던 그녀가, 내가 없는 곳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던 그녀가, 내가 미치도록 힘들 때 나를 전혀 찾지 않던 그녀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본인을 쉽게 잊었다 확신하는 그녀가 미웠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런 감정보다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그녀의 손목에 남은 빨간 자국이 더 신경 쓰였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의 상처를 들춰내며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기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진영이를 노릴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새끼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틀려 숨을 쉬기도 어려웠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하기 힘든 말을 앞두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 일단, 사건 접수는 내가 할 거야. 그러고 나서 담당 형사는 바꿔줄 테니까, 그때부턴 그분하고 이야기하면 돼... 네가 연예인이니까 너무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게 할게."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내 쪽으로 쿠션을 집어던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이 하고 싶어!?"


나는 쿠션을 집어 다시 소파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손목 사진 한 번만 찍을게."


그녀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일단 나는 증거부터 남겨야 했으므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벌겋게 남은 자국 사이로 벌써 보랏빛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가녀린 팔을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속에서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손목 사진을 찍은 나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목을 보았다. 입고 있는 상의의 넥 라인 위로 아까 보았던 붉은 자국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목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거부하면 나도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원래도 단순 폭행 사건이 아닐 때는 더 조심스러운 법인데, 지금은 상대가 그녀였다.


그녀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체념한 듯 말없이 자신의 옷깃을 살짝 내려주었다. 나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빠르게 사진을 찍었다. 그 자국들을 보고 있으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이 떨리지 않게 하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찍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걸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와 내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옷깃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진영이는 아까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침착해 보였더랬다.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는 둥, 방어 자세를 취했다는 둥 하는 그런 담백한 진술들도 그랬다. 내가 왜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까.


나는 그간 사건 현장에서 만나 온 수많은 피해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이런 종류의 침착함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을 그저 본인이 처리 가능한 크기로 줄여 삼키는 사람들... 진영이는 지금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저 애쓰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지금 내 앞의 그녀는 이별한 전 연인이기도 했지만, 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내 감정만 앞서서 그녀의 두려움은 빨리 알아주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하나도 괜찮지 않다.


나는 당장이라도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 오늘은 혼자 있지 마."


당장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녀가 겁내지 않도록 함께 있어줄 수도 없다.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김기태를 잡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죽든지 말든지 신경 꺼! 너 짜증 나니까 이제 가!!!"


나는 짜증을 내며 소파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분명 우리는 아직 서로를 원하고 있다. 어느 한쪽도 마음을 완벽히 닫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알겠다. 지금 이 순간 누구라도 한 명이 숙이고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다시 붙을 것 같은 거리였지만, 우리는 둘 중 그 누구도 그 작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다시 붙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그녀 나름의 이유로, 나는 내 나름의 이유로... 우리의 이별을 되돌리기엔 우린 아직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는 대문을 나와 그녀의 집 앞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오수빈의 이름을 검색했다.


"어... 오수빈, 난데... 너 혹시 지금 어디야?"


나는 그렇게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택시를 타고 날아올 때까지 내 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수빈이 그녀의 집으로 급히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정식 사건 접수를 위해 조영우의 목격자 진술부터 확보했다. 전날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설쳤지만, 내 기분이나 컨디션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진영이와의 아픈 재회를 곱씹을 여유 따위는 없었으므로 나는 원래 잘하던 대로 마음 한쪽 구석으로 내 감정들을 처박아두었다.


그가 김기태로부터 진영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았던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집 근처를 배회하는 김기태를 발견하기까지의 모든 일은 조영우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그리고 이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럼 예전에 진영이를 스토킹했다던 스토커가 너였다는 거네?"


나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알고 보니 조영우는 2022년에 이미 진영이를 스토킹해 경고를 받은 전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생활을 쫓아다니는 극성팬. 이른바 '사생팬'이라는 것이었다.


"... 내가 트렉스 팬이라서..."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도 안 되는 말에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황당해서 화도 안 났다. 김기태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었다.


"팬이면 그냥 앨범이나 사서 들어."


내 말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 앨범은 이미 50장도 넘게 샀어. 팬싸 응모하려고. 결국 못 뽑았지만."


"... 미친놈이냐?"


어쨌거나 지나가버린 그의 과오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단순한 동창이 아닌 '트렉스 진영'의 팬이라는 건 맞는 듯했다. 그는 그날 타이밍 좋게 진영이 집 앞을 배회한 것이 아니었다. 김기태에게 전화를 받았던 그날부터 그는 계속 그 근처를 맴돌았던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경단쯤으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내가 CCTV에서 조영우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경력직'이라서였다. 녀석은 기가 막히게 사각지대를 알고 있었다. 분하지만, 이건 나름의 도움이 되었다. 그가 진영을 빨리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왜 갑자기 그녀의 팀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 않았다.


진술을 확보한 뒤로는 현장 주변 CCTV를 확보해서 한 남성이 진영이를 따라가는 장면과 그의 도주 동선을 찾아냈다. 나도 조영우도 그게 김기태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CCTV만으로는 김기태라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조영우가 그녀를 발견한 골목은 CCTV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진술에 의존해야 했다. 나는 내가 미리 찍어둔 사진을 포함해 찾은 자료들을 모두 실력 좋은 친한 선배에게 넘겼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그녀의 신분이 연예인인 만큼, 언론에 노출되거나 이슈가 되지 않게 해 달라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계속 강 경위님이 담당하시지, 왜 넘기셨습니까? 계속 사건을 담당하셔야 뭐 접점이라도 생기고, 그래야 뭐 오해도 풀고, 서로 속도 좀 털고, 그러다 뭐 다시 잘될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흡연장에서 커피를 마시던 효범이는 자기가 아쉽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녀석의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듣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사건 처리는 나보다 임 선배가 더 잘해줄 거야."


나는 말을 아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효범이는 내가 더 말을 하기를 기다리며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전 남친이 사심 가지고 미련 떨어봐야 사건에 도움 안 돼. 방해만 되지."


내 말에 효범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모두 다 끝났다. 이제부터 사건은 담당 형사가 맡을 테고, 그녀의 곁은 소속사를 포함한 그녀의 사람들이 지켜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강 형사님! 혹시 지금 좀 와주실 수 없을까요? 진영이네 집에 누가 들어왔던 것 같아요!"


며칠 뒤 걸려온 갑작스러운 공현의 전화에 나는 또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일단 오긴 했는데... 문 앞에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사건 담당 형사가 와 있는데 굳이 나까지 가는 게 맞나 싶어서였다.


심지어 이 집에 마지막으로 왔던 날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까지 했고, 그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나는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뜸을 들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때까지 서성대던 나는 결국 마지못해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을 열어준 건 그녀의 팀 메인 보컬 테오였다. 당연히 공현이 문을 열 거라 생각했던 나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요즘 한참 바쁜 스케줄로 정신없다고 들었는데, 진영이가 걱정이 되어 온 것일까? 그는 나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까닥하며 인사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가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건 깨져 있는 거실 창이었다. 누군가 고의로 깨놓은 듯 보이는 창 근처에는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단순히 누군가의 침입 시도 흔적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생각보다 처참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마당에는 내가 사건을 넘겼던 선배와 신고받고 출동한 인근 지구대 순경들이 있었고 깨져버린 창문 안쪽에는 멤버들이 전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진영이가 보였다.


"어, 우진아."


나를 부른 건 내가 사건을 넘겼던 선배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새벽에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나와보니 저 상태더래."


선배는 턱짓으로 깨진 창문을 가리켰다. 가까이 가보니 큰 거실 창의 바깥 유리 아래쪽이 깨져 있고 충격 지점을 중심으로는 금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저만한 돌을 던지려면 힘 꽤나 들었을 거야. 그래서 위로는 못 맞추고 아래로 깨 놓은 거 같아. 위치 보면 알겠지만, 침입하려거나 그런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고. 뭔가, 겁을 주려고 했다... 쪽이 더 가깝겠지?"


"저 돌을 들고 담을 넘었다는 겁니까?"


"그거야 뭐, 모르지. 담을 넘은 건지, 뭐 다른 구멍이 있는 건지. 더 확인해 봐야지. 지금 확실한 건 '누군가 여기를 들어와서 저걸 깨 놓고 도망갔다.' 정도지 뭐."


선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염려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뭐 안티팬 같은 걸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사람 소행일 수도 있고, 잘 모르겠는데... 타이밍이 참 공교롭지? 일단 족적 찍힌 거랑 CCTV랑 땄으니까, 지난번 영상 속 실루엣이랑 비교부터 해봐야지."


"뭐가 좀 나왔습니까?"


"봤는데, 쯧. 별건 없어. 들어가는 거나 담을 넘는 것 같은 것도 하나도 없어. 그냥 담장 밑에 사람이 하나 찍혔는데 잘 보이진 않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대화하는 걸 보고 있던 멤버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 집 앞에서 공격했던 그 사람인 겁니까?"


공현의 질문에 임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뭐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건을 보면 오히려 놓치는 게 생길 수 있어요. 일단 지문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고 족적도 비교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이거 참, 하필 어제 새벽에 비도 오고 그랬어서 쉽지가 않네요."


선배의 말대로였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담장 안쪽과 화단에 있는 낯선 신발 자국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빗물에 쓸려 흐릿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당분간만이라도 거처는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청하신 대로 신변보호 조치도 하고, 순찰도 강화하긴 할 거지만, 가급적이면 다른 가족한테 가 계시거나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대문이 잠겨 있는데도 침입을 한 거라... 이게 아무래도 이 집이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보안에는 좀 취약합니다. 신식으로 보안 잘 되는 곳으로 이사하시는 것도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의 말에 멤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일단 저희는 서로 돌아가서 수집된 증거들 좀 살펴보고 뭔가 찾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임 선배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고, 나 역시 그와 함께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공현이 급히 내 팔을 잡았다.


"강 형사님, 잠시만요."


나는 그의 부름에 잠시 멈추었고 그런 나를 본 선배는 먼저 가겠다며 대문을 나섰다. 나는 결국 어색한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우리는 거실 안쪽으로 이동해 소파에 모여 앉았다.


"그래서, 너 어디서 지낼래?"


테오가 먼저 말을 꺼내자 모두가 진영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가긴 어딜 가. 내가 갈 데가 어딨어. 그냥 여기서 지낼 건데?"


"뭐?"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갔다. 나 외에도 모두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친 거 아이가? 가시나 진짜 또 이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쫌 하지 마라, 쫌."


그녀의 멤버들 중 그녀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지난번에 바에서 만났던 빨간 머리, 미르였다.


"창문은 고치면 되잖아. 보안은 경비 업체 알아보면 되고. 내가 왜 이사를 가야 해."


그녀의 말에 그가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당장은 우짤낀데? 여서 우예 잔다 하노!"


"그래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일단 누가 집에 들어왔었다잖아."


"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한 거지. 멍청해서."


그녀의 동료들이 모두 한마디씩 보태자 그녀는 새침하게 입을 쌜쭉였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 알았어. 그럼 뭐 당분간은 호텔이라도 가든가. 아무튼 이사는 안 가."


"왜. 그러지 말고 이참에 이사하자. 경비도 상주하고 보안 잘 되는 곳 많잖아."


"싫다고 했지."


그녀는 공현을 째려보았다. 나는 그녀가 왜 이 집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여긴 그냥 단순히 집이 아니라, 그녀의 할머니와 그녀가 마지막 추억을 나눈 장소였다. 아무래도 그런 곳을 이런 일로 떠나야 한다는 건 그녀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여자 연예인이 호텔을 들락거리는 것도 좀 그렇지. 기자라도 붙으면 이상한 가십 돌 텐데?"


나 역시도 호텔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테오의 말에 덩달아 주춤했다. 여자 연예인이 혼자 호텔을 가면 기사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드라마 같은 거 보면 혼자 호텔 가서 잘만 자는 것 같던데... 역시 현실은 좀 다른 건가 싶었다.


"그럼 뭐 어쩌라고. 지금 고모도 한국에 없고, 내가 가족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말에 멤버들이 왜인지 나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의견을 묻는 건가?' 싶어 나는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오수빈네 가 있는 건 어때?"


그런데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의 표정이 영 탐탁지가 않았다. 뭔가 내 대답이 썩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혹시 미리 생각해 둔 장소가 따로 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건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수빈 씨, 이번 주에 김예지 선배님 로케 따라서 일본 드간다 캤지?"


내 질문에 급히 대답한 건 그녀가 아닌 미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수빈이네는 안 돼. 이번에 가면 적어도 2주는 걸릴걸."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회사에서 제공되는 숙소는 없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매니저분이 안 보이시네요."


이번엔 내 질문에 테오가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진영이가 이사를 안 가겠다고 우겨서요. 예전에 한 번 스토커 때문에 일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 집은 절대 못 떠난다고 버텼거든요."


테오의 말에 이어 공현이 덧붙였다.


"사실 이번 일 회사가 알게 되면 얄짤없이 바로 이사부터 시킬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알리기 싫다고 진영이가 저희를 불렀어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그 스토커가 조영우라는 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그냥 두는 건 너무 위험한데."


그때 곰곰이 생각을 한 듯한 테오가 갑자기 엉뚱한 제안을 하나 했다.


"그럼, 당분간 강우진 형사님 집에 가 있으면 어떨까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도 나 못지않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나와 그녀가 거의 동시에 그의 말에 반응했지만, 그는 왜 안 되냐는 표정이었다.


"진영이는 지금 당장 갈 곳이 없고, 이 집은 너무 위험하고. 그러니까 강우진 형사님이 집에서 좀 데리고 있어 주면 되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 이 중에 이런 상황에서 진영이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형사님 말고 또 있어요? 막말로 남도 아니고..."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무슨 개... 소리를 하는 거야... 남보다 못한 사이잖아."


하지만 테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둘 다 서로한테 지금 미련 없다는 거 아냐? 그럼 뭐가 문제야?"


테오는 그렇게 덧붙이며 슬쩍 웃었다. 방금 전 진지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결론 하나를 위해 다른 선택지들을 하나씩 지워온 거였다. 어쩐지... 나를 왜 여기 남겨두나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테오가 나를 싫어해서 내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는 안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였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지. 아마 그도 나처럼 남을 속이는 걸 잘못하는 부류인 거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호텔은 안 되고, 외간 남자 집은 된다는 겁니까?"


그러자 가만히 있던 미르도 거들었다.


"그냥 외간 남자 아이고 경찰 아저씨 집이잖아요. 그리고 호텔이랑은 다르죠. 경찰 아저씨 집이 기자들한테 노출될 일이 뭐가 있는데요."


나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던 공현이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아니면 그냥 우리 집으로 와도 돼. 근데 남는 방은 없어. 나랑 같이 써야 돼."


"..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공현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는 능글맞게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내가 정색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옅게 웃었다. 이 사람도 한통속인 게 분명했다. 그래 애초에 나한테 전화를 걸었던 게 공현이었지.


"자, 미르는 여자친구랑 같이 살고 있어서 안 되고. 테오는 팬들이 집 앞을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안 되고. 그럼 남는 건 저랑 형사님뿐인데요?"


"아 그냥 여기서 지내면 된다니까!! 쟤네 집에서 살 바엔 그냥 창문 없이 여기서 살 거야!"


그녀가 공현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말에 괜히 긁혀서 유치하게 받아쳤다.


"... 누가 오래?"


"뭐!! 누가 간대!?"


"그래 오지 마."


"안 간다니까?!"


우리는 어느새 또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르가 그런 우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 둘이 진짜 피곤하다."


"그러게."


미르의 말에 테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우리 집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뒤에는 뻘쭘하게 서 있는 그녀가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


당분간 어디서 지낼지를 두고 한참 실랑이했지만, 혹시 아직 감정이 남은 게 아니냐는 말에 진영이가 발끈했고, 나 역시 괜히 지기 싫어 입을 다물어버린 결과였다.


"네가 침대 있는 방 써. 내가 저쪽 방 쓸게."


나는 내 방에 그녀의 캐리어를 놓았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현관 앞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말했다.


"... 진짜 며칠만 있을 거야. 창문 고치고 보안업체 알아볼 때까지만..."


"알아. 들어와."


그녀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그렇게 그녀는 사귈 때도 온 적이 없는 우리 집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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