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image.png서비스 스틸컷 _ XXX_SOUND 공현 (본명 공현우)



40. 아는 사람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진영이의 매니저와 통화하며 답답한 마음에 방 안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는 그냥 나를 아직 미련이 남은 전 남자 친구 정도로 취급하며 내가 하는 모든 말을 흘려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김기태가 진영이의 집 앞 CCTV에서 발견되었다'라는 내용을 빼고 사건의 심각성을 전달하는 것은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말을 잘못했다간 민간인 사찰이네 뭐네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할 수 없었다.


사실 사설 CCTV를 확인한 것이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닌가. 연예인 집 그것도 '전 여자 친구'의 집 근처 CCTV를 '전 남자 친구'가 영장도 없이 내 맘대로 막 찾아봤다?... 이건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괜히 공권력 남용이네 뭐네 말도 많아지고 오해를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 네. 알겠습니다. 네... 네.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예... 네. 알겠습니다."


차라리 공현에게 전화를 할 걸 그랬다. 나는 알량하게 남은 아주 작은 질투 한 조각 때문에 공현에게 먼저 알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미 진영이 일에 관심을 끄라는 말을 들은 마당에 이제 와 공현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괜히 들고 있던 전화기를 침대 위로 집어던져 버렸다. 아니 그냥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지만 않게 좀 잘 봐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답답했지만, 우리 오피스텔은 방음이 취약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목구멍 안으로 눌러 삼키며 양손을 꽉 쥐고 소리 지르는 시늉만 했다.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소리를 지른 건 아니었지만, 나름 진정은 좀 되었다. 이내 나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래, 진영이 일에 관심을 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공현한테 전화를 못 걸 건 또 뭐냐. 지금 잠깐 민망한 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나를 미련 넘치는 사이코 전 남친이라고 욕해도 별수 없다. 그런 것보다 당장 진영이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나는 핸드폰 저장 목록에서 공현의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으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지만, 두세 차례의 신호음 끝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간단히 '진영이의 안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매니저와는 달리 내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는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것에 대해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형사님이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겠죠.'라며 넘어갈 뿐이었다.


나는 센스 있는 그의 태도가 조금은 분했다. 이런 괜찮은 녀석이 진영이 옆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 그녀의 곁에 있어 정말 다행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그날 알량한 질투 따위 접어둔 채 공현한테 연락을 한 건 정말 정말 잘한 일이었다.



.

.

.



"강 형사님! 혹시 지금 진영이네 집 쪽으로 좀 가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다급하게 걸려온 공현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집으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며칠 전부터 진영이네 집 앞에 낯선 사람이 기웃대는 것 같았고, 오늘은 통화 중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버렸다는 그의 말에 나는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착한 그녀의 집 앞 어두운 골목길에서, 웬 남자가 모자를 눌러쓴 채 진영이 집 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를 던지다시피 대놓고 튀어나가 그 남자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당신 뭐야!"


하지만 김기태일 수 있다는 각오로 마주한 그 사람은 놀랍게도 조영우였다. 조영우 역시 나를 보고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윤재?"


"조영우?!"


나는 조영우를 보며 인상을 썼다. 며칠 동안 기웃댔다던 게 조영우였단 말인가? 얘는 또 여길 어떻게 알고 와 있는 거지? 설마 김기태랑 또 한패로 움직이는 건가?!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말에 조영우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나는 결국 이성을 잃고 조영우의 멱살을 잡았다.


"...너 진영이 스토킹해!?"


조영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이라니?"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진짜로 아니야."


나는 어이가 없어 잠시 말을 잃었다.


"아무튼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이것 좀 놔 봐."


조영우는 내 손에 잡힌 제 멱살을 가리켰다. 나는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거칠게 손을 놓았다.


"니가 여기 왜 있는지 설명 잘해야 할 거야."


내 으름장에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털어놓았다.


"... 김기태 때문에..."


"뭐?"


"아니, 김기태가 아무래도 정진영을 노리는 것 같아서... 그냥 걱정이 돼서..."


나는 그가 늘어놓는 말들을 믿을 수 없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하, 너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는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나 방금 김기태를 본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뭐?! 어디서?"


"저기 사거리 앞에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진영이네 집을 보았다. 집 안에 불이 꺼져 있고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공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집 앞인데, 집에 없어요. 아까 어떻게 끊어졌다고요?"


"잠깐 산바카라하는 중이라고 전화가 왔었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외마디 비명 같은 게 들렸고, 전화가 끊어졌어요. 다시 걸어도 꺼져 있고요. 제가 지금 나와 있어서 형사님께 연락드린 거예요. 저도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나는 공현과 통화를 종료하고 진영이의 번호를 눌렀다.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안 받아?"


조영우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나 이쪽으로 돌아볼 테니까. 너 저쪽으로 좀 뒤져봐. 찾으면 전화해."


나는 조영우에게 명령하듯 말을 전하고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뛰기 시작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 골목은 가로등이 있어도 곳곳에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언덕이 있는 동네였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골목 사이사이를 계속 뛰어다녔다. 워낙 조용한 동네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기에 물어볼 곳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영이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혹시나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조영우가 본 게 진짜 김기태일 수도 있다. 아니, 이미 나는 CCTV로 김기태가 이 근처를 배회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김기태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김기태가 망원동 모녀 살인사건의 진범일 것이라고 믿고 있고 그 사실은 지금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상상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애써 계속해서 눌러오던 불안이 망령처럼 내 온 마음을 잠식했다. 지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를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순식간에 가장 끔찍한 상황까지 상상해버렸다.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과 미쳐버릴 거 같은 공포가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때, 근처에서 조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진영!!!!"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내가 뛰어가던 방향의 골목에서 낯익은 누군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김기태였다.


나는 순식간에 골목 안쪽을 먼저 살폈다. 진영이가 벽에 등을 붙인 채 주저앉아 있었고 조영우가 그런 그녀를 붙잡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진영이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김기태를 쫓았다. 지금은 조영우가 진영이와 있으니, 일단 김기태를 잡는 게 먼저였다.


그를 뒤쫓아 한참 동안 골목을 달리다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김기태!!"


그는 내 목소리에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더욱 속력을 냈다. 이름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역시 내 감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큰길이 나오고, 사람이 많아졌다. 두리번거려도 이미 김기태는 사람들 사이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무릎에 손을 대고 엎드려 헉헉 숨을 뱉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깊게 한 번 내쉬었다. 지금 당장 김기태는 놓쳤지만,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덕에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나는 잠시 동안 서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은 진영이 상태를 먼저 체크해야 한다.


나는 몸을 돌려 진영이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아까 잠깐 스쳐 지나가며 봤지만 크게 다치거나 하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모른다.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멀리서 그녀와 조영우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서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조영우가 서 있었다. 나는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목부터 살폈다.


"다쳤어?!"


그녀의 손목은 세게 잡힌 듯 빨갛게 부어 있었다. 자칫 손가락 자국을 따라 멍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이를 갈았다. 그 새끼가 진영이 손목을 세게 잡았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내가 잡고 있던 팔을 슬며시 빼내었다. 그제서야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나도 얼른 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다시 보니 그녀의 셔츠 위쪽 단추가 뜯겨 나가 있었고, 어두워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목 옆선에도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내 시선이 향하는 걸 느낀 그녀가 서둘러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리듯 만졌다. 나는 손끝이 저릴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 목구멍 아래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며 공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현우 씨. 정진영 씨 찾았습니다. 지금 어디쯤이시죠?"


내가 자신을 사무적으로 칭하는 것을 들은 그녀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그럼 진영 씨 집 앞으로 가겠습니다. 예."


나는 통화를 끊고 짧게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이 진영이를 봐야만 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진영이 쪽으로 향했다.


"... 동료분이 자택 앞에 도착했다고 하니 일단 집으로 가시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옆의 조영우도 덩달아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도 일단 따라와."


나는 조영우를 턱짓으로 부르며 앞장서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집 앞에 다다르자 차를 대고 서 있는 공현이 보였다.


"진영아!!"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몸을 살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전화기는 왜 꺼져 있는 거야!?"


"...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그녀는 말을 아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공현이 나를 불렀다.


"형사님들도 들어오세요."


그는 조영우를 내 동료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공현을 먼저 집으로 들여보냈다.


"먼저 들어가 계시면, 곧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공현이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조영우를 보았다. 조영우는 어쩔 줄을 몰라 우물쭈물하고 서 있었다. 그에게도 들어야 할 말들이 많았지만, 그녀의 집 안으로 이 녀석을 데리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니가 간 반대쪽 골목을 뒤지다가 찾았어... 얼른 내가 이름을 크게 불렀더니 그 자식이 당황해서 도망가더라고."


"얼굴 봤어? 김기태야?"


"아니 못 봤어. 너무 어둡기도 했고, 다 가리기도 했고. 순식간에 도망가서..."


"일단, 내가 내일 전화할 테니까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해. 오늘은 집으로 가 있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내키지 않는 말을 뱉었다.


"... 고맙다."


나는 그를 뒤에 둔 채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영우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하기 싫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명색이 형사라는 놈이 범인도 제대로 못 쫓고 뭐 하는 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빨리 김기태를 잡아야 한다. 나는 마당을 지나 익숙한 그녀의 현관문 앞에 섰다.


도어락이 눈에 들어오자 잠시 멈칫했다. 이제는 그냥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수 없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준 건 그녀가 아닌 공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헤어진 지... 거의 1년 만이었다.


"앉으세요."


그는 마치 집주인인 것처럼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냉장고에서 음료를 몇 개 꺼내며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제 집처럼 구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나를 째려보고 있는 그녀가 더 신경 쓰였다.


그녀는 방금 큰일이 날 뻔한 사람치고 겉으로는 겁먹은 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조영우랑 대화하는 그 사이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정돈한 상태였다.


그녀는 나와 조금 떨어져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게 화가 나 보였다. 나는 최대한 그녀 쪽은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사건을 정리했다.


"일단 많이 놀라셨을 테니, 오늘은 짧게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김기태를 어떻게 마주친 건지, 어쩌다 그 골목에서 그러고 있었는지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그녀는 요 근래 오랜만에 갖는 휴식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다리던 것이 저녁 시간에 하는 산바카라이었다고 했다. 연희동은 낮에는 인파가 몰려 돌아다니기 쉽지 않은 반면, 저녁이 되면 주택가는 한산해져 사람이 잘 없어 걷기 좋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까 그녀를 찾아 헤맬 때 보니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긴 했더랬다.


그녀는 오늘도 가볍게 산바카라을 하기 위해 나왔고,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누군가 집 근처를 염탐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터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놈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검은 옷,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그 사람은 누가 봐도 행색이 수상했어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제 손목을 낚아챘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발갛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손목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공현이랑 통화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팔을 잡아채는 바람에 핸드폰을 떨어뜨렸어요. 공현이 저를 계속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사람이 그 핸드폰을 발로 밟아 깨뜨려서 통화가 끊어졌어요.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핸드폰인데..."


그녀는 그 상황을 떠올리며 분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리고 저를 한참이나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그 사이에 빠져나가 보려고 안간힘도 쓰고 소리도 지르고 했는데, 생각보다 힘이 너무 세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그러다 막다른 골목에서 벽 쪽으로 밀었어요. 그 바람에 등을 벽에 부딪혔고 양쪽 팔을 붙잡히는 바람에 한동안 움직이기 어려웠어요..."


내 머릿속에서 김기태가 그녀를 추행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을 붙잡고, 벽으로 밀치고, 강압적으로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고... 몸에 소름이 돋고 속이 뒤틀렸다.


"그 새끼가 몸을 막 더듬고 입을 맞추려고 하길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이를 하도 꽉 깨물어서 어금니가 다 으스러질 지경이었다.


"기회를 보다가 제가 발로 복부를 걷어찼어요."


나는 예상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그래 맞아. 얘는 이런 애였지... 이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기세가 나오는 건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쪼그라드는 법이 없는 애였다.


"그랬더니 열받았는지 때리려고 하더라구요. 일단 방어 자세를 취했는데, 그때 다행히도 누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가 나니까 그 사람은 바로 도망갔구요."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조영우가 제때 그녀를 찾은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 아는 사람 같았습니까?"


"네."


그녀의 짧은 대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그녀가 김기태인 걸 알아차렸구나 했다.


"... 제가 잡아넣었던 그 범인인 것 같던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계속 '너 때문이야, 니 잘못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출소한 거죠? 그렇죠?"


그녀는 김기태를 알아보지는 못한 듯 보였다. 순간 나는 그녀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공현 역시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눈썹을 한 번 까딱 움직였다. 이제는 말을 해줘야 할 때가 아니냐는 신호였다. 내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자 공현이 진영이를 불렀다.


"진영아, 너 혹시 김기태라고 알아?"


"김기태?"


그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름에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다.


"김기태... 알아.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그러다 잠시 멈칫하더니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설마... 아까 그게 김기태라는 거야?"


그러고는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맞아!?"


그녀는 순간적으로 내게 반말을 했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2년 전에 잡아넣은 사람이 김기태였다는 거야?"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한참을 눈만 굴리던 그녀가 다시 나를 쏘아보았다.


"너는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한 번도 말을 안 했다는 거네?"


그리고 그녀는 곧장 공현을 노려보았다.


"너도 다 알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요. 공현우 씨는 최근에 아셨습니다."


나의 말에 그녀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나는 노려보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기 무서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쨌든! 지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둘 다 미리 알았다는 거잖아?! 근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고! 내 일인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선생님한테 혼나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현이 그런 나를 대신해 핑계를 늘어놓았다.


"아니, 강 형사님은... 괜히 알려서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처음부터 네가 안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리고 김기태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최근에 출소한 거 알고 나서부터는 계속 상황을 주시하다가 나한테 연락을 주신 건데..."


진영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고, 그는 결국 하던 말을 멈추고 말을 삼켜야 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둘이 쬐끄만한 여자애한테 혼이 나고 있는 이 꼴이 남들 보기엔 우스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둘 다 진영이의 기에 눌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야. 일단, 너 가."


그녀는 공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그녀에게 못 이긴 척 끌려 일어나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제발 먼저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눈으로 그에게 신호도 보내 봤지만, 그는 그런 내 간절한 바람을 사뿐히 무시했다.


그녀는 공현이 현관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 거실 앞 창에 서서 그가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대문까지 빠져나가는 걸 보고는 커튼을 확 닫아버렸다.


나는 슬금슬금 집에 가기 위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녀는 그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 너 대체 뭐야?"


나는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열받는 건 당연하다. 사실 스토커냐고 몰아붙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내 행동이 소름 끼칠 만도 하다.


"... 내가 그냥 정진영 씨야?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이제 남이다 이거야? "


나는 생각하지 못한 그녀의 발언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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