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그렇게 그와 그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마무리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꼭 그렇지만은 못했다. '겨우 하루 얻은 휴일이었다'라는 말이 절실히 와닿을 정도로 그녀가 무척이나 바빴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우리 집에서 맛있는 걸 해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기회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늘 엇갈리고는 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둘이 시간이 맞았던 날도 그랬다. 그녀가 촬영이 일찍 끝날 것 같다며 저녁을 같이 먹자길래 나는 퇴근하자마자 장부터 봤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고르고,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검색했다. 장을 보면서도 요리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집안이야 늘 깔끔하게 유지하는 편이었지만, 부지런을 떨며 괜히 한 번 더 치우고 손을 댔다. 그리고 마치 '어린 왕자' 속 여우가 된 것처럼,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기대되는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어디쯤이야?]
그녀가 오기로 한 시간이 조금 지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동안 답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오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식탁 위에 그릇까지 모두 꺼내놓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미안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어] [어떻게 하지?] [조명 때문에 촬영이 밀렸어ㅠㅠ] [오늘 못 갈 것 같아 ㅠㅠ] [미안해ㅠㅠㅠㅠ]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을 울려댔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눈은 식탁 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음식들로 향했다. 머릿속에 아주 잠시 '또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인데.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촬영 잘하고, 밥 꼭 챙겨 먹어.]
이번에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곧장 답이 왔다.
[진짜 진짜 진짜 미안해] [다음에 꼭 갈게] [오늘은 정말 너희 집 가보고 싶었는데 ㅠㅠ]
[응 다음에 오면 되지.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촬영 잘해. 파이팅!]
나는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몇 번 더 웅웅 진동이 울렸지만, 바로 확인은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혼자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부산을 떨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그녀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남은 음식은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으면 되는 거고 오늘은 그녀에게 만들어 줄 요리를 미리 연습했다 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차린 음식들을 혼자서 먹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두 사람 몫으로 꺼내두었던 접시를 모두 정리해 싱크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원래도 바빴지만,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후로는 잠을 잘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단순히 촬영만도 바쁠 텐데 그 외에도 연기 레슨이니, 광고 촬영이니 쉴 틈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드라마는 연일 시청률을 경신했고, 그건 그녀와 그녀의 팀에게는 참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따랐다. 낮 데이트는 꿈도 못 꿨고 어쩌다 한 번씩 밤에 잠깐 볼 수 있는 것도 썩 여의치가 않았다. 나 역시 교대 근무인 데다 갑작스러운 출동에 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일정한 스케줄이었더라면, 그리고 그게 나였더라면, 내가 최대한 그녀에게 맞추어주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우린 둘 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녀를 볼 때 그녀의 상대 배우에게 질투를 느끼고는 했다. 단순히 드라마가 러브 스토리라서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게 부러워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틈틈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영상 통화를 하고, 짧게라도 만났다. 그녀는 갑자기 시간이 될 때면 새벽이라도 나를 찾았고 그럴 때면 나는 자다가도 뛰쳐나갔다. 단 5분을 볼 수 있더라도 말이다. 우린 그렇게 반년째, 자칫 남들이 보기에는 힘겨워 보일지 모를 연인 사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너 그거 사랑 아니야."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맞은편에 얄미운 표정을 하고 얄미운 말을 내뱉는 민유정을 노려보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런 노래 가사도 몰라?"
"꺼져."
나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아 왜! 마저 다 먹어!"
"다 먹었어."
내가 일어나 옷을 챙겨 현관 쪽으로 향하자 유정이의 어머니가 쇼핑백을 손에 들고 서둘러 따라오셨다.
"왜, 벌써 가게? 좀 더 있다가 아부지 오시면 보고 가지. 오랜만에 들렀는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내일 비번이라 오늘은 야간 당직 서야 해서 들어가 봐야 돼요. 그리고 엄마, 유정이가 자꾸 못살게 굴어요."
"내가 뭘 못살게 굴어? 엄마! 요즘 쟤 진짜 이상해! 만나는 여자가 누군진 몰라도 완전 지 멋대로야! 쟤 얼굴 좀 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 퀭한 거 보여??"
그녀의 행동에 나는 아줌마에게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죽을래'라고 말했고, 그녀는 내 쪽으로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러게, 우진아. 너 좀 피곤해 보이긴 하다. 이거 안 그래도 엄마가 너 주려고 한약 맞춰둔 거거든? 아침저녁으로 전자레인지에 30초만 데워서 마셔. 알았지? 귀찮다고 또 다 처박아두지 말고."
"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나는 유정이의 어머니가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이번 주에 동창회 하는 거 알지? 올해는 갈 거지?"
그녀는 내가 신발을 신는 동안 내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봐서."
"너 작년에도 봐서~ 해놓고 안 왔잖아. 애들이 너 보고 싶어 해."
"봐서. 엄마. 저 가요."
나는 민유정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구시렁거리는 그녀를 뒤로한 채 현관문을 닫았다.
동창회라... 그러고 보니 진영이를 찾겠다고 한 번 갔던 것이 다였다. 나는 진영이와 함께 동창회에 가는 상상을 하며 혼자 히죽거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이번 주에 해외 로케가 있어 출국 예정인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그녀와 그런 곳에 함께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어디 배부르게 외롭단 생각을 한단 말인가. 나는 계속 그렇게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불안을 마음속 깊이 단단히 잠가놓았다.
.
.
.
"강윤재!! 여기야!"
"우진이."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건 박윤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엔 내 이름을 정정해주고 있는 홍정의가 보였다.
"맞다, 맞다! 너 개명했다고 했지? 아~ 나는 아직 입에 잘 안 붙어. 암튼, 너 진짜 오랜만이다! 너는 어째 얼굴이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 거 같아?"
나는 나를 반기는 바퀴벌레 한 쌍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들은 헤어졌다더니 또 붙은 모양이다.
"니들은 또 다시 만나냐? 안 지겹냐?"
내가 인상을 쓰자 정의가 윤진이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이렇게 예쁘면 하나도 안 지겨워. 너도 예쁜 애랑 만나보면 내 기분 알걸?"
"너 말고, 윤진이. 야, 너 정도면 그냥 다른 사람 만나. 저 새끼 미필이잖아. 전문의 따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는 거 아니야? 주변에 널리고 깔린 게 능력 좋은 사람인데 왜 저런 미필 따위를..."
정의는 내 짓궂은 농담을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넘겼다. 그리고 박윤진은 그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능력남이야 많지. 근데 우리 정의만큼 잘생긴 사람이 없어."
나는 그 둘을 보니 묘하게 짜증이 올라왔다. 물론 아주 약간.
"진짜 지랄들을 하고 있네."
내가 투덜대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박윤진이 내게 물었다.
"너는? 여자친구 없어?"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유정이 내 옆에 앉으며 나 대신 대답했다.
"있어. 완전 지 멋대로인 여자."
그녀의 말에 윤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유정이 왔어!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진영이 험담을 시작하려는 민유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민유정은 내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접시를 가져다 음식들을 덜어 담기 시작했다.
"맨날 자기 멋대로 약속 취소하고, 지 꼴릴 때만 새벽에 자는 애 깨워서 불러내고. 얘 요즘 그런 여자 만나."
"에에? 윤재 너 나쁜 여자가 취향이야?"
윤진이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지금 이 대화의 주제가 불편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넌, 레지 2년 차 주제에 시간은 어디 있어서 이런 데를 오냐?"
내 기분을 눈치챈 정의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 돌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야, 안 그래도 바꾸느라 진짜 애먹었어. 알지, 요즘 상황? 남은 사람이 몇 없어서 당직 미쳤어. 그래도 너도 온다고 하니까 더 힘 좀 써봤지. 오늘 아마 역대급으로 제일 많이 모였을걸?"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들이 제법 보였다. 저 멀리 조영우도 보이고 진영이의 친구 오수빈과 이태균도 보였다. 나중에 단체사진이라도 찍어서 진영이에게 보내주면 좋아하겠지? 나는 혼자 그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야, 안주 먹으면서 마셔. 또 빈속에 술 들이붓지 말고."
민유정은 내 쪽으로 무신경하게 접시를 툭 내려놓았다.
"자 이제 슬슬 다 모인 것 같으니 한잔하자! 다들 잔 채워!"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잔을 채우고 반갑게 잔을 부딪쳤다. 간만의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 나는 잘 섞여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갈까 말까를 열 번도 넘게 번복했지만, 막상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진영이의 부재도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졌다.
윤진이는 다 함께 모여 잔을 맞추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그녀에게서 사진을 한 장 얻었다.
"윤진아, 나 방금 찍은 그거 보내줄래?"
"어 그래. 너 번호 뭐야?"
나는 재빨리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눌렀다. 진영이에게 사진을 보내주고 싶어서였다. 민유정은 뭐가 못마땅한지 그런 나를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여자 친구한테 보고라도 하게? 지는 맨날 멋대로 굴면서 너는 친구들 만나는 것까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해?"
"신경 꺼."
나는 유정이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짠, 우리 다 모였다. 네 친구들도 보이지?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해외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뭐?! 그럼 그게 정진영이었다고?!"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의 이름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렇다니까, 이거 봐! 기사도 있잖아."
오수빈은 신이 난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뭔가를 자랑하고 있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작년의 그 사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본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
"이거 윤재 아냐?!"
나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삼켰다. 피곤해질 것이 예상되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우르르 몰려와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김기태 잡은 게 너였어!? 대박,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냐?"
"그럼 너 정진영 실물 봤겠네? 와, 얘가 이렇게 이뻐질지 누가 알았냐? 학교 다닐 때랑 완전 달라."
"김기태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새끼가 진범 맞아?"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는 녀석들 앞에서 내 표정이 좋지 않자 오수빈이 슬쩍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표정을 보니 쟤는 지금 내가 진영이와 만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일단, 김기태 살인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어. 7년형으로 수감 중이고. 그리고 정진영은 원래 예뻤어."
내 마지막 말에 나머지들도 급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전'남친이란 사실을 상기한 듯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민유정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아마도 지금 자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여자친구의 정체를 알아챈 듯 보였다.
"와, 그러면 너... 전 여자 친구랑 상봉한 거네? 대박... 기분 졸라 이상했겠다."
"야, 그만 말해. 눈치 좀 챙겨라."
나는 나를 주목하는 이 분위기가 어색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가게?"
"아니, 담배나 한 대 피고 들어오게."
나는 호기심에 수군대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따라온 건 다름 아닌 조영우였다.
내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그는 내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워댔다. 친하지도 않은 두 사람이 그러고 있자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 김기태는 그럼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먼저 침묵을 깬 건 조영우였다. 나는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김기태는 지금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그걸 내가 알려줄 순 없었다.
"궁금하면 네가 정식으로 알아봐. 뭐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내가 먼저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조영우가 내 팔을 잡았다.
"저기... 강윤재."
나는 내 팔을 잡은 녀석을 돌아보았다. 조영우는 그런 나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 그땐 미안했다."
나는 그의 사과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
[2011년 10월]
"야, 이 개새끼야!!"
나는 김기태의 멱살을 잡고 밀쳤다. 내가 힘을 주어 밀었기 때문에 김기태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주먹을 날려 김기태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정의가 뒤에서 끌어안고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놔! 씨발! 저 새끼 오늘 내가 죽여버릴 거야!"
김기태는 내게 얻어맞아 터진 입술을 손으로 훔치곤, 침을 바닥에 퉤 뱉어냈다.
"네가 이럴까 봐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거야! 진정 좀 해!"
나는 나를 말리는 정의를 뿌리치고 다시 한 번 발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기태도 그냥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는 다시 뒤엉켜 붙었다.
이 새끼가 대가리 속에서 무슨 더러운 상상을 하며 진영이를 쫓아갔을지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는 김기태 위에 앉은 상태로 연신 주먹질을 해댔다.
한참을 그러다 조영우가 김기태를, 정의가 나를 따로 붙잡아 겨우 둘을 떼어놨다.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조영우 너도 마찬가지야, 이 개새끼야! 너는 진영이 좋아한다며! 넌 좋아하는 여자애를 대할 때 그따위로 행동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조영우가 자존심이 상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김기태는 나를 조롱하듯 비웃었다.
"고깟 같잖은 년 하나 가지고 지랄하고 있네. 봐줄 것도 좆도 없더만."
그리고는 자신의 교복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내게 잡혀 있던 목을 매만졌다.
"야, 씨발... 그리고 막말로 내가 걔를 따먹었냐? 내가 뭘 어쨌다고 지랄이야!"
나는 그 소리에 또 한 번 이성이 끊어져 달려들었고, 그땐, 정의도 잡지 않았다.
***
나는 조영우를 잠시 바라보았다.
"... 사과는 본인한테 해야지."
내 말에 조영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어린 시절 장난 삼아 김기태와 어울리며 했던 짓들을 최근 다시 곱씹어본 듯 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했던 행동들의 결과가 김기태처럼 이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들이 지금의 그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쾌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기분이 별로였지만, 이내 생각을 접기로 했다. 어쨌든 김기태는 지금 교도소에 있고, 조영우도 얼핏 철이 든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나는 나름의 용기를 내었을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먼저 가게로 향했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민유정이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유정이에게 끌려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하, 정말... 피곤하다.
"너 요즘 만난다는 거 정진영이야!?"
민유정은 나를 가게 뒤쪽 구석에 몰아두고 무섭게 쏘아보았다.
"뭐래는 거야."
나는 유정이의 팔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를 20년을 넘게 봐 온 민유정의 눈을 피하긴 어려웠다.
"맞네? 너 제정신이야? 그렇게 겪고도 또 걔를 만나?"
"다시 만나면 안 돼?"
나는 민유정의 간섭에 짜증이 났다. 비단 지금의 일 때문이 아니라, 요즘 계속 내 신경을 긁어대는 탓이었다. 민유정이 굳이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충분히 내가 휘둘리고 있다는 거. 하지만 이건 누가 시킨 적도 없는 내 자의일 뿐이다.
"너 다 까먹은 거야? 너 걔랑 헤어지고 몇 년을 병신 같이 굴었는지는 알아!? 근데 너 지금 하는 짓 좀 봐! 니들이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그 짓을 또 하겠다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짜증이 나서 소리를 높였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가장 힘들 때를 본 그녀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유정이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내가 다시 가게로 들어가기 위해 유정이를 지나치자 그녀는 내 등 뒤에 대고 쏘아붙였다.
"너는 매번 이런 식이야. 너랑 나 사이에 내가 이런 말도 못 해? 내가 너랑 단순히 그냥 친구야? 우린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발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뒤로 민유정은 다시 한 번 억지를 썼다.
"걔가 나보다 더 중요해? 이제 다시 만난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된 여자가? 나는 너랑 28년이야!!"
나는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느껴 대꾸하지 않고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내 뒤로 민유정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걔가 뭐가 그렇게 잘난 거야!? 왜 항상 걔만 그렇게 쉽게 다 가져야 해!?"
나는 뒤돌아 민유정을 쏘아보았다. 지금 그녀가 보이는 분노는 단순히 나에 대한 소유욕만이 아니었다.
"너. 괜히 진영이한테 화풀이하지 마."
유정이는 SNS에서 팔로워가 꽤 되는 인플루언서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허영심 많은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위치가 만족스럽지 못해 늘 불만을 표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TV에서 진영이를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어땠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후 민유정은 진영이가 보일 때마다 '노력도 없이 운 좋게 어쩌다 얻어걸렸다'라고 흉을 보곤 했다.
그녀의 숨은 노력들을 알고 있는 나는 그 소리가 굉장히 듣기 싫었지만, 내가 섣부르게 편을 들면 혹여나 티가 날까 봐 한 번도 속 시원하게 그녀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더랬다.
"맞잖아! 솔직히 걔가 그렇게 잘났어?!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잖아. 그렇게 쉽게 다 가져가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렇게 너까지 또 휘두른다고?! 내가 왜 그 꼴을 참아줘야 하는 건데!!"
최근 그녀가 공들여 접촉했던 브랜드에서 진영이를 모델로 발탁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자리를 진영이가 가져간 것에 더욱 분노한 듯했다.
나는 악다구니를 쓰는 민유정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서, 안에 있는 애들까지 다 들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녀의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민유정.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걸로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 너도 알지? 그리고 진영이, 힘들게 노력해서 거기까지 간 거야. 운이네 뭐네 함부로 떠들지 마."
그녀는 내 말에 분해 죽겠다는 듯,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너. 매번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 나도 잘 알거든? 니 마음대로 돼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여태 몰라서 놔둔 거 아니야. 근데 딱 여기까지만 해. 나는 니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니 소유물 아니야. 이제 더 이상은 나도 안 봐줄 거니까 그거 하지 마."
나는 처음으로 민유정에게 냉정한 말을 쏟아냈다. 여태껏 한 번도 이렇게까지 밀어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도저히 참아지지가 않았다.
내가 돌아서자 그녀는 분을 못 참고 옆에 놓여 있던 종이컵을 집어 내게 던졌다. 그 바람에 내 셔츠 등 뒤는 알 수 없는 액체로 축축하게 젖었다.
하... 이제 진짜 집에 갈 시간인가 보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슬슬 기가 빨리던 차였다. 집에 가서 씻고 잠이나 더 자는 게 낫겠다.
나는 그런 유정이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