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결론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서비스 스틸컷 _ 우진과 진영의 행복한 시간



37. 최악의 결론



[우와~ 정말 다 모였네? 보기 좋아 보여. 부럽다~ 나도 같이 있고 싶다.]


새벽 3시, 진동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원래도 연락에 예민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요즘은 더 심했다.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 몸은 아주 작은 진동 소리 한 번에도 잠에서 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다음에 다 같이 모일 때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애들이 네 얘기하던데] [일정 끝났어?] [밥은 먹었고?]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의 메시지 스타일을 닮아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시간이 짧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짧은 쉬는 시간, 지금을 놓치면 또 한참 답이 없을 걸 알기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냉장고로 향해 물을 꺼내 마셨다.


웅웅, 진동이 울렸다.


[아니 아직~] [그런데 어쩌지?] [원래 내일 돌아가는 날인데 ㅠㅠ 날씨 때문에 다음 주까지로 연기됐어.]


나는 마시던 물컵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캘린더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일주일 정도야 뭐, 또 금방 지나가겠지. 나는 새어 나오려는 서운함을 서둘러 단속했고, 그 사이 그녀는 자기가 찍어둔 파리의 풍경과 거리, 음식 등의 사진을 내게 보내주었다.


[피곤하겠다. 그래도 밥은 잘 먹고 있나 보네?]


[응 그럼! 근데 나는 프랑스 요리보단 한식파인가 봐 한국 음식 그립긴 해] [우리 윤재가 해준 밥은 언제 먹어 보낭ㅠ] [보고 싶어❤]


연달아 오는 문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보고 싶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음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아마도 급하게 또 일이 시작된 거겠지. 나는 연락이 끊어지기 전에 그녀의 사진을 달라고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음식이나 거리 사진보단, 그녀의 사진 한 장이 더 갖고 싶은데...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결국 마저 눈을 붙이기 위해 몸을 누였다. 하지만 이미 깨버린 상태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우리가 나누었던 메시지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마치 아끼는 바카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듯, 나는 예전에 그녀와 나눈 대화들을 이렇게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러고 있으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았다.


나의 불안정한 연애는 계속 그런 식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나를 마구 휘두른 적은 없었다. 그저 매번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기다리고, 나 혼자 멋대로 휘둘려줄 뿐이었다.


문자가 와도 무시하고 자면 그만이었다. 다음 날 보내놓으면 그녀가 보고 또 시간이 될 때 연락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내 컨디션을 녹여가며 그녀에게 매달릴수록 이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었다. 나는 의도하지 않게 계속 그녀를 기다렸고, 실망했고, 혼자 마음을 다쳤다.


결국 일주일 뒤 돌아온다던 그녀는 그다음 주에도 오지 않았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곪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나를 방치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녀의 작은 틈 하나하나를 내가 너무 간절히 기다린 탓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시간이 허락하면 곧장 나를 만나러 왔고, 서운했던 내 마음도 그녀를 보면 바로 풀렸다. 그러나 그 좋은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진 않았다. 나는 늘 목이 말랐고, 그녀는 늘 내게 미안해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조금씩 좀먹고 있던 어느 날, 출근을 준비하다가 무심코 틀어둔 TV 속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인기 밴드 트렉스가 오랜만에 완전체로 팬들 앞에 섭니다."


나는 셔츠를 입다 말고 TV 앞에 서서 볼륨을 높였다.


"트렉스의 소속사 SE엔터테인먼트에서는 내년 2월 1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과 대만, 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 도시를 돌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멤버들이 드라마와 예능, 솔로 음악 활동 등 개인 일정에 집중해 온 만큼, 이번 아시아 투어는 오랜만에 멤버 전원이 함께하는 공식 무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달력을 보았다. 내년 2월에 투어라면 이제 두 달도 채 안 남은 셈이다. 그 말인즉슨 남은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투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옷을 입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에게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진영이 스케줄은 본인 뜻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었으니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는 본인 입으로 듣고 싶었다.


"한동안 또 못 보겠네..."


나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화면 속의 그녀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나오고 있는 중에 TV를 꺼버렸다.


하필 또 오늘 하루는 유난히 바쁘고 힘들었다. 어깨는 뻐근하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커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어서 뭘 잘 챙겨 먹지 못한 탓도 있지만 내가 지금 힘든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탈의실 락커에 기대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인기 밴드 트렉스가 오랜만에 완전체로 팬들 앞에 섭니다.'


아침에 들었던 방송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고, 온몸 가득 안고 싶었다. 나는 잠시 그녀의 목에 내 입을 가져다 대는 상상을 하다, 그런 내가 우스워 고개를 젖히고 헛웃음을 흘렸다.


만날 수 없다면 목소리만이라도 들어야 했다. 비록 그녀에게서 나오는 첫마디가 '미안해'일지라도... 나는 그녀에게서 제대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9시 반, 어쩌면 지금쯤이면 촬영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심 기대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는 길게 이어졌고, 끝내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든 생각은 '그럼 그렇지.'였다. 나는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가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촬영 중이야?]


한동안 기다렸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촬영이 끝났으면 그녀가 전화를 했겠지. 촬영 중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겠는가. 아마 핸드폰도 차에 있거나 대기실에 있을 것이다.


나는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락커 문을 열었다. 그동안 내 연락을 기다리다 화가 났던 전 여자친구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의 죄를 이런 식으로 다 받는구나. 내가 바쁠 땐 몰랐던 감정들이 상대가 바빠지니 너무도 아프다. 나는 그런 내 자기 편의적인 태도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집에 도착해 씻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물기도 채 닦지 않은 채 다급히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녀였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진영아."


"내 사랑~ 잤어?"


그녀의 목소리가 피곤해 보인다. 마음이 쓰였지만, 그보다도 당장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그녀의 전화 한 통에 여태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기어이 또 풀어지고야 만다.


"아니. 이제 자려고, 씻고 있었어."


나는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좋은 소식이 있지요! 나 내일 오후 촬영이래! 너 내일 비번이지?"


나는 들고 있던 수건을 툭 떨어뜨렸다.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

.

.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탐하느라 바빴다. 대화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집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아까 혼자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의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탐했다. 우리는 그저 그동안 만나지 못한 것에 보상을 받듯 서로를 안았다. 그녀도 나만큼 목이 말랐는지, 내게 더 매달렸다. 나는 하루 종일 피곤했던 것도 잊고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공들여 어루만졌다.


그렇게 서로의 갈망을 채우고 나면 그녀는 금세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한참 동안 사랑을 나눈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담배를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뭔가 공허했다. 지금 분명 그녀가 내 곁에 있음에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 공허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가득 안고 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나는 그녀의 몸만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내뱉었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오전 잠깐의 그 소중한 시간에 그녀와 무얼 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느라 행복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개운치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두통이 왔다. 그리고 그때, 내 뒤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다.


"... 안 자?"


"깼어?"


나는 깜짝 놀라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남은 연기를 손으로 휙휙 저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뒤에서 나를 안았다.


"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이런... 내가 그녀를 눈치 보게 만들고 있나 보다. 그녀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이러려고 널 다시 만나는 게 아닌데. 나는 성숙하지 못한 내 태도를 스스로 비난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오늘 힘들었어?"


그녀는 내게 안긴 채 내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다 문득 저녁에 내가 전화를 했던 게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너 아까 전화했었지?"


그녀의 말에 나는 아까 락커룸에서 전화했던 때를 떠올렸다.


"응."


"미안해. 진짜 정신없었어."


"알아."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아침에 네 기사를 봤다고?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고? 오늘은 좀 지쳤고, 그래서 네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내가 너무 유치해질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한 거야."


"진짜?"


"응."


진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이나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녀의 살 냄새와 옅은 바디워시 냄새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그녀의 쇄골 위에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조금 기울어져 있는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이 닿았을 때,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꼭 쥐었다.


"... 우리 당분간은 좀 덜 만나는 게 나을까?"


"뭐?"


나는 그녀에게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난 이미 너를 겨우겨우 보고 있는데. 여기서 더 덜 만나자고? 내 표정을 본 그녀는 당황한 듯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네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매번 나한테 맞춰야 하니까."


그녀는 머뭇대면서도 천천히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내가 계속 약속도 잘 못 지키고,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그러니까... 매번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는 거 너도 지칠 거 아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지금 내 핑계를 대는 건가? 앞으로 본인 일정이 더 바빠질 예정이니 미리 선수를 치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내가 힘들다고 너 안 만나고 싶다고 한 적 있어?"


내 목소리에 날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에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당황한 그녀가 급히 내 팔을 잡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네가 지칠까 봐..."


나는 지금 이 대화 주제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이런 얘기 그만하자."


내가 등을 보이자 그녀는 내 등 뒤로 소리쳤다.


"난 이러다 네가 떠날까 봐 겁난단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건 줄 알아? 꼭 지금 이런 얘기를 해야겠어?"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아차 싶었지만 그녀 역시 예민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우리 이런 얘기를 너무 안 하는 거 아니야?"


"... 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 이런 기분으로 말해봤자 싸움밖에 더 돼?"


내가 다시 몸을 돌리자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피하지 말고 참지도 마.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아냐. 싸워야 하면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


나는 그녀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무슨 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뭐라고?"


"매일 기다리는 거 지친다고? 매번 니 일을 기사로 읽는 거 지겹다고? 그렇게 말해?!"


나는 결국 터져 나오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버렸다. 문제는 내 생각이나 진심과는 달리 너무 세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강윤재..."


"너 아시아 투어 한다며."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 아."


"내가 왜 그걸 기사로 봐야 해?"


그녀는 멈칫했다.


"말하려고 했어. 오늘 만나자마자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못 참고 달려들었으니까. 그녀의 입을 막은 건 나였다. 하지만 한 번 터져 나온 감정들은 통제가 되지 않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먹자. 다음에 같이 가자. 다음에 시간 나면. 촬영만 끝나고 나면. 이번 해외 로케만 다녀오면."


내가 말을 쏟아낼수록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는 게 보였다.


"나는 계속 다음만 기다리고 있다고."


결국 진영이의 눈이 붉어졌다.


"... 나라고 안 기다리는 줄 알아? 나도 노력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도 너 보고 싶어서 잠 안 자고 만난 적 많아. 한 시간이라도 비면 너부터 찾았고, 십 분이라도 시간 나면 전화했어."


"알아."


"나도 진짜 너한테 최선을 다했다고."


"알아. 안다고 나도. 그러니까... 하...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냐고."


진영이는 답답한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뭘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보고 싶을 때 만나고, 약속을 하면 약속대로 만나고, 손을 잡고 걸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힘든 날 전화하면 받을 수 있고... 내일도 볼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고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은 진영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였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나 일 그만둘까?"


결국 그녀의 입에서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서 저런 말이 나오게 해 버린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이를 갈았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그만 얘기하자 제발."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뭘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고, 머리도 너무 아팠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계속 싸우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내 직업 때문인 거잖아. 네가 원하는 게 그거 아니야?"


"하아..."


나는 한숨을 내뱉었고, 그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 그녀를 끌어안아버리면 된다. 그럼 이 싸움도 그렇게 끝날 것이다. 그냥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예민했다고, 미안하다고, 말을 실수했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내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면 그녀는 나를 안아주고,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말해주겠지.


그런데 진짜로 진심이 아닌 걸까?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고 또 반복될 텐데... 과연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일 그만둘까?'


그녀가 방금 했던 말이 떠오르자 또 머리가 지끈 아팠다. 그녀는 겨우 날개를 달았고, 지금은 한참 위로 날아올라야 할 소중한 시간인데, 그녀의 그런 시간을 나에게 허투루 쓰게 하는 게 옳은 일인 걸까? 오히려 그녀야말로 나를 만날 시간에 잠이라도 조금 더 자고 작품에 더 몰입하는 게 나은 게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자꾸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나를 짓누르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내 외로움과 서운함, 그리고 비참함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 목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끝은 자꾸만 같은 곳으로 흘렀다. 어쩌면 진영이에게는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결국 내 안에서 뭔가 끊어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뱉어버렸다.


"... 우리 헤어질까?"


내 말에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나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뱉은 건지 알아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 뭐?"


그냥 홧김에 뱉은 말이기를 바라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 보고 싶어. 나도 약속 취소할 때마다 미안해 죽겠고. 나도 같이 어디 가고 싶고, 너랑 그냥 아무 데서나 밥 먹고 싶어."


"... 알아."


진영이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어떡해. 지금 나한테 일이 이렇게 들어오는데. 내가 이걸 다 버려? 나 혼자면 또 몰라. 하지만 우리 멤버들은? 나 때문에 다 망쳐버려?"


"...그런 뜻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대체 무슨 뜻인데! 헤어지자는 게 무슨 말이야!"


결국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녀는 주저앉은 채 눈물을 더 쏟아냈다. 그녀가 서럽게 울고 있다. 나는 진짜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그녀는 아직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헤어지고 싶어?"


"... 모르겠어."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며 그녀는 다시 상처를 받은 얼굴을 했다.


"아니라고 해, 윤재야. 그냥 잘못 말한 거라고 해. 제발 부탁이야."


그녀는 애원하듯 내 목에 매달려 내 뺨을 만졌다. 나는 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한참 말이 없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나는 자꾸 욕심이 나는데!"


그녀가 다그치자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다고 네가 나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는 건 죽어도 못 보겠고, 나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


"..."


"내가 네 아까운 시간을 뺏는 사람인 것 같아서 나도 미치겠어!"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얘기해!"


그녀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질바카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삼켰던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한테 짐인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네가 나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도 많고... 너도 날 만날 시간에 차라리..."


그녀는 화가 난 듯 인상을 쓰며,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내가 언제 네가 짐이라고 했어? 나는 네가 떠날까 봐 무섭다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거야?"


"내가 그래서 오늘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내 말에 그녀는 내 어깨를 밀어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 그래. 그만 얘기하는 게 낫겠어."


그녀는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들어가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그녀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는 걸 보고 얼른 들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놔... 나갈 거야."


"이 시간에 어딜 가겠다는 거야."


"못 있겠어... 지금 여기. 너랑"


그녀는 울면서 내 팔을 뿌리쳤다. 그녀는 한참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결국 이렇게 나는 그녀에게 또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내가 갈게. 넌 있어."


나는 그녀를 침대에 앉혀두고 차 키를 챙겼다.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잠시 발을 멈추었지만 그녀에게로 돌아가진 않았다. 현관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 역시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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