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나는 호기롭게 연락해놓은 것 치고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우리를 그저 과거에 두고 온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원치 않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그게 만남이건, 이별이건...
나는 이미 한 번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어떻게 그녀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참았다. 그동안 나는 일부러 더 일에 몰두했고, 그 덕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연락하고 싶은 순간이야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걸 알았다. 행여나 술에 취해서 전화라도 걸까 봐 반년이 넘도록 술도 안 마셨다.
연말에 딱 한 번, 그녀에게서 잘 지내냐는 문자가 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그냥 서로 간단히 안부만 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쯤 그녀는 음악 방송에서 3주 연속 1위를 했다. 그건 가뜩이나 바쁜 그녀가 더욱 바빠짐을 의미했다.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서 한 발 더 멀어졌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맞이한 2024년. 일단 새해 가장 좋은 소식은 김기태의 재판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거침입, 절도, 특수폭행, 살인, 사체유기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고 결국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 역시 기각되면서 원심 판결이 유지되었고, 마침내 형이 확정되었다.
그 새끼가 진범일 거라고 끝까지 의심했던 내게는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지만, 살인과 사체유기가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형량치고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므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시간은 오늘까지 쉴 새 없이 달렸고, 오늘자 달력은 2024년 5월 12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28번째 생일의 하루 전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손에서 진동을 울려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발신인에 쓰여 있는 이름만 보아도 심장이 미친 듯이 조여 온다. 그래서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했다.
"... 어, 진영아."
"야, 강윤재!! 머하구이써어?? 오디야?"
시끌시끌한 소음과 함께 취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근 중이던 나는 휴대폰을 들고 복도로 나가야 했다.
"나야 근무 중이지. 너... 술 마셨어?"
"무야아. 어떻게 전화 한 번이 없어? 나 내일 생일이다?! 그래서 마셨지?"
"야, 야! 3차 가! 3차! 오데로 가냐?! 그건 바로~오! 우리 집!!"
나를 여전히 윤재라고 부르는 그녀의 비음이 섞인 높은 목소리 사이로 웬 술 취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술에 취해 몸도 못 가누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새끼가 자기 집에 데려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너 어디야."
"어? 나 여기 어디지? 어디야? 한남동? 몰라.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내일 생일이라니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겉옷을 챙겼다.
"너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거 아무거나 얘기해. 가게 이름이든, 건물이든. 아니 그냥 옆에 직원 바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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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윤재다!! 우리 윤재가 왔네!"
그녀가 있는 곳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프라이빗 바였다. 예약한 소수의 손님만 받는 곳이라 유명인사들도 자주 찾는 곳이었다. 나도 예전에 사건 조사차 한 번 들러본 적이 있는 곳이라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라운지 안쪽 소파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는 앉은 자세도 삐딱한 것이 잔뜩 취해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나는 서두르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걸으며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내가 앞에 서자마자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나는 그대로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것 봐라~ 내 팬들이 준 거다? 엄청 귀엽지?"
그녀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내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 앞선을 잡아 펼쳐 보였는데, 그 바람에 그녀의 가슴이 내 팔에 자연스럽게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의도하지 않은 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팬이 준 선물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괜히 혼자 얼굴이 새빨개져 황급히 팔을 빼냈다.
"어, 귀엽네. 매니저는? 너 집엔 어떻게 가."
그녀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매니저 없어! 오늘 얼마 만에 받은 휴일인데! 이대로 집에 갈 수 없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감싸 안듯 다시 팔짱을 꼈다.
"윤재야 우리 3차 가자, 3차!"
이번엔 그녀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이제 9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몇 시부터 마셨길래 벌써 이 지경이 된 거지...? 나는 남은 한 손으로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이렇게 먹인 거야? 나는 아까 그 목소리의 남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어! 경찰 아저씨!"
때마침 화장실 쪽에서 그녀의 일행이 나를 보고 반갑게 손가락질을 했다. 지난번에 본 적이 있는 그녀의 멤버들 중 빨간 머리를 한 녀석이었다. 이자식은 왜 계속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까. 분명 동갑일 텐데 말이다.
"경찰 아저씨! 우리랑 같이 3차 가요! 3차~! 우리 집으로! 렛츠고!"
빨간 머리 녀석은 해맑게 내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 아까 그게 너였구나.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이 자식도 취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인 데다 진영이를 해코지할 마음을 품은 건 아닌 거 같았으니 최대한 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몸을 일으켰다.
"최용식 씨. 많이 취하셨는데, 이쯤에서 마무리하시죠."
"최용식이래! 푸하핫!!"
진영이는 내가 그의 본명을 부른 것이 뭐가 그리도 웃기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그런 진영이를 어이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주취자들에게 시달려 본 나지만 지금은 유독 기가 쭉쭉 빨린다.
"미르! 우리 윤재가 날 데리러 왔으니까, 나는 간다. 3차는 니들끼리 해랑~"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핸드백을 챙겼다. 나는 그녀가 넘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고 핸드백을 받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녀석과 단둘이 마신 건 아닌 걸 알게 되어서 괜히 한시름 놓았다.
"안녕~ 간다~~~"
내가 거의 그녀를 부축하다시피 데리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뒤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어 댔다.
나는 차에 도착해 그녀를 조수석에 앉히고 시동을 걸며 물었다.
"주소 불러. 어디로 가면 돼?"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강윤재다."
조금 전까지의 들떠 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용하고 낮게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이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자 그녀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 윤재야."
그리고는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녀리고 작은 손이 내 뺨에 와서 닿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움직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단둘뿐인 조용한 차 안, 그리고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 내 심장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그녀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점점 우리 둘의 얼굴이 가까워져 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이대로면 분명 입술이 닿는다.
찰나의 순간, 그냥 못 이긴 척 가만히 있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술에 취했고, 내일은 분명 후회할 게 뻔했다.
"... 술 깨는 약을 좀 사다 줄까?"
내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게 다가오던 그녀도 잠시 멈추었다. 잠깐 동안 나를 보던 그녀는 그대로 내 어깨에 기대며 내 팔을 감싸 안았다.
"아니. 나 다 깼어."
나는 차마 잡힌 팔을 빼진 못하고 내게 기대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내게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얘는 대체 이 조그마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늦은 시간에 술에 취해 시커먼 남자 차에 덜컥 타다니.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이지 겁도 없다. 이 세상 남자는 다 늑대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나? 나도 결국은 그런 놈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놈인데 말이다.
"데려다줄 테니까 주소 불러."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동요하고 있는 내 속이 들통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는 내 휴대폰을 가져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그리고 내 대시보드 위에 툭 올려놓고는 새침하게 내 팔에 다시 자신의 팔을 휙 감더니 눈을 감았다.
작년에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그녀의 주소를 받아본 일이 있다. 지금 적힌 주소를 보니 이사를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오른손은 붙잡힌 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왼손을 이용해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었다. 운전은 해야겠고, 붙잡힌 손을 놓고 싶진 않아서였다.
그렇게 도착한 그녀의 집 앞. 나는 이미 동네를 한 세 바퀴 정도 돈 뒤였다. 길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옆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를 차마 깨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10시를 훌쩍 넘겼고 내 오른쪽 팔은 쥐가 날 것 같았지만 버텼다.
연예인들 엄청 바쁘다던데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겠지. 게다가 오늘은 생일 전날이기도 하고, 아주 오랜만에 얻은 휴일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평소 술자리를 즐겨하지 않는다던 그녀가 얼마나 신이 났으면 이렇게 과음을 했을까.
그래, 지금은 깨우지 말고 조금만 더 자게 두자. 나는 그렇게 그녀를 깨우지 않을 핑계를 머릿속으로 계속 찾고 있었다.
내 팔에 기대 잠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눈코입이 눈에 들어왔다. 속눈썹도 길고 작은 코도 오똑하고... 그러다 그녀의 입술에 시선이 닿는 순간,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다가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된다. 얼른 깨워서 들여보내야 한다.
"진영아. 일어나 봐."
나는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내 목소리에 그녀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 나 잤어? 여기 어디야?"
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지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 다 왔어."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작게 하품을 했다. 그 덕에 내 오른손이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쥐가 날 것 같은 손목을 살짝 돌렸다.
"집에 잠깐 들어갔다 갈래?"
"뭐?"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는 그녀의 폭탄 발언에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다.
성인이 된 후 만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직구를 던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난 너랑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지금 내가 아무 데나 막 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귀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금까지 그녀의 말을 곡해해서 들은 나 자신이 싫었다. 더러워, 쓰레기 같은 새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대체.
"흑심 같은 거 없어. 그냥 진짜로 대화만 하려고."
하지만 나는 잇따른 그녀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레 흑심 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리는 법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그런 귀여운 얼굴로 흑심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진짜로 흑심이 없다 한들, 내가...
"키스하려고도 안 할게."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눈만 껌벅거렸다. 아니 자의로 멈추었다기보단 그냥 굳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술은 쟤가 먹었는데 지금은 내가 취한 것 같았다. 너무나도 달라진 그녀의 모습이 도통 적응되지 않는다.
혼자 들여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따라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물론 따라 들어가고 싶다는 건 단순히 나도 정말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지 뭘 어떻게 해보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따라 들어가서 정말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와. 그건 솔직히 진짜 쉽지 않다. 냉큼 따라가지 못하겠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면 그냥 차에서 좀 더 얘기해도 되고."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골목,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은은하게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너무 가깝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춰버리고 싶은 충동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차 안은 너무 위험하다. 차라리 집이 낫지.
"... 늦었어. 오늘은 들어가서 자고, 다음에... 다음에 술 깨고, 그때 얘기하자."
"... 나 술 다 깼는데..."
그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이런 별 의미 없는 행동마저도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이거 정신을 단단히 차리지 않으면 사고 치겠다.
하지만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다음 말의 끝을 흐리자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 생일에 나 혼자 있긴 싫은데..."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동을 껐다. 안전벨트도 바로 풀었다. 그래. 생일에 혼자 있게 둘 수는 없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른 내 행동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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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은 연희동 주택가에 위치한 단독주택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살던 집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자 혼자 살기에는 아주 넓은 집이었다.
나는 그녀가 잠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녀의 집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집을 두리번거렸지만,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와인 마실래?"
그녀가 편한 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와인 셀러를 열고 익숙하게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술을 즐겨하지 않는다더니... 집에 와인이 한가득이다.
"나는 괜찮아. 차도 가져왔고..."
슬쩍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갔다. 12시, 그녀의 생일이 지나면 축하해 주고 얼른 재우고 가야겠노라 생각했다. 절대 술은 안 된다. 제정신으로도 이렇게 버티기 힘든데 술이라도 한 잔 하는 날에는...
"대리 부르면 되지?"
그녀는 내 말은 가뿐히 무시한 채 와인잔을 두 개 들고 와서는 소파를 등에 대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능숙하게 와인을 열고 기어이 내 것으로 추정되는 잔에 와인을 담아냈다.
"여기서 지내? 혼자서?"
나는 그녀가 건넨 와인잔을 받아 든 뒤 탁자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마시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진 여기서 같이 살았어. 우리 할머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 할아버지는 나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할머니랑 서울로 왔어. 고모가 근처에 살거든."
그녀는 내가 내려놓은 잔에 홀로 제 잔을 챙 부딪치고는 입을 축였다. 그녀에게 조부모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아는 나는 섣불리 위로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와 그녀는 이런저런 소소한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키우던 강아지나 할머니 이야기, 요즘 하는 작업들, 드라마 촬영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쫑알쫑알 떠들며 와인을 반 병 정도 비웠다.
"나만 너무 떠드는 것 같아. 넌? 너는 어디 살아? 혼자 살아?"
나는 그녀가 안주도 없이 자꾸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는 게 마음에 걸려 작게 자른 치즈 하나를 포크로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응. 나는 아현동, 온라인 게임 근처에서 자취해."
"아현동? 여기서 엄청 가깝잖아?!"
그녀는 깜짝 놀라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건넨 포크는 받지 않고 입으로 치즈를 받아먹었다.
"나도 네 주소 보고 깜짝 놀랐어.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내 발치에 앉아 있던 그녀가 내 허벅지 위로 자신의 팔을 올리고 고개를 기댔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그동안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
"... 어?"
나는 그녀의 스킨십보다, 그녀의 말에 더 깜짝 놀랐다.
"내가 연말에 연락했던 건 기억해?"
"... 응."
"나는 용기 내서 연락한 거였는데... 지는 한 번도 안 하고. 치... 계속 기다렸는데..."
그녀의 눈동자에 스치는 서운함을 본 나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부담스러울까 봐 참고 또 참은 나였다. 그런데... 기다렸다고?
"... 아니 나는 네가 부담스러울까 봐..."
내가 말 끝을 흐리자 그녀는 내 다리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친구 사이에 연락하는 게 뭐가 부담스러워?"
'친구 사이'라는 말에 나는 작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 친구라고? 어떻게 너랑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지?
"민유정이랑은? 걔랑은 잘도 연락하지?"
그녀가 뜬금없이 유정이를 소환하는 바람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
그녀는 내 허벅지에 턱을 기댄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민유정도 여사친이잖아. 왜 민유정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민유정이랑 자기랑 같나?
"... 네가 민유정이랑 같냐?"
그녀는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뿔싸. 그녀는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를 떠보았다.
"왜? 우리도 친구 아니야?"
"... 네가 어떻게 그냥 친구야."
나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알고 있었다. 평소의 다른 연애였다면, 저런 허튼수작에 나는 넘어가주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만큼은 밀당 같은 거 할 생각이 없었다. 아낌없이 다 퍼주어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내 마음이든, 뭐든.
그녀는 내 허벅지 위로 기어올라와 나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바람에 나는 몸이 뒤로 밀리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졌다.
"... 그럼 뭔데?"
그녀가 아주 작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첫사랑? 사귀었던 사이? 좋아했던... 아니 지금 좋아하고 있는 여자? ...뭘 갖다 붙여도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미처 말을 고르기도 전에 입이 막혔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고 물리적으로. 그녀가 내 입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내 위에 올라타고 앉은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싼 채 잠시 동안 내 입술을 탐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나는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벌어진 두 다리가 내 양쪽 허벅지를 계속 스쳤기 때문이었다. 큰일이다. 이 자세 너무 위험하다.
그녀의 입이 내게서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경찰대를 다닐 때 죽어라 달달 외웠던 경찰관직무집행법을 제1조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및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내게 가까이 붙었다. 그녀의 향기가 은은히 내 후각을 자극했고 나는 소파의 시트를 움켜쥐어야 했다.
'슬롯공공의 질서를 유지하...'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내 얼굴을 붙잡고 똑바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술기운이 남아 불그스레한 얼굴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강윤재."
"... 왜."
아마도 지금 나는 귀까지 새빨개져 있을 거다. 고작 입맞춤 한 번에 목 뒤로 땀이 흐른다. 나는 왜 그녀만 만나면 16세로 돌아가는 걸까.
"너 나 좋아하지."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녀의 앙증맞은 입꼬리는 아주 살짝 위로 향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그대로 내 입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