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말랑해.

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by아리엘
image.png서비스 스틸컷 _ 다정한 우진과 진영의 투 샷, 진영이네 집 거실.



35. 말랑말랑, 말랑해.



조용한 그녀의 집 거실에서는 한동안 서로의 입이 맞닿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키스에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갔지만, 그녀의 입술이 내 귀를 스쳐 목으로 내려오고, 그녀의 손이 내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자... 잠깐만...!!"


나는 황급히 그녀를 떼어냈다. 강우진, 이 미친놈아. 진영이는 지금 술에 취했다고. 네가 중심을 잡아야지 휘둘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내가 떼어내자 그녀는 약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꽉 끌어안아버렸다. 내가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이성을 붙잡고 있을 자신이 없다.


다행히 그녀도 더 이상 내 몸에 집착하지 않고 가만히 안겨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안고 있었더니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안은 채 슬쩍 고개만 내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품에 조금 더 깊게 끌어안았다가 놔주었다.


"... 생일 축하해."


그녀는 가만히 떨어져 나와 나를 보았다.


"키스 안 한다고 꼬셔 놓고 해 버렸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허벅지에서 떨어져 나와 배시시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안주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하나도 안 미안해. 사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거든."


너무나 태연한 그녀의 말에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우 같은 계집애... 나는 그녀가 저런 말을 저렇게 능글맞게 한다는 게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를 다시 한 번 시험에 들게 했다.


"자고 갈래?"


그리고 그녀는 아까 차에서 보여줬던 애교스러운 표정을 다시 한 번 지었다.


"진짜 절~대 안 건드리고, 정말 진심 레알, 손만 잡고 잘게."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놀리나 싶은 마음에 아주 약간은 얄미웠는데, 지금 짓고 있는 그녀의 표정 하나에 다 녹아내려버렸다.


... 귀여워서 미치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키고,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접시를 받았다.


"... 이번엔 안 속아."


그녀는 순순히 접시를 뺏기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꼬셔도 술도 한 잔도 안 마시고... 무슨 남자가 이렇게 정신이 강인하지? 아님 내가 너무 매력이 없나? 아 역시 너무 편하게 입은 게 문젠 건가."


그녀가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짧은 바지 위에 박시한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걸친 상태였다. 사실 지금 그 옷이 제일 미치겠는 포인트인데. 그녀는 전혀 모르는 듯하다.


내가 접시를 들고 싱크대 쪽으로 향하자 그녀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자고 갈 거 아니면 나 잠들 때까지 있어 주다가 나 잠들고 나면 가. 내 생일이잖아."


나는 막무가내로 조르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너 내일 몇 시에 스케줄이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내일? 점심때까지 일정 없어. 오후에는 잠깐 인터뷰 있어서 1시까지만 샵 가면 돼. 왜? 같이 있어주려구?"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 있자니, 아침까지 같이 있어주겠노라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이성의 끈을 놓지 말자, 우진아.


나는 애써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난 출근해야지. 이래 봬도 보기보다 성실한 온라인 게임인이거든."


내가 식기를 싱크대에 올려놓는 동안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막 외근한다고 늦게 가고 그래도 괜찮지 않나?"


"지금은 외근이 아니잖아."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지 않나?"


그녀는 내 뒤로 다가와 살짝 기대며 유혹하듯 내 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 몸이 굳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나는 피 같은 국민들의 세금을..."


"아 됐어!! 가! 짜증나 너..."


한마디도 져주지 않는 내게 토라진 그녀는 뒤돌아 나를 홱 지나쳐 가려고 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자는 거까지는 보고 갈게. "


내 말에 방금까지 토라져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금세 올라갔다.


"진짜지?"


"응. 대신 이제 진짜 술은 그만 마시자. 너 취했어."


"나 술 다 깼다니까?"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마셔."


나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와인잔도 들고 싱크대로 옮겼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 알겠어. 그럼 나 씻고 올게."


그렇게 말한 그녀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같이 씻을래?"


"진짜 죽을래?"


나는 진심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를 거절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녀는 모른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알겠어! 장난 그만할게! 너 그냥 가면 안 돼. 알았지?"


"안 가."


"진짜지?"


"안 간다니까."


그녀는 몇 차례나 확인을 받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배시시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하루, 내 심장이 몇 번이나 멎었던 건지...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그녀의 작은 장난 하나에도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니... 그러고 보니 나 이 말을 전에도 했던 거 같은데... 왜 그녀만 만나면 이렇게 멍청해지는 걸까.


긴장이 풀리자 약간 나른해졌다. 그렇게 깜박 소파에서 졸았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직 그녀는 내려오지 않은 것 같았다. 행여나 잠이 들까 싶어 나는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향했다. 뭐라도 하자. 가만히 있다가 잠이라도 들면 안 되니까.


내가 먹던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녀가 머리도 채 다 말리지 않은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이 안경까지 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나는 그대로 굳어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았다. 화장을 지우니 정말 어릴 때 진영이 모습 그대로였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녀는 내 곁에 서서 쑥스러운 듯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지 마, 생얼이란 말이야."


"... 이래서 여자의 화장은 믿으면 안 되는 거구나."


"뭐?!"


"농담이야. 예뻐."


그녀는 내 말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손에 있는 물기를 닦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빙글 돌렸다.


"자, 이제 자러 가자. 주무실 시간입니다."


그녀는 못 이긴 척 내가 미는 대로 밀렸다. 그러더니 내 팔을 잡곤 2층 계단을 올랐다.


그녀의 침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그녀의 방 한쪽에는 기타 두 대가 세워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읽다 만 바카라들과 안경 케이스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정리정돈이랑은 거리가 먼 것 같아 보인다.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허리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리 와."


나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그녀는 또 한 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저 표정 진짜 자주 보는 것 같다.


"독해. 진짜. 독해, 강윤재."


그녀는 나를 침대 위로 올리는 것은 포기한 채 몸을 옆으로 뉘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그냥 갈 거야?"


"너 잠들면 가야지."


"몇 시에?"


"네가 몇 시에 잘 건데"


"나 안 잘 건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야지. 벌써 한 시가 넘었어."


내 핀잔에 그녀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자면 그냥 갈 거잖아. 난 아쉽단 말이야... 이대로 그냥 가버리는 거."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유혹하던 그녀는 지금은 사뭇 진지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 오늘이 그냥 이렇게 지나고 나면 우리는 또 못 볼 수도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슬프게 들려 마음이 아렸다. 나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내 행동에 깜짝 놀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디 가게!?"


"안 가."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어쩌면 이미 지난 과거라며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건 나뿐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녀도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진 모를 테니 말이다. 내가 겁이 나 차마 용기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인 걸까?


내가 곁에 앉자 그녀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다시 몸을 뉘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또 만나러 올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


내 말에 아주 잠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인 그녀의 표정을 본 나는 당황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잘 준비를 하듯 눈을 감았다.


"진짜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하고 잘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말했고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기 싫다며 버티는 조카를 재우던 때가 생각이 나서였다.


"아까부터 하나만이 몇 번째야..."


"진짜 진짜 마지막."


"뭔데"


내가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자, 그녀는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고 뉘었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 나 다시 만나서 좋았어?"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조금 놀랐지만 이번엔 머뭇거리지 않았다. 대답이 늦어지면 그녀를 상처 입힐 것 같아서였다.


"응."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아까처럼 한 번 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걱정스러워 그녀의 뺨에 두 손을 대었다.


"왜 그래..."


"나만 그런 줄 알았잖아."


그녀는 고백하듯 말을 쏟아냈다.


"먼저 연락도 않고, 내가 그렇게 꼬셔도 넘어오지도 않고, 나는... 나만 혼자 좋았던 줄 알았잖아. 와달라고 조르는 것도 결국 나였고, 키스도 내가 먼저 하고..."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녀를 품에 와락 안았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처음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나를 함께 끌어안았다. 그녀의 말에 대답은 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도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그 대신 나는 그녀를 품에 안은 팔에 힘을 더 꼬옥 실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내가 그녀에게 행동으로 보여줄 차례다.



.

.

.



새벽 3시. 졸린 게 분명한 눈을 하고도 끝까지 자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녀가 겨우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그녀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나는 몇 시간 있으면 출근이다. 지금 집에 가서 씻고 자도 세 시간이나 잘까 말까였다. 그것도 잠이 와야 말이지. 지금 같아서는 절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피곤한 목을 한 번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생일이니 아침밥 먹을 때 같이 있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늦어도 7시엔 여기서 나가야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할 수 있을 듯했다. 지금 이 시간에 잠든 그녀를 굳이 그 시간에 깨울 순 없으니 아쉽더라도 지금은 가는 게 맞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내가 밤샘 근무할 때 종종 가는 24시간 식당에 들렀다. 혹시 연희동까지 아침밥 배달을 해줄 수 있을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일어날 시간쯤에 맞춰 배달을 하면 내가 꼭 챙겨주지 않아도 그녀의 생일에 아침을 거르지 않고 챙겨 먹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그녀가 아침에 먹을 밥까지 준비해 둔 뒤에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잠은 당연히 거의 못 잤다. 어떻게든 겨우겨우 잠은 들었지만, 그녀는 밤새 꿈속에서마저 나를 괴롭혔다.


[뭐야. 이거?]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거야.] [감동이잖아]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오전 10시, 윙윙 울려대는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고 있었다. 말끔히 다 비운 그릇 사진이 함께 있었다.


[생일이니까 아침은 챙겨 먹어야지. 해장도 하고. 먹고 출근 잘해.]


나는 얼른 답장을 하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진동은 계속해서 울렸다. 전화가 오는 줄 알았다.


[생일인 나를 버리고] [그냥 가놓고?] [근데 진짜 감동이긴 해!] [나 술 마셨다고 일부러 해장국으로 시킨 거야?] [너 요리 잘해? 나는 못 해] [네가 해준 밥 먹어보고 싶다] [근데 이것두 진짜 맛있었어!]


나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며 터져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한 채 답장을 썼다.


[요리야 할 줄은 알지. 자취한 지 제법 됐거든. 다음에 해 줄게. 메뉴 생각해 봐.]


[우와 진짜?] [언제?] [뭐 해 줄 건데?] [나는 혼자 살아도] [요리는 잘 못해 젬병이야] [어디서 해 줄 거야?] [우리 집에 또 올 거야?] [아님 너희 집에 데려가 줄 거야?]


그녀는 내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답장을 쏟아냈다. 나는 아예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으로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놓으면 다음에 해 줄게.]


[진짜?] [뭐 해 달라고 하지?] [니가 제일 잘하는 건 뭔데?] [아냐 내가 고를래] [아 너무 고민돼 첫 메뉴잖아!]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메시지만으로도 그녀의 조잘거리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결정되면 알려줘.]


[나 먹고 싶은 거 생각났어!]


[뭐가 먹고 싶은데?]


나는 그녀가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든 해줄 생각이었다. 요즘은 인터넷에 레시피도 많으니까. 여유 만만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


쿨럭... 사레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텀블러를 바카라상에 내려놓았다.


"허, 이 새끼 이거, 연애하고 자빠졌네?"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팀장님이 내 앞에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었다. 그는 범인을 추리하는 탐정과 같은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그 용감한 처자 만나지?"


"네?? 그게 무슨..."


"나를 속일 생각을 하지마러. 내가 형사 생활 짬밥이 몇 년인디."


팀장님의 말에 효범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빙그르 돌려 내 쪽을 보며 반박했다.


"에이, 팀장님. 이번 건 잘못 짚으신 것 같은데요? 강 경위님이 그렇게 막 공사 구별 못하는 타입은 아니지 않아요? 그리고 상대방은 연예인이잖아요."


효범이의 말을 무시한 팀장님은 나를 압박하듯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새끼 이거, 그 용감한 처자 처음 만난 날부터 요~상했더랬어. 눈빛이 아~주 불순했다고?"


"예? 첫날이요? 김기태 검거한 날 말씀이세요?"


효범이는 잘못 짚었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팀장님은 지금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노련한 아저씨에게 이미 나는 첫날부터 다 들킨 모양이다.


"너 이 새끼 솔직히 말혀. 그 처자랑 뭐 있지?"


팀장님이 너무 확고해 보이니 이제는 효범이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그런 내 반응에 팀장님은 확신한 듯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 이거 봐! 있다니께!? 이 새끼 성격에 아니었으면 벌써 지랄을 하고도 두 번은 더 했지! 암!"


나는 바보처럼 굳어서 대꾸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고, 팀장님이 나를 추궁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

.

.



"어? 오늘은 벌써 퇴근하십니까?"


평소보다 서두르는 나를 보며 효범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 근래 일에 미쳐 살던 내가 정시에 일어난 건 상당히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나는 효범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여자 생긴 거 맞지 말입니다."


"형사의 감이 말해주는디, 백빠센트여."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제 와서 팀장님을 속이긴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다 이야기할 수도 없으니 그저 긍정적인 침묵으로 일관해야 했다.


그녀의 일이 끝날 시간에 맞춰 도착한 가로수길, 나는 끝나는 시간이 명확하지 않은 그녀를 위해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간단한 잡지 인터뷰 촬영만 마치면 7~8시쯤 끝난다고 했다.


[윤재야, 나와.]


윙윙 진동이 울린 걸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있던 카페 앞에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앞에 검은색 밴, 타면 돼.]


아, 그렇구나. 그녀는 이제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쉽게 드러내긴 어렵겠구나. 그녀가 유명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위치를 상기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자 안쪽에 앉아 있던 그녀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어서 오세요, 강우진 형사님!"


나를 윤재라고 부르던 그녀가 갑자기 지금의 이름을 부르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나는 차에 올라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운전석이 신경 쓰여 잠시 멈칫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백미러 너머로 나를 슬쩍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차는 주차장에 대놨다고 했지? 오빠, 신사역 공영주차장으로 가 줘."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천천히 차를 움직였고 나는 괜히 신경 쓰여서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매니저 오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내가 뭘 하든 저 오빠를 속일 순 없거든. 오픈하는 쪽이 훨씬 나아."


밴은 근처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내 차를 세워둔 곳이었다. 그리고 내 차 바로 앞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여기서 내려도 돼?"


내 질문에 그녀가 창밖을 한 번 살폈다.


"응, 이 정도면 괜찮아."


그녀는 옆에 놓아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챙겼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얼굴을 드러내고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무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녀가 내리기 전에 먼저 내려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혹여나 누가 보고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다행히도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그녀를 태웠다.


"이틀 연속 윤재가 운전하는 차에 타다니, 기분 째진다!"


그녀는 진짜 신난다는 듯 활짝 웃었다. 나는 뒷좌석에서 담요를 챙겨 그녀의 무릎 위에 툭 올려두었다. 그녀의 치마가 너무 짧아 추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내가 준 담요를 펼쳐 무릎에 덮은 채 물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 뭘 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며 검색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만나고 보니 검색해 둔 것들은 대부분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남들처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 맛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하다못해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예쁜 카페도 안 되지 않는가. 내가 유명인이랑 데이트를 해봤어야 뭘 알지.


"영화 보러 가자."


시동을 걸며 툭 던진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조금 난처한 듯 눈을 굴렸다.


"어? 아... 어... 그게..."


나는 그녀가 왜 그리 머뭇거리는지 잘 알고 있다.


"걱정 마, 영화관으로 갈 건 아니니까."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영화관 아니면? 어디로 가? 혹시 너희 집으로 가? 우리 넷플릭스 보는 거야?"


나는 잔뜩 들떠 보이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응큼하기는.


"사실 생일이니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고... 경기도 외곽으로 빠지면 양주 쪽에 자동차 극장이 있더라고. 거기면 너도 편할 것 같아서."


내 말에 그녀는 굉장히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와 대박! 나 자동차 극장 처음 가봐!!"


그러다 이내 의심 어린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치. 여자랑 데이트 좀 해봤나 봐?"


"뭐?"


"누구랑 가본 덴데?"


그녀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질투하는 척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너 만나기 전에 검색해서 찾아본 거야."


내 말에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나는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괜히 몸이 굳었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신난 듯 내게 질문을... 아니 혼자 쫑알쫑알 수다를 퍼붓기 시작했다.


"너 J지? 엄청 꼼꼼한 거 보니까 J가 확실해. MBTI 뭔데? 음, 아니야. 내가 맞춰 볼래. 일단 I는 확실하고, 음.. S? 그리고 분명히 T! 너는 무조건 T야. 그것도 완~전 순도 99% T! 그리고 J! 너 ISTJ 맞지?!"


그녀는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T야?"


나는 못마땅해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너무나도 확신에 찬 그녀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너 나랑 경찰서에서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와 나 그때 진짜 무슨 로봇이랑 얘기하는 줄 알았잖아. 감정은 하나도 없이 '정쥐뇽쒸, 인종하쉽뉘꽈?' 이러는데 진짜 얄미워 죽을 뻔했다고."


그녀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 말투를 따라 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그거야, 일하는 중이니까..."


"그래서? ISTJ가 아니라고?"


"나 INFJ인데."


그녀는 꽤나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 팔에서 조금 떨어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NF라고? 말도 안 돼. 너 검사 다시 해."


"말도 안 될 건 또 뭐야?"


"내가 뭐 MBTI 맹신론자는 아니지만, 와 네가 NF라고~?? 상상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녀는 계속해서 부정했고, 나는 묘하게 약이 올랐다. 얘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로봇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나는 뭐게? 맞춰 봐!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좀 어려울 수도 있어!"


나는 내가 절대 맞추지 못할 거라 여기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뱉었다.


"ENTP."


내 대답에 그녀의 토끼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나는 사실 그동안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종종 찾아 읽었다. 예전 한 잡지 인터뷰에서 멤버들의 MBTI를 다룬 적이 있었고, 그녀의 것도 거기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그녀에게 말할 순 없었다. 창피하니까. 그리고 지금은 아주 살짝 얄미운 그녀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뻔하지, 엔팁이 원래 또라이로 유명하잖아. 자뻑도 심하고. 딱 지금의 너네."


"뭐라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 웃었다. 별것 아닌 이런 소소한 수다를 떠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시간이 더디게 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40분가량을 떠들면서 자동차 극장에 도착했지만 거기서도 정작 영화는 전혀 보지 않았다. 사실 무슨 영화가 상영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우린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고 또 물었다. 연애하는 방식은 어떤지, 싸우면 바로 풀리는 편인지, 연락 빈도는 어떤 게 좋은지 같은... 사귀기 직전의 여느 커플처럼.


그러다 그녀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여자친구 많이 만나봤어?"


나는 그런 그녀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며."


"뻥인 거 다 알아챘었잖아. 너는 하는 짓 보니까 여자친구 엄청 많았을 것 같애. 전 여친 중에 예쁜 애들도 있었어?"


그녀는 내 눈을 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있었지, 예쁜 애."


그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내 손을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며 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그러시겠지. 엄청 예쁘셨겠지~"


나는 그녀의 이런 질투 어린 말투가 참 좋다.


"응. 엄청 예뻤어. 작고 뽀얗고, 이상형이었지."


"하! 나도 작고 뽀얗거든?!"


그녀는 발끈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내 말을 한참 생각하던 그녀는 수줍은 듯 인상을 썼다.


"뭐야! 느끼하게."


하지만 뱉는 말과 다르게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럼 지금 우리는 무슨 사이야?"


그리고 그녀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허둥대며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생일날 같이 데이트하고, 키스도 했으니까 친구는 아닌 거지? 그럼 뭐 썸, 그런 건가?"


내 눈치를 살피며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녀는 내가 말이 없자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썸, 뭐 이런 거면 독점권 없는 거 알지? 나 저 영화에 나온 배우가 이상형으로 꼽은 사람이야, 긴장하는 게 좋을걸?"


나는 괜히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진작에 답을 정해놓았으므로 내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썸 같은 소리 하네."


나는 더 말을 길게 할 필요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랐던 그녀도 금방 내 목에 팔을 감아 올렸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입을 맞추었다. 그건 어젯밤과는 다른, 내가 전혀 참지 않아도 되는 그런 키스였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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