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몇 시간을 잔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눈도 잘 떠지지 않아서 그냥 계속 침대에서 뒤척였다. 몸이 너무 무겁다. 아무래도 열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엎드린 채 팔만 뻗어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협탁에 대충 던져놨던 휴대폰을 찾아 충전기에 연결하자 전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곧 진동을 웅웅 울려대었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핸드폰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전화기 왜 꺼져 있어? 엄마가 너 한약 먹는지 체크하래] [강우진 어디야? 너 오늘 비번 아냐?] [경위님 요청하신 서류 올려놨습니다] [야 뭔데 핸드폰 계속 꺼져 있어! 무슨 일 있어?]
여러 개의 메시지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고, 그중 대부분은 민유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대충 던져두었다.
이대로 정말 그녀와 끝나 버리는 걸까? 되돌리려면 더 늦어지기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민유정이었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문이 열리자마자 성질을 내더니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
"뭐야, 너 어디 아퍼?"
유정이는 손을 뻗어 내 이마에 자기 손을 가져다 대려 했고 나는 그런 유정이의 손을 치웠다.
"아니야. 방금 일어나서 그래. 왜 왔어."
내가 그녀를 현관에 세워둔 채 비키지 않자 그녀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반찬. 엄마가 요즘 너 말랐다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너 헤어졌어?"
진짜 얘는 귀신인가. 어떻게 이렇게 촉이 좋은 건지 진짜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잘할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싫어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울었어?!"
"아이씨. 아니야!"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때마침 건넛집에서 나오던 사람이 그녀와 나를 보았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였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그런 내 뒤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쫑알대었다.
"니가 차인 거야?! 왜!? 정진영 그게 좀 유명해졌다고 이제 헤어지재!?"
나는 이를 악물었다. 헤어진 와중에도 그녀의 험담은 듣고 싶지가 않다.
"야, 너 시끄러. 가. 머리 울려."
내가 도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밀어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너무 그렇게 퍼주면 질려한다고 했지! 너만 또 병신 된 거야. 허우대는 멀쩡해서 왜 맨날 걔한테는 호구가 되는 거야? 아, 걔 혹시 딴 놈 생긴 거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해!"
나는 그녀의 말이 듣기 싫어 일어나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진영이를 그 집에 혼자 두고 온 건 나다. 어젯밤 그녀의 울음소리가 생각나자 죄바카라감이 들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민유정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야!! 나와서 밥 먹고 자! 내가 널 몰라!? 너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아, 좀 꺼지라고!! 냅둬 내가 알아서 하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내 이불을 걷어냈다.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고 베개를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질렀다. 진짜 간절히 혼자 있고 싶은데 얘는 나를 혼자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와서 밥 먹어."
내가 지랄을 하든 말든 민유정은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걷어낸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민유정은 포기를 모르고 다시 이불을 걷어냈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버렸다. 그리고 얼굴을 아예 파묻어버렸다.
"싫어!! 안 먹는다고!!"
진짜 간절히 혼자 있고 싶다. 제발 날 좀 그냥 가만히 뒀으면 좋겠다.
"일어나."
민유정은 기어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얘는 내가 밥을 먹는 꼴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 집에 갈 인간이 아니다. 나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민유정을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거실을 향해 까딱할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내가 식탁에 앉자, 익숙하게 내 찬장에서 햇반을 꺼내 데웠다. 나는 만사가 귀찮아서 식탁에 얼굴을 대고 누웠다. 식탁의 차가운 냉기가 마음에 들었다.
"야, 일어나서 일단 먹어."
얼마나 그러고 엎어져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몸을 일으켜보니 이미 민유정이 밥상을 다 차린 뒤였다. 아줌마가 해주신 듯한 반찬들과 찌개가 눈에 보였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다 먹을 때까지 노려보고 있을 것이 뻔하니 어쩔 수 없이 한 술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은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 게 우스웠다. 그녀는 뭘 좀 챙겨 먹었을까?
"너 잠깐 먹고 있어. 약 좀 사 올 테니까."
민유정은 내가 밥을 먹는 걸 확인하고는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내 이마를 짚어보지 않고도 내가 지금 열이 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그녀는 날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약국에 다녀온 후, 그녀는 더 이상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그저 남은 반찬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내가 여기저기 흩어놓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냥 내버려 두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약기운 때문인지 몸이 가라앉았고, 말을 할 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그냥 놔버렸다.
"굳이? 지금 자고 있는데? 약 먹고 뻗었어."
민유정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몸이 가벼운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건 내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는 민유정이었다.
"... 너 뭐 해?"
민유정은 나를 돌아보았다.
"일어났네. 바꿔줄까?"
나는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까 간절히 원했을 땐 빗나가더니... 하필 이번에만 내 예감이 적중해버렸다.
"... 진영아."
내가 전화를 건네받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 나중에 다시 할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몰려오는 짜증을 참기가 어려웠다.
"... 너 미쳤어?"
나는 이를 갈았다.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전화가 계속 오니까 받은 거뿐인데?"
나는 주먹을 쥐었다. 잠시나마 내가 잊고 있었다. 이 새끼가 늘 이런 식이었다는 거. 눈치 빠른 녀석이 지금 자기가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몰라서 이랬을 리가 없다. 필시 고의였다.
나를 자기 영역에 두고 절대 멀리 가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소유욕은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구랑 사귀든 조금 진지해진다 싶으면 방해하기 일쑤였다. 계속 간을 보면서 선을 적당히 지키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일 때 이렇게 선을 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나를 좋아해서 질투하는 영역이 아니다. 이 새끼는 그냥 정신병자다.
그럼에도 그런 그녀를 내치지 못하는 건 얘가 그냥 단순한 동창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화가 난다. 남자였으면 한 대 치기라도 했지. 진짜 이럴 때는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나는 얘한테 장단 맞춰줄 시간이 없었다.
평소에도 민유정을 계속 신경 쓰곤 했던 그녀였다. 지금은 한 시라도 빨리 진영이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끝을 내더라도, 이런 식으론 아니었다.
나는 잠바를 꺼내 입었다. 내가 차 키까지 챙겨 들고 신발을 신자 민유정이 다급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너 지금 운전하려고!? 열이 그렇게 나서 약까지 먹어놓고?!"
나는 팔을 뿌리쳤다. 대답하는 대신 이를 악물고 그녀를 한 번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온 건 결국 내 탓이었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자는 바람에 전화를 못 받은 죄지.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민유정을 놔둔 채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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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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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넘었고 그녀는 저녁 씬 촬영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샵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통화 목록을 뒤져 박윤진 번호를 찾았다. 동창회에서 전화번호를 받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혹시 오수빈 번호 알아?"
"어? 오수빈? 잠시만..."
다짜고짜 남의 전화번호를 묻는 내 말에 박윤진은 약간 의아한 듯했으나, 다행히도 그녀는 문자로 오수빈의 연락처를 남겨주겠다고 했다.
나는 전달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얼핏 그녀가 다니는 샵에서 오수빈이 근무한다는 걸 들었던 것이 기억나서였다. 나는 혹시나 전화 연결이 안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네~ 예니하우스 오수빈 실장입니다~"
"오수빈, 나 강우진인데"
"어? 윤재?"
"혹시 진영이 거기 있어?!"
나는 나와 진영이 사이를 오수빈이 아는지 모르는지를 따져볼 새도 없이 그녀의 행방부터 물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녀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 오긴 했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 내 전화를 안 받아서 그런데... 진짜 미안한데 혹시 좀 바꿔줄 순 없을까?"
"... 아 그게... 음. 잠시만."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휴대폰의 음소거를 눌렀다. 나는 연결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잠깐의 시간이 영겁 같았다.
"저, 어쩌지... 진영이가 지금은 안 받고 싶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오수빈이 내 눈치를 살폈다.
"... 지금은 좀 타이밍이 안 좋은 거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걸어볼래? 나도 잘 얘기해 볼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응 고마워. 미안해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아냐, 진영이가 지금 좀..."
오수빈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급히 입을 닫았다.
"아무튼, 나중에 다시 직접 연락해 봐. 알겠지? 끊을게?"
나는 통화 연결이 끊어진 후에도 한참 동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없는 빈 집의 담벼락에 기대 몸을 스르륵 주저앉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나의 행동이 떠오르며 목이 답답하게 조여옴을 느꼈다.
후회가 밀려들어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냥 조금만 더 참을걸. 그랬으면 어쩌면 오늘 그냥 행복하게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기분 좋게 촬영장으로 보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내가 어제 두서없이 그냥 뱉어버렸던 '헤어지자'는 말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차에 올라탔지만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핸들에 고개를 처박았다.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용서가 되지 않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후회와 고통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다. 연말에 그녀가 함께 가보고 싶다고 해서 미리 대기를 걸어두었던 레스토랑에서 연락도 왔지만, 갈 수 없었다. 결국 해가 넘어갔고, 우린 그렇게 제대로 마침표도 찍지 못한 채 이별을 맞이했다.
그 후로 나는 집에서 TV를 잘 안 틀어놓게 되었다. 우연히 듣게 되는 그녀의 소식들이 자꾸 나를 찔러서였다. 어쩌다 포털사이트 헤드라인에 그녀의 이름이 보일 때면 빨리 스크롤을 내려버리거나 창을 닫아버리곤 했다. 내가 없이도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그녀의 생일 즈음에는 더 힘들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게 그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는지 계산도 하지 않고 살던 어느 날, 이제 제법 쌀쌀해진 날씨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계절에,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네, 마포서 강력 1팀 강우진입니다."
"...여. 강윤재. 잘 지내고 있나 보네?"
낯익은 목소리... 전화기를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김기태..."
나는 이를 갈았다. 나를 '윤재'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내가 누군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네가 어떻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는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한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안에서 진짜 반성을 많이 했거든. 덕분에 좀 일찍 나왔지."
아직 형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나왔다고? 나는 그가 수감되었던 시간과 형량 등을 머릿속에서 계산하며 가석방 가능 여부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가 구속된 건 2023년 6월... 그리고 지금은 2025년 10월. 형량은 구속 시점부터 형기에 포함되는 것이니 지금은 대략적으로 1/3 정도를 복역한 셈이었다.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녀석이 출소한 거다.
"와, 근데 나를 잡아 처넣은 게 너일 줄 상상이나 했겠어? 킥... 씨발... 뭐 그래도 고생은 좀 했지만, 네 덕분에 내 무료한 삶에 목표가 생겼지 뭐야."
비릿한 그의 말투에서는 어쩐지 조롱이 느껴졌다.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는 거야."
"나? 이제 사고 안 쳐. 착하게 살아야지. 근데 그 사고라는 게 꼭 일부러 쳐야 나는 건 아니더라고? 그러니까 너도 몸조심 좀 해."
"너 이 새끼..."
나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을 참기 어려웠다. 김기태는 지금 이 통화가 녹취가 된다는 걸 잘 아는 듯 선을 넘지 않으며 나를 자극했다. 그는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아 참, 너희들 작년 동창회 때 다 모였다며? 하, 너무 부럽더라고? 나도 그때 그 안에 있는 거만 아니면 갔을 텐데. 큭... "
나는 이를 갈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진영도 잘 지낸다며."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협박이 아주 잘 먹힌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디야, 지금."
"걱정 마. 안달내지 않아도 조만간 우리는 만나게 될 거니까. 그전에 나는 할 일을 좀 먼저 해야지."
"할 일?"
"...그럼 그때까지 잘 지내든지."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김기태가 우리 중 누군가와 소통을 했다. 그 사실에 내 온몸의 세포가 경고를 울려댔다.
<김기태가 진영이를 노릴거야.>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고민할 새도 없이 아직 단축번호 1번에 저장되어 있는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예상대로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메시지를 남기려다가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김기태가 출소했다고 말해주는 게 진영이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괜히 더 불안하게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는 이 똑같은 고민을 그녀가 처음 김기태를 잡았을 때도 했었더랬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잡아넣은 사람이 김기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성급하게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나는 결국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한 마음에 복도를 서성이며 마른세수만 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
지나가다 나를 발견한 효범이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 김기태가 나왔는데..."
"예에?! 벌써요!? 아니 너무 빠른데?... 아 하긴 지금 10월이니까..."
그는 잠시 하늘을 보며 날짜를 계산하는 듯했다. 나는 효범이의 팔을 붙잡았다.
"효범아. 진영이가 위험해."
효범이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벅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효범이를 끌고 흡연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의 일들을 간략하게 효범이에게 설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일도 이야기해야 했다. 우리가 동창이라는 것, 그리고 김기태가 그녀를 알고 있다는 것.
이미 내가 그녀를 만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그는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전혀 놀라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역시 그런 거였군요."
"뭐?"
"사귀다 헤어지신 거죠? 그분이랑. 하고 다니는 꼴 봐서는 차인 거 같은데."
그는 덤덤하게 내 아픈 곳을 찔렀다.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어쨌든 지금 헤어진 마당이라 직접 경고하긴 어려우실 거 아니에요."
나는 그의 말에 반박을 못했고, 그는 골똘히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그분 회사에 알리시죠?"
나는 효범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맞아. 걔는 지켜줄 회사가 있지.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회사 매니저 번호 알아요?"
나는 효범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오수빈이 떠올랐다.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오수빈의 번호를 찾다가 멈추고 급히 그를 쳐다보았다.
"경위님이랑 그분 사이는 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를 알고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을 했다.
"고맙다."
나는 서둘러 오수빈의 연락처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녀에게 김기태가 출소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진영이 매니저 번호를 받아내기 위한 핑계를 고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행여나 내가 미련이 넘치는 전 남자 친구로서 사적으로 연락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아야 했고, 김기태가 나와서 진영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피해야 했다.
결국 나는 경찰 업무와 관련해 소속사 측에 확인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대며 그녀에게서 매니저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으므로 말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진영이에게 내가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나는 오수빈에게 진영이는 요즘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수빈을 통해 그녀에게 찌질한 전 남자 친구의 행태를 들킬까 봐 겁이 나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내 궁금증 따위보다,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더 시급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나는 예전에 한 번 잠깐 본 적이 있던 그녀의 매니저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서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김기태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이고, 정진영 씨한테 접근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는 사진을 받으며 한 번 들여다보고는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쩐지 대충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 저희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속이 탔다.
"이게 제가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는 거 아는데요. 그 범인이 사실은..."
그는 내가 김기태의 정체를 말하기도 전에 내 말을 잘랐다.
"예, 뭐 제가 잘 알아서 할 테니 형사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묘하게 불편했다. 그는 내가 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
"하실 말씀 끝나신 거죠? 저는 멤버들 다음 스케줄 이동이 있어서요."
나는 같이 일어나 그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네. 저 그... 정진영 씨 집 근처가 좀 어둡던데..."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주 작게 피식 웃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행동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인사에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한 번 지었다. 대놓고 저렇게 적대감을 풍기는 이유가 뭘까. 내가 뭔가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저기요, 강우진 형사님. 제가 진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때문에 진영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르시죠. 트렉스고 뭐고 다 관두겠다고... 하... 그것 때문에 저희가 몇 달을 고생했는지 아세요?"
나는 그의 말에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이제 와서 이상한 핑계 대면서 걱정하는 척하지 마시고, 괜히 이런 핑계로 진영이 근처에서 기웃댈 생각 하지 마십시오. 뭐가 되었든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그는 나를 냉소적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별 후 나만 힘들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진영이도 힘들어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조여와 숨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핑계 같지만, 내가 그녀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선택했던 이별이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이 오히려 그녀의 꿈을 방해할 뻔했다. 그 이별은 그녀를 위해서였다며 스스로를 속이던 내 명분은 그의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결국 그녀에게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었을 뿐이었다.
그날 나는 그녀와 헤어진 뒤로 처음 눈물을 흘렸다.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먹을 쥔 채 숨을 죽여야 했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보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공개된 장소에서 울어버렸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발 그들이 진영이를 잘 지켜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