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의 상처, 마음의 흉터
생각해 본다. 회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회복 중이라고 하는 것은 회복하는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중‘이란 표현은 현재 진행형이다. 회복된 상태와 회복되지 않은 상태를 나누는 것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것이 과연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다시 나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쨍쨍한 햇빛이 강렬한 여름날,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쿵하고 넘어졌다. ’걸음마하는 꼬맹이도 아닌데, 내 나이가 몇 살이야. 왜 이렇게 넘어지고 그러지?‘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쳤다.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무릎의 피부 표피가 벗겨지고 500원 동전보다 조금 더 큰 상처 위로 피가 났다. 그다음엔 그곳에 흑갈색의 딱지가 앉고, 다시 시간이 지나면 그 딱지가 떨어져서 새 살이 돋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딱지가 되지 않고 그 상처 부위가 하얗게 부풀어 오르더니, 노란 진물이 흘렀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처가 더 깊었는데 난 몰랐다. 그 깊은 상처를 그저 단순히 껍질이 벗겨지고 새살이 돋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던 것이다. 부지런히 소독해 주며, 관리를 잘해 주었어야 하는데 안일했던 나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리하며 예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반대로 무던하고 둥글둥글하다고 표현하면서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같은 상처라도 자기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때론 쿨하게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툭툭 털고 일어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고, 때론 ‘어머나, 소중한 나를 더 아껴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돌보는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늘 그런 사람이 된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난 어떤 선택을 많이 할까? 자기 자신을 알고 들여다보며 아는 것이 필요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상처가 덧났다. 열흘이면 나을 상처가 한 달이 되도록 완쾌되지 않고 고생을 했던 무릎의 상처를 떠올려본다. 뿐만 아니라 까맣게 그 흉터 자국이 선명해졌다. 살짝 딱지가 앉고 떨어져 나갔으면 이 정도로 큰 흉터가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까맣게 죽어버린 피부의 흉터 자국이 내 마음을 더 까맣게 아프게 한다. 처음엔 상처 난 부위가 쓰라리고 아팠는데, 지금은 흉터를 보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순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처음 상처가 났을 때, 나를 조금 더 세심하게 돌보고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했음에도 상처가 남았다면, 그 상처에 대해서는 살면서 이런 것 하나쯤은 괜찮다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난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처음에는 그 상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고, 지나고 난 이후의 그 상처를 보면서 다시금 더 아파하는 마음으로 나를 더 아프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삶의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처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지금까지의 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내 상처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져서 둥글둥글하다는 평가를 받고 살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그렇게 둥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내 흉터를 보며 내 마음이 더 시리고 아픈 것을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좋은 사람‘,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기 위해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보고, 곱씹으며 아파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흉터가 짙게 남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경험해보지 않고서 알면 좋겠지만, 경험 후 깨닫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면 된다.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소독을 해주고, 나 자신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그 상처를 보며 나 스스로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안아주면 된다. 그로 인해 내가 얻은 것이 있으니, 맞교환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회복이라는 것의 정의를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생긴 흉터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흉터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것이 회복이 아닐까? 흉터가 있는 무릎을 보면서도 더 이상 따갑지 않고, 그 흉터가 내 삶에 주는 의미를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회복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