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지금 어때?

묻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나도 몰랐어

by새로미

“요즘은 좀 어때?”


이 질문을 들으면 잠시 멈칫한다.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여전히 힘들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떤 날은 괜찮은 것 같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몸이 무거워진다. 그러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고,


“아직 힘들어요.”


라고 말하고 나면 또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아픔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고, 그 순간 아픔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지금은 어떤지 설명하는 것조차 때론 힘겹다.

죽을병도 아닌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 정도면 이제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 어쩌면 그런 시선에 초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또다시 탓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모르는 것은 따로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묻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나도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대답을 생각하는 것조차 내게는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관심이라고 말하지만, 그 관심 안에 무심함이나 무례함이 섞여 있을 때도 있다. 안부를 묻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불필요한 질문을 건넨 적은 없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의 안부 속에서 무례함을 느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토록 타인의 시선과 말 한마디에 에너지를 쓰고 흔들릴까? 이 피로감의 실체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중용‘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절함”이라고 표현한다. 비겁하지도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 용기처럼, 상황에 따른 적절함은 늘 같은 것이 아니다. 때로는 물러서는 것이 용기이고, 때로는 돌격하는 것이 용기인 것이다.


나는 이런 적절함을 갖추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때로는 모른 척해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해 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 적절함을 알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는 만큼의 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적절한 상태가 무엇인지 아는 “실천적 지혜”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적절함을 알아야 실천할 수 있기에 삶 속에서의 적절함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적절함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나의 아픔은 이런 삶의 태도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타인을 배려하고, 무엇이 적절한지 고민하며 에너지를 지나치게 쓰고 살아온 시간이 지금의 나를 지치게 한 것은 아닐까. 타인을 배려하는 만큼 나 자신에게도 그 적절함을 적용하고 있었을까.


묻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내가 묻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로 인해 타인이 아파하거나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걸까? 혹시 나는 나를 보호하는 것조차도 타인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묻지 말라고 말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라고 한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을 고려하는 적절함 속에 정작 나 자신에 대한 고려는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 다르게 해 보아야겠다.


묻지 말라고 하는 대신,

내가 나에게 먼저 물어보는 연습을 해보자.


지금 나는 어떤지.

무엇이 힘든지.

무엇이 필요한지.


중용의 적절함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지.


타인을 배려하느라 정작 나를 빠뜨리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이제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나에게도 건네보자.


“너는 지금 어때?”


어쩌면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질문은

다른 사람의 질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건네는 이 한마디였는지도 모르겠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