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면 적어도 시험에서는 해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공군 훈련소에 입소하자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입대한 동기는 1,600명. 원하는 특기와 자대에 배치받기 위해서는 적성검사와 필기시험, 수행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군대에 왔는데 또 입시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8주 동안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행정병 특기를 받았고, 운도 따라주어 집에서 버스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부대에 배치되었다.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육·해·공군이 함께 근무하는 부대였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두세 살 어린 선임들도 있었다.
자라온 환경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랐다. 때로는 괴롭힘과 얼차려를 겪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성적을 잘 받는다고 해서 모든 곳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이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군대에서는 계급이 먼저였다.
그 낯선 질서 속에서 오히려 뒤처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상병이 된 뒤부터 군 생활에는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정기적으로 외박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생기자 또다시 다음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이미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들도 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제대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
교환학생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병장이 되어서는 토플을 준비했고, 말년 휴가 때는 새벽반 학원에 다녔다. 아직 군복을 완전히 벗지도 않았는데 다음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복학 후 마주한 대학은 입대 전과 달랐다.
3학년이 되면서 전공 필수와 심화 과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과학고를 준비할 때, 외고에서 이과 공부를 할 때, 대학 2학년 때 느꼈던 벽이 다시 나타났다.
밤을 새워 과제를 붙잡고 있어도 끝내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복학생이 되니 함께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해결하던 친구들도 예전 같지 않았다. 어려운 공부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전공을 살려 취업할 수 있을까.
공대에서는 다른 분야를 복수 전공하기보다 전공을 깊이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미 3학년이 된 상황에서 방향을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은 채 4학년 때 미국으로 향했다.
교환학생을 시작하기 전, 뉴저지에 있는 한 회사의 미국 법인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뉴욕 맨해튼과 가까운 곳이었다.
해외여행은 해봤지만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기대와 달랐다.
언어가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지인과 교포 동료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소수자가 된 듯한 서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큰 시장과 빠르게 움직이는 새로운 흐름을 직접 마주했다.
그동안 익숙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실감했다.
이후 시작된 교환학생 생활에서도 전공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미국은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편리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리는 좋은 순간들을 가족과 친구들 없이 혼자 경험하는 일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특히 두 번째 학기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넓은 세상에 나가면 무조건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은 장소만 바꾼다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귀국을 앞두고는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정유사 하계 인턴에 지원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기업 인적성검사 문제집을 구해 풀었다.
시험 일정이 예상보다 앞당겨졌다.
수요일에 미국에서 기말고사를 마치고 곧바로 출국했다. 금요일에 한국에 도착해 토요일에 인적성검사를 봤다.
돌이켜보면 참 바쁘게 살았다.
군대에서는 교환학생을 준비했고, 교환학생을 가서는 인턴을 경험했으며, 귀국을 앞두고는 다시 취업을 준비했다.
한 단계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단계를 향해 달렸다.
그 덕분에 많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도 늘 함께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군대에서는 통제된 생활을 했고, 미국에서는 낯선 환경 속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했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다음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목적지는 때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 선택의 출발점에는 남들보다 늦어지면 안 된다는 불안이 있었다.
목표를 이루는 데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왜 이루고 싶은지 충분히 생각하는 데에는 서툴렀다.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렸지만, 정작 그곳에 가고 싶은 이유는 자주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