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지의 경로] 12화
아침이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어젯밤에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쳤다.
“과연 내가 주식으로 큰돈을 벌 수는 있을까?”
“큰돈은 고사하고 생활비라도 벌 수 있을까?”
유튜브에서 큰돈을 벌었다며 자랑하던 투자가들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2억 원으로 1년에 20억 원 넘게 벌었다는 데이트레이더.
몇 년간 장기 투자로 20억 원대에서 500억 원대 자산가가 되었다는 장기 투자가.
올해 상반기 시장이 급등하자, 너도나도 큰돈을 벌었다는 일반인 이야기까지 꼬리를 물었다.
“너 주식 한다며! 재미 좀 봤겠네!”
“돈 많이 벌었지? 요새 시장 좋던데!”
아니라고!! 잃었다고!!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매번 얼렁뚱땅 대답으로 얼버무려야 했다.
괜히 동네방네 주식 투자한다고 말하고 다녔나 보다.
후회막급이었다.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노가다 자리나 알아보고 있다고 했어야 했나 보다. 불세출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한때 철학을 때려치우고 건축판까지 기웃거렸다는데, 내가 노가다 자리 좀 알아본다는 게 뭐 대수냐.
아, 나는 하루도 못 버티고 잘릴 저질 체력이라 아무도 그 말은 안 믿었겠구나.
3년 전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적당히만 벌어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 내용보다 누가 어떻게 얼마 벌었다 이런 얘기만 자꾸 귀에 들어왔다. 적당히 소소하게 버는 사람은 투자가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
그때부터 크게 잃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확언도 하기 시작했었다.
"내게는 이미 100억이 있다!"
몇 주 전부터는 아침 확언을 아예 그만뒀다.
"내게는 이미 100억이 있다"
"50억만 있어도 좋다."
"20~30억만 돼도 만족이다."
"10억만이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아니 확언인데, 그래도 100억이다!"
숫자만 자꾸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목표를 세우는 건지 공포를 세우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냥 치워버렸다.
"3개월 후에는 진짜... 어떻게 될까? 주식을 계속 하긴 해야겠지...?"
어수선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굿모닝, 새가슴!"
웬일이냐.
별일도 없는데 아침부터 하느님이 나타났다.
"너 어제 속 안 좋았냐? 밤새 끙끙대던데."
"속 안 좋죠. 주식을 계속 해야 할지, 도대체 얼마를 벌겠다고 목표를 세워야 할지... 세운다고 그게 제 마음대로 되기는 하는 걸지... 쓸데없는 생각만 하다 새벽까지 잠 못 자고 끙끙대긴 했죠."
"아... 고민하는 거였냐? 나는 하도 끙끙대길래 똥이 안 나와서 힘 주나 보다 했지. 너 변비도 있는 거 맞지? 그러니까 야채도 좀 챙겨 먹어라. 맨날 고기만 먹지 말고!"
"아침부터 똥 얘기예요!"
"그래서 목표가 얼만데? 흐흐."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요새 확언하는 사람들은 막 1,000억이 목표라네요. 저는 100억으로 세웠었는데, 어느 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생각이 또 들더라고요. 근데 목표를 줄이면 또 그거 갖다가 누구 코에 붙이냐? 이런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진짜 모르겠어요. 그래도 돈은 벌고 싶어요."
"하여간 이놈의 자식은 제가 뭘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른다니까? 네가 정확히 얼마를 원하는지 한번 알아보고 싶냐?"
"그걸... 알 수가 있나요? "
"당연히 알 수 있지!"
"알고 싶죠! 목표부터 헷갈려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요."
"그럼 따라와라.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우와!! 혹시 하느님 사무실이에요?"
엄청나게 큰 방에는 달랑 바카라상 하나 소파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근데 사무실이 왜 이렇게 휑해요?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요? 일은 하시는 거 맞아요? 컴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여기는 내가 가끔 오는 연락 사무소일 뿐이다. 진짜 사무실은 저 위에 있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어쩐지... 근데 여기는 왜 왔어요?"
"잠깐 있어봐라."
구석에서 뭘 들고 온다.
"그게 뭐예요? 어? 법정 드라마에 한 번씩 나오는 디케의 저울같이 생겼네요? 응? 근데 가운데 조각상은 디케가 아니라... 뭐지? 좀 흉측하게 생겼는데? 얼굴도 반쪽이 나눠져 있네요? 아수라 백작인가? 어, 저울에 의자도 달려있네요?"
"여윽시, 무식한 놈! 아수라 백작이 아니라 야누스다 인마! 이건 욕망과 공포의 저울이다. 욕망이 커지면 욕망 쪽 저울이 내려가고, 공포가 커지면 공포 쪽 저울이 내려간다."
"우와? 이런 저울도 있어요?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욕망과 공포라, 왠지 멋진데요?"
"뭐냐? 너 주식 했다고 그러지 않았냐? 공포 탐욕 지수도 모르냐? 욕망과 공포가 그것과 똑같은 거 아니냐!"
"공포 탐욕 지수는 당연히 알거든요! 근데 누가 그거 보고 투자하나요? 그런 게 있구나 하는 거지."
"안다고? 절대 못 믿겠네."
하느님이 혀를 끌끌 차며 저울 세팅을 마쳤다.
"자, 이제 저울 의자에 앉아봐라."
"네? 저울 의자에요?"
"그래. 얼른 앉아 보라니깐.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작업을 할 거다."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하느님이 해보라고 시킨 것 중에 끝이 이상하지 않았던 건 한 번도 없었다.
뭐든 해보라고 시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굳이... 뭘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울 구경은 잘했네요. 하느님, 이제 저울도 봤으니 그냥 가시죠?"
"이거 너한테 엄청 도움 되는 건데 안 한다고?"
하느님이 나를 걱정해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안 된다.
저 눈빛은 거짓이다.
속으면 안 된다!
"이게 저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세요. 그냥 저울이구먼. 무슨 천당 지옥 판결하는 저울이에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저울질을 왜 미리 하세요.
전, 안 할래요."
딱 잘라 말하길 너무 잘했다.
내 말이 맞지.
아직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왜 저울질이냐? 어떤 결과가 나와도 찝찝해질 텐데.
'천국' 나와도 앞으로 계속 착하게 살 수 있을지 자신 없고, '지옥' 나오면 그냥 포기하고 더 막 살 것 같은데 그걸 왜 한단 말이냐. 내가 미쳤냐?
"안 할 거라고요!" 거듭 강조했다.
"음... 이걸 왜 안 하려고 그러지? 이걸 해보면 네가 원하는 목표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그게 100억인지, 50억인지, 심지어 1,000억인지. 아님 꼴랑 1~2억일 수도 있고."
잠깐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계속 말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억지로는 안 시킨다. 한 번만 하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다 안 된다고 거절했다. 너만 특별히 기회 주려고 했는데... 뭐, 본인이 싫다면..." 그러면서 저울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응?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저울이 아니었어?
"앗, 잠깐만요! 잠깐만요, 하느님."
"왜? 안 한다며?"
"그게 아니라... 이거 천국 가냐 지옥 가냐를 가르는 심판 저울 아니었어요?"
"얌마! 내가 너한테 분명히 욕망과 공포의 저울이라고 말하지 않았냐. 너는 귀를, 아니 머리를 진짜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욕망과 공포의 저울이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이게 어떻게 심판의 저울이냐!" 하느님이 소리를 질렀다.
"어우 깜짝이야. 처음 보는 거니까 잘 모를 수도 있지 뭘 소리까지 질러요? 알았어요. 해볼게요. 그러니까 이 저울이 제 목표를 알려준다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 할게요." 그리고 하느님이 말릴 틈도 없이 저울 의자에 앉아버렸다.
"얌마, 그렇게 앉으면 안 돼... 해체하던 중이라 그럼 많이 흔들린다고!!" 하느님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저울은 이미 작동이 시작되었다.
저울 의자에 앉자마자 눈앞에 스크린이 나타났다. 스크린에서 숫자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아, 그 숫자가 내 목표 금액이었다.
내가 마음으로 금액을 세팅할 수 있었고 그 금액이 욕심스러운 금액이면 욕망의 저울이 밑으로 꿀렁 내려갔다. 그런데 그 돈을 잃으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바로 뒤를 따랐고, 그러면 공포의 저울이 꿀렁 내려가고 욕망의 저울은 다시 위로 솟구쳤다.
마치 시소처럼 양쪽 저울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아하! 이 요동을 멈추고 평행을 만드는 금액이 바로 나한테 맞는 목표 금액이구나!"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하느님은 맨날 나보고 머리 나쁘다고 놀리고. 에잇! 자기는 얼마나 머리가 좋다고.'
저울이 피융피융 위아래로 흔들려서 다시 저울에 집중했다.
숫자를 한번 세팅하면 그 숫자 뒤에 숨어있는 내 생각과 믿음들을 스크린에서 아주 자세히 보여줬다.
나도 잘 몰랐던 내 숨겨진 생각들이었다. 그것들로 욕망과 공포의 정도를 가늠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숨겨진 생각들이... 실시간으로 끝없이 생성되면서 저울의 흔들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00억 정도의 금액이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0억을 세팅하자마자 이어지는 생각과 마음들이 등장하면서, 바로 저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최초 세팅: 100억
욕망: 현 생활 패턴 및 남은 기대 수명 대비 과한 금액. 욕심.
'욕망 저울' 밑으로!
공포: 100억이 있어도 주식으로 갖고 있다가 갑자기 주식 시장 붕괴되면 반토막 나서 50억 될 수도 있음. 금융위기 때처럼 -80% 되면 달랑 20억만 남음. 무서움.
'공포 저울' 밑으로!
욕망: 그걸 감안하면 목표를 200억으로 높이고 싶음. 욕심.
'욕망 저울' 밑으로!
공포: 갑자기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200억이 20억 가치로 떨어질지도 모름. 20년 전 쯤엔 10억이 부자를 상징하는 액수였으니 말이 되는 시나리오임. 무서움.
'공포 저울' 밑으로!
욕망: 인플레이션까지 생각하면 1,000억 부자 확언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님! 그래서 요샌 100억도 껌으로 보는 것임. 그럼 목표를 1,000억으로 높이고 싶음 . 극단적 욕심.
'욕망 저울' 크게 밑으로!
공포: 1,000억이 무슨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내가 지금 이걸 맞게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음. 이런 목표 찾기 자체가 미친 짓 같고 이런다고 돈이 생길 것 같지도 않음. 그냥 20억만이라도 확실하게 생기면 좋겠음. 무서움과 불신.
'공포 저울' 크게 밑으로!
욕망: 그렇지만 20억이면, 갑자기 크게 아프거나 희귀병에 걸리면 병원비, 간병인비로 다 갖다 바치고 다시 알거지로 전락할지도 모름! 이건 너무 부족해 보임! 최소 50억은 돼야함. 근데 안 아프면 50억도 과해보이긴 함. 욕심.
'욕망 저울' 밑으로!
그러다 아프면 어떡하라고!
돈을 떠나서 생각만 해도 끔찍해!
무서움.
'공포 저울'도 밑으로!
'욕망 저울'과 '공포 저울'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가려고 요동을 치면서 저울의 균형이 깨져버렸다.
공포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면서 '공포 저울'은 한없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 모든 공포를 극복하려고 목표를 계속 높이다 보니 목표는 1조까지 올라갔고 '욕망 저울'도 한없이 밑으로 내려갔다.
저울축이 반달처럼 휘어서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부하를 견디지 못한 저울 전체가 덜그럭덜그럭 떨리고 있었다. 떨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세지면서 사무실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왔다.
"으악! 하느님! 이거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이봐요! 거기! 당장 멈춰요!"
멀리서 아득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악귀와 아귀들에게 온몸과 정신을 점령당한 듯, 두 눈은 뒤집혀서 흰자가 보였고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차라리 심판의 저울을 할 걸... 으으으으으... 이거야말로 끝나지 않는 지옥 같다... 젠장 또 속았어! 저놈의 영감탱이!'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다시 욕망과 공포가 번갈아 가며 흔들어대는 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으으으으윽!"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지이이이이이이이이잉"
흔들림이 약해지고 있었다.
깊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됐고 배가 쿡쿡 쑤시고 아팠다.
똥이 마려웠다. 이 타임에 똥이 마렵다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더니 깔깔깔 웃고 있는 하느님 옆에 멀쩡하게 생긴 한 사람이 보였다.
"저기... 선생님... 제가... 살아 있는 건가요? 살려... 주세요... 선생님."
부르터진 입술을 달싹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손으로 내 눈동자를 까서 보더니 안심시키는 말투로 말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여기 좀 편하게 누우세요"
그는 저울 의자에서 나를 떼내어서 소파에 눕혔다.
잠깐 누워 있었더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느님! 정말 너무 하시네요. 이렇게 사람을 골탕 먹여도 돼요?"
"푸하하하하!" 하느님은 아직도 웃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내가... 큭큭... 뭐가 나쁘냐... 푸하하... 난 그냥 기회를... 줬을 뿐인데... 큭큭큭... 아, 웃겨. 역시... 넌..."
"무슨 기회요! 숫자만 왔다리 갔다리 하느라 목표도 못 찾고 귀신 같은 생각들에게 빙의당해서 죽을 뻔 했잖아요!! 이 저울 망가진 거잖아요!"
"저울은 멀쩡합니다."
웃느라 말도 못하는 하느님 대신 아까 그 사람이 말했다.
"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면 저는 오늘 인생 하직할 뻔 했네요. 근데, 누구...?"
"저는 하느님의 수행 천사입니다."
"아? 수행천사요? 그럼 비서실장 같은 건가요? 어휴, 반갑습니다." 일어나 앉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가만히 누워 계세요."
"네. 죄송합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이분하고는 말이 좀 통할 것 같았다.
이분에게 질문을 하면 되겠구나.
"근데요, 저울이 멀쩡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왜 이렇게 된 건가요?"
"그게, 어떤 사람이든 다 선생님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욕망과 공포를 극복하고 명확한 숫자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수행천사가 측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숫자 목표를 세우는 건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다들 그런 목표를 세우고 자랑하고 다니던데요..."
"지금 저울로 체험하신 것처럼 깊게 들어가 보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뜻 보면 너무 명확한 목표 같지만 깊게 들어가면 끊임없이 흔들리는 목표죠."
"사실 그게 이해가 잘 안 됐어요. 너무 명확한 목표 같은데... 이렇게 고통스럽다니요."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수행천사가 조용히 읊었다.
"희망과 공포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합되어 있다. 같은 사슬이 죄수와 그를 지키는 병사를 묶듯, 희망과 공포는 함께 걸음을 맞춘다. 공포는 희망을 따라온다.
세네카라는 철학자가 남긴 말입니다."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욕망이 생기는 순간 공포도 같이 따라붙어요. 그런데 삶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잖아요. 게다가 우리의 감정은 실제 현실보다 훨씬 크게 난리를 치고요. 반면 목표 숫자는 고정값이죠. 숫자는 고정인데 삶과 감정이 계속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고정값에 집착하는 순간, 더 심하게 흔들린다고 느끼게 되는 거죠."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나는 100억을 원했던 게 아니라,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자리를 원했던 건지도 몰랐다.
"수행천사님! 혹시 전생에 철학자셨어요? 정말 현명하세요! 하느님도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주면 얼마나 좋아... 씨!"
"툴툴대는 거 보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구먼. 흠흠."
"하느님!! 정말!! 이 씨!!"
"뭐 인마. 너같이 머리 나쁜 애는 이렇게 몸으로 겪어야 깨닫지 내가 백날 얘기해도 못 알아듣지 않냐. 다 내가 너를 끔찍이 생각해서 그런 거다, 인마."
"아니 그냥 숫자 목표는 정할 수 없는 거니 쓰지 마라! 이렇게 말로 하면 될 걸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냐고요! 저 그렇게 바보 아니거든요?!"
"차라리 바보가 낫지. 숫자 목표를 쓰지 말라면 왜 안 써야 하냐며 1억부터 100억까지 1억 단위로 목표를 검증해 보겠다고 난리칠 놈 아니냐! 크크! 아니 천만 원 단위까지 헤집으려나? 흐흐!"
"아니라니까요!"
안쓰러웠는지 수행천사가 끼어들었다.
"확언 하시는 요청들은 저희 창조 천사들이 접수 받아서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창조 천사들은 소통법이 사람들하고는 다릅니다."
"네, 창조천사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창조천사들은... 숫자를 아예 못 읽습니다. 숫자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크고 작은 것, 이런 비교의 개념도 없습니다. 숫자나 비교나 모두 '틀'을 만들어서 생각하는 거잖아요?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만든 틀. 창조천사들은 그 틀 자체가 아예 없어서 이해를 못 합니다."
"1억이든, 1,000억이든 그거 만들어주는 천사들은 어차피 숫자를 못 읽어서 공염불이라는 뜻이다. 이제 알겠냐?" 하느님이 덧붙였다.
"잠깐만요! 그럼 숫자로 요청하면 어차피 무효처리라고요? 이런 중요한 얘기를 이제야 알려주신다고요?"
"아예 무효는 아니고 뭔가 전달은 되죠. 말 속에 숨은 요청들이요. 안도감, 풍요감, 자신감처럼 얻고자 하는 감정들이 확언에서 느껴지면 그 느낌을 더 크게 얻고 싶은 거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는 거죠."
역시 수행천사의 설명은 딱 떨어진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하느님이 말하지 말라고 잔뜩 눈치를 주는 게 보였으나 수행천사가 덧붙였다.
"창조천사들은 숫자는 모르고 '무한'의 개념만 있어요. 즉, 긍정의 에너지 방향이다 하면 그쪽 방향으로 무한히 창조를 이루어내는 거죠."
"그럼 얼마어치 이런 게 아니라 '부'를 무한히 만들어주세요! 하면 그건 알아먹는단 얘기네요?"
"그렇죠... 다만... 요청자가 중간에 공포를 느껴서 '부'가 줄어들 것 같아요 하면 그것도 요청으로 받아들여서 반대 방향으로, 즉 부를 없애는 쪽으로도 무한히 가는 거죠."
"아... 그러면 요청자의 생각과 감정 조절이 정말 중요..."
"야! 수행천사! 그만 말하라니깐! 넌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계속 떠드냐? 넌 인마 이제 가. 할 일 많잖아!"
"아,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수행천사를 힐끔 보더니 하느님이 외쳤다.
"잠깐! 수행천사야, 한 가지를 잊었다."
"네, 하느님" 수행천사가 다시 들어왔다.
"얘는 그냥 좀 쉬었다 가면 되냐? 별 부작용은 없는 거지?" 전혀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네, 잠깐 쉬다가 바로 일상생활에 복귀하면 됩니다. 다만..."
"다만 뭐냐?"
둘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배가 꾸르륵거렸다.
얘기하느라 아까 똥 마려웠던 걸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었다.
"다만... 1주일 정도 설사를 계속할 겁니다. 이 저울을 겪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1주일? 막... 쫙!쫙!?"
"네, 심하게 쫙!쫙! 다리가 덜덜! 후들거릴 정도로."
하느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지더니 곧 깔깔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박수를 치며 스카이 콩콩처럼 제자리 뛰기를 쿵 쿵 쿵 해댔다.
"거봐라! 얘, 얘! 나의 사랑이 진짜 감동적이지 않느냐!! 덕분에 네가 고생하던 변비가 싹 고쳐졌네! 이것이야말로 진짜 우주의 뜻! 아니겠냐!! 하!하!하!" 두 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밀려오는 급똥을 간신히 참느라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모기 소리만 나왔다.
"나 변비 아니라고!"
바로 사달이 날 것 같은 긴박감에 나도 모르게 기도인지 확언인지 모를 말이 마구 터져나왔다.
"하느님, 제발 설사 나오지 않게 멈춰주세요. 똥아, 너는 다시 몸속으로 들어간다. 똥이 몸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똥이 진정하고 몸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하느님 사무실이라 창조 천사들이 주변에서 실시간으로 들어주었나?
바로 좀 편해졌다. 긴박감은 사라졌다.
편안함도 잠시,
불안감이 솟구치면서 정신없이 혼잣말을 했다.
"잠깐만.
여기 천사들은 노빠꾸 무한대로 간다고?
그럼 내 똥은 이제...
계속 들어가기만 하는 거야?
으악! 똥독이 올라 죽는 건가?
다시 싸게 해달라고 할까?
끄으응...
그럼 또 무한대로 설사만 나오는 거야?
똥독이 올라 죽거나
설사병에 걸려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
제기랄!
...
아님 똥독과 설사병 사이를 미친 놈처럼 왔다리 갔다리 하다 죽거나...?"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다행히 인체는 위대했다.
빙하기를 살아남고 역병과 기근을 이기며 진화를 거듭해 온 인체는,
고작 천사들의 무한대 따위에 쉽사리 무릎 꿇지 않았다.
설사는 수행천사의 말대로 정확히 1주일 만에 멈췄다.
욕망과 공포의 사슬을 알고 났더니 마음도 한결 안정됐다.
다만 그땐 알지 못했다.
남은 3개월 동안
내 몸과 마음을 무한대로 흔드는 위협이
계속 줄줄이 찾아온다는 것을.
[다음 화 예고]
<호시탐탐 찾아오는 위협>
3장 [미지의 경로] 13화
하필이면 오랜만의 모임 날
극심한 위협을 마주하고
공포의 싱크홀로 빠져버린 새가슴.
버텨내야 하는 3개월의 시한은
아직도 한참 남았다.
하느님은 그 공포가 거짓이라고 말하지만
새가슴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과연 새가슴은
이 위협을 버텨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월 4일(일)에 발행되는
13화 <호시탐탐 찾아오는 위협>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