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미지의 경로] 11화
"어휴 주식이 무슨 하루에 700포인트씩이나 빠져. 무섭게 빠지더라고..."
어젯밤 통화 중에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벌었던 거 다 까먹었지 뭐야. 답답하네. 아휴. 기다리면 다시 올라가긴 하겠지? 근데. 너는 요새 주식을 아예 안 본다고? 안 궁금해? 궁금할 것 같은데."
"보면 흔들릴 것 같아서 당분간, 한 몇 달은 아예 안 보기로 했어요."
"그래도 궁금할 것 같은데. 대인배네, 대인배!"
대인배는 무슨. 소인배 중의 소인배다. 주식 시세는 물론이고 뉴스도, 유튜브도, 그 어떤 실시간 정보도 아예 안 보고 있으니까 버티는 거다.
뭔가를 보는 순간, 1999년 인류 멸망에 실패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공포의 대마왕이 다시 복직해서 내 마음속으로 내리꽂힐 것이다.
공포의 연쇄 확산 반응은 피했지만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욱신거림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렇게 눈 감고 버티는 게 맞나. 그렇다고 지금 팔 수도 없고. 현금이 0이니 살 수도 없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냥 우주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다. 이건 우주가 시킨 일이다.
우리 집 하느님이 아니라, 진짜 우주가.
벌써 한 달여 전에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는 이런 것이었다.
"앞으로 3개월만 죽지 말고, 살해당하지 말고, 버텨서 살아남아라. 그러면 너에게 큰돈이 올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스스로를 지옥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전업 투자의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갇히다 보니 조금만 투자가 안 풀려도 정신이 아뜩해졌다.
앞으로 밥이나 먹고살 수 있을까?
이러다 돈을 다 까먹으면 어쩌지?
설마 길거리에 나앉는 건 아니겠지?
이 세 문장을 건너오는 데에는 0.5초도 안 걸렸다.
매일 공포행 고속도로가 새로 뚫렸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게 운전대를 뺏기지 않으려 용을 쓰며 편도행 길을 내달렸다.
어젯밤에는 파란 해파리처럼 미끈거리는 악귀들이, 달리는 차에 떼거리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운전석 앞 창에 붙은 악귀는 허연 왕눈알을 희번덕거리면서 희죽댔다.
"네가... 크크크... 되겠냐? 너 같은 젬병이?
더 무서워해라! 네 공포가 너무 맛있다!!
쪽쪽 다 빨아먹어주마. 맛있는 인간아!"
"으아아아악!"
놀라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우주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됐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길밖에 없다고 "스스로 결심"한 다음 같았다. 당시 그 길이 맞냐고 우주에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다.
"우주시여, 저는 이제 어떤 길로 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자취를 감췄고, "나는 이 길을 가기로 했으니, 어떻게 하면 잘 갈 수 있을지만 가르쳐 주쇼."라는 요청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우주와의 대화는 놓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악귀들의 목소리만 잔뜩 들렸다.
아까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아하! 그렇다. 나는 지옥으로 파견된 언더커버였다. 연락바카라들은 하나씩 살해당했고, 우주와 통신할 수 있는 주파수도 모두 끊겼다. 가끔 작동하는 것은 구식 무전기 같은 모닝페이지 정도였다.
무슨 임무로 왔는지도 모두 잊어버렸다. 다만 내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났다.
어쨌든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후배 Y의 연락을 받았다.
Y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주식으로 가장 큰 수익률을 낸 사람이었다. 묻어 둔 종목이 30배가 되기도 했고, 금융위기 때는 -80%까지 떨어졌다가도 끝내 버텨 회복하기도 했다.
Y와 마주 앉은 식당에서 나는 물었다.
"그래서, 주식 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흐음... 좋으신 질문입니다. 30년이 넘는 제 투자 경험에 의하면 말이쥬..."
어떤 얘기가 나올지 기대됐다. 어떻게 하면 몇 배씩 수익을 내는지 나도 배우고 싶었다. 살아있는 성공 사례 아닌가.
"주식은 말이쥬... 그게... '묻지 마 투자'가 정답입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묻지 마 투자라고? 뭔 개소리지?
"복잡한 분석 해봐야 어차피 안 맞아요. 머리 싸매고 분석해 보잖아요? 진짜 하나도 안 맞아. 그래도 그렇게 접근하면 시장 수익률 비슷하게 벌 확률은 높아지지요. 안전은 하지요."
내 눈이 흔들렸다. 도대체 어쩌라는 얘기지?
"그럼, 그냥 운인가?"
"운도 크죠. 제가 아는 놈들 중에 진짜 특이한 친구가 있는데, 엔비디아로 큰돈을 벌었거든요? 근데 이 친구가 맨 처음에 왜 엔비디아에 투자했는지 아세요?"
"GPU 때문에?"
"어휴 아니라니깐요. 이놈은 아직도 GPU가 뭔지 모를 수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주식 공부를 깊게 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그냥 어느 날 우연히 엔비디아 기사를 봤대요. 그런데 거기 CEO가 젠슨 황이잖아요."
"그치, 젠슨 황이지. 이 시대의 리더."
"그때 젠슨 황이 누군지도 잘 몰랐는데, 하필 자기 영어 이름이 젠슨이었대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 친구 영어 이름이 젠슨이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대표 이름이 자기 영어 이름하고 똑같다고 엔비디아 주식을 샀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니까요? 주식은 진짜 모르는 거라니까요!"
솔직히 믿거나 말거나인 얘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가 띵 하고 울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만, 혹시 지금껏 내가 뭘 잘못했나?'
이어서 '주식에서 운을 좇는 건 망하는 길이다'라는 철석같은 믿음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 테이블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상한 음식을 먹은 것 같은 위화감이 뱃속에서 꿀렁꿀렁 올라왔다.
"형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요. 괜찮으셔?"
본래 내가 추구하던 삶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 사이토 히토리 바카라을 읽고 감명받아 "나는 운이 좋다"를 천 번씩 외우던 사람이다.
그런데 유독 주식에서만은 "운"은 싹 다 내쫓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투자했다고?
"오 마이 갓!!"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약 좀 사다 드릴까요?... 근데 요즘에 교회를 엄청 열심히 다니시나 보네요? 안 찾던 하느님도 찾으시고... 음... 놀라운 변화군요."
그거였나 보다.
시장이 잘 나가도 언제든 느닷없이 박살 날 수 있다는 공포에 항상 짓눌려 있었다. 시장의 날갯짓을 순식간에 파국의 시나리오로 해석해 버리는 머릿속 폭주 엔진도 한몫했다.
오래 들고 가는 투자는 못 하고, ‘확률’로 시장을 이긴다는 차트교 교주들의 꽁무니만 몇 년째 따라다녔다. 계좌는 쪼그라들고 겁만 눈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아우우우우~~~ 지겨워. 언제까지 혼자서 계속 쫑알쫑알 주절거릴 거냐? 어찌나 재미없는지 눈물이 다 나네." 하느님이 연신 하품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아, 쫌! 아직 하느님 순서 안 됐거든요?"
"내가 보기에 이 글은 망했다. 그만 쓰고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오자. 배고프다."
"진짜 거의 다 썼어요. 10분만요. 딱, 10분만!"
"딱 10분이다. 1초도 더는 못 봐준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껏 내보였다.
"쫌만요! 에잇, 하느님 때문에 다 까먹었네. 어디까지 썼지?"
[하느님이 하라는 대로 하자. 네 생각이 맞다. 후배 Y는 내가 보낸 거다. 하도 답답해서 보낸 거다. "묻지 마 투자"라고 쓰고 "하느님이 하라는 대로 하자"라고 읽으면 된다. 이제 됐지? 다 썼지?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내가 쓰고 있는 게 아니잖아!
"제가 써야지 왜 하느님이 써요?! 아직 1분도 안 지났잖아요!!"
"배고프다고!! 인간계의 10분은 천상계에선 백 년이다, 백 년! 내가 너 때문에 자그마치 백 년을 더 쫄쫄 굶고 기다려야 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구라뻥이다. 그러나 천상계를 가 본 적이 없으니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아유! 몰라! 그럼 밥 먹으러 가요! 하느님 때문에 흐름 다 깨지고,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고요!"
"밥 먹으러 가는 거냐? 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얌마 못다 한 얘기는 밥 먹으면서, 응? 그 뭐냐, 인터뷰! 그래 나하고 인터뷰하면서 마무리하면 되잖냐.
너 혼자 생각 지옥에 빠져서 주절주절 대는 걸 도대체 누가 읽는다고 그러냐? 나 같은 존재와 딱 대화를 나눠야 사람들이 오, 멋진 얘기다 하고 관심을 가지는 거지. 하여간 네 놈 돌대가리 근성은 어째 변할 기미가 안 보인다."
"됐거든요? 인터뷰했다 또 뭔 이상한 소리를 하시려고. 아, 뭐 드실래요? 얼른 가요!"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오랜만에 걸친 소주 몇 잔 때문인지 하느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따 이 집 삼겹살 맛있네! 이 좋은 데를 나는 안 데려오고 맨날 너만 몰래 와서 처먹었단 말이냐? 치사한 놈."
"저도 잘 안 와요. 가끔 오는 데라고요. 저 술 안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삼겹살 얘기를 하는데 그걸 왜 술로 받냐? 하여간 심하게 비뚤어진 놈이야. 너 글 못 쓰게 했다고 아직도 삐졌냐?"
"삐지긴 누가 삐져요!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글이 쭉쭉 잘 나오고 있었는데 마무리를 못했으니 찝찝해서 그러는 거죠. 써질 때 그 힘으로 끝까지 써야 했는데."
"인마, 삐졌으면 삐졌다고 해라. 이놈은 꼭, 뭘 인정을 안 해. 끝까지 아득바득 아니라고 또 우기겠지. 삐졌지? 삐졌지?"
"안 삐졌다고요옷!!!" 목소리가 커졌다.
짜증이 올라왔다. 아까 쓰던 스토리를 어떻게든 마무리 짓지 않으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따, 귀청 떨어지겄네! 그래서 네가 더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뭔데? 나도 궁금하다. 얘기해 봐라."
"됐어요."
"얘기해 보라니깐? 혹시 또 아냐? 나랑 얘기하다 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됐다고요!"
"너 부세미 얘기하려고 했던 것 아니냐?"
뚱한 표정으로 몇 점 안 남은 삼겹살을 입에 집어넣던 내 젓가락질이 순간 멈췄다.
"어떻게 아셨어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참, 네가 자꾸 잊어버리는데... 내가 하느님이야, 하느님!!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냐?"
"진짜 하느님은 맞으신 거죠? 짭 아니죠?"
"얘 봐라? 감히 누구보고 짭 이래? 너는 이렇게 멋있고 훌륭한 짭을 본 적이 있냐? 당연히 오리지널 명품이지. 내가 바로 정품 하느님이라니깐!! 천국 집에 가면 보증서도 다 있다고! 어이없네, 어이없어!"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제가 부세미에 대해 뭘 어떻게 쓰려고 했는데요?"
부세미는 한참 전에 1회도 보다 말고 덮어 뒀던 드라마 《착한 여자 부세미》를 말하는 거였다. 후배 Y를 만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드라마가 뜬금없이 생각났다.
"이걸 보라는 얘기인가?"
운의 영역을 다시 인정해 보기로 한 나는 그날 밤 1화부터 다시 틀었다. 그리고 2화에서 멈췄다.
주인공에게는 막대한 유산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앞으로 딱 3개월만,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다.
유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그 3개월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인공을 죽이려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름이 쭉 돋았다.
마치 나한테 하는 얘기 같았다.
우주가 "앞으로 3개월만 주식 시장에서 죽지 말고, 살해당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메시지에 바로 항복했다.
주식, 뉴스, 유튜브 등 모든 실시간 정보를 차단하는 정보 디톡스는 이미 실행 중이었다. 그 위에 "앞으로 3개월"의 메시지가 더해진 거였다.
"치지지지직!"
삼겹살 타는 냄새 때문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 믿거나 말거나 그놈의 3개월... 하지만 진짜 우주의 메시지 같았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부세미에서 3개월만 버티라고 한 게 진짜 내가 너한테 한 말인지 궁금한 거 아니냐."
"진짜로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맞는 거잖아요. 그렇죠? 저 그 말 그대로 하고 있다고요. 안 그랬으면 중간에 다 팔고 진작에 도망갔을 거라고요. 하느님 말만 믿고 꾹 버티고 있다고요."
평정심을 지키려고 애쓰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근데 버틸수록 손해만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요! 정보를 안 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지금 끝장인 것 같다고요! 그러니까, 하느님 말대로 3개월만 버티면 다시 회복되는 거잖아요. 맞죠? 맞는 거죠?"
하느님이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내가? 너보고 주식을 3개월만 참고 버티라고 했다고? 내가 언제? 생각 안 나는데?"
이 양반이? 치매인가? 시치미 떼는 건가?
"하느님이 부세미 스토리를 통해서 제게 메시지를 보내신 거잖아요. 맞잖아요! 제가 느낌이 딱 왔거든요."
"에이, 드라마는 드라마지. 그리고 내가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한 방법을 통해 너하고 대화하겠냐? 지금처럼 직접 얘기하면 되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직접 뵙기 전이었다고요!"
"그랬냐? 너랑 안면 튼 지가 얼마 안 됐구나? 근데 나는 왤케 니 얼굴만 보면 이렇게 지겹고 답답할까?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는..."
"말 돌리지 마시고요! 하느님이 얘기하신 게 맞는 거죠? 아니, 맞아야만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저는 이제... 어쩌라고요..."
후배 Y를 만난 후 간신히 지옥불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다 착각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지옥 탈출을 한 건 맞는 것 같았다.
뻑하면 순식간에 파국의 시나리오로 휩쓸려 들어가던 상태에서는 확실히 벗어났다.
지옥의 북소리가 한 번씩 울리기는 했다. 그래도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
공포가 공포를, 그리고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는 연쇄 반응은 거의 끊어낸 것 같았다.
그러면 뭐 한단 말이냐.
지옥에서 벗어나도 어차피 망할 거라면 뭐, 행복한 노숙자로 살라는 말인가?
"흐음,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생각이 안 난다. 근데 그게 글케 중요하냐?" 하느님이 소주를 한 잔 더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좀 취해 보인다.
"엄청 중요하죠!!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건데요!! 하느님 말씀만 믿고 아직 버티는 건데, 그게 아니면 저는 이미 망한 것 같거든요? 그러면 하느님한테 삼겹살도 사드리지 못한다고요!"
"삼겹살도 못 먹는다고? 이 집 엄청 맛있는데... 흠흠. 그럼 안 되지."
삼겹살도 못 먹는다는 말에 좀 움찔한 것 같았다.
"흐음... 그래도 진짜 모른다.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도 모른단 말이다."
이제 포기다.
"됐어요. 그만해요. 드시던 술이나 마저 드시고 나가자고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런데... 원래 기억을 못 하는 게 정상이다. 절대 치매가 아니다. 딱 맞는 말을 하고 나면 그 말은 바로 사라지거든. 이 우주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니까?
네가 그 말을 들은 게 분명하다면, 그 말은 이제 제 일을 하러 간 거다. 말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 순간 창조의 에너지로 바뀌어 버린 거지."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한 건 맞을 수 있지만 말하자마자 바로 잊어버리신다고요?"
"그 말이 제대로 전달됐다면 말로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냐. 현실 창조라는 진짜 일을 하러 가야지. 이미 알아먹었는데 똑같은 말을 뭐 하러 계속하냐. 이 우주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다는 거... 모르냐... 짜샤...?"
순간적으로 또렷하던 하느님의 눈이 다시 게슴츠레하게 풀렸다.
"잠깐만요! 정신 차리세요!
지금 중요한 얘기 같은데... 하느님!
그러니까 말씀을 하신 거는 맞고,
제가 바로 알아먹어서
그 말은 소임을 다했으니 사라진 거고,
자기 말을 현실화하기 위한 에너지로 변화돼 버린 거고,
그래서 하느님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얘기잖아요!
맞는 거죠?"
늦었다.
이미 눈이 풀릴 대로 풀렸다.
"하느님 말 믿고 지금대로 쭉 밀고 나가면 된다는 얘기네요? 지금 하신 말 바카라임지셔야 해요? 꼭이요?!"
"그놈의 말, 말, 말! 그래, 이놈아 내가 바로 말씀의 하느님이라니까! 성경에도 쓰여 있지 않느냐.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그게 바로 나 아니냐, 나! 말씀의 하느님! 어... 취한다..."
"그럼 3개월 후에 이상한 상황 돼 있으면 꼭 바카라임지셔야 해요? 약속하세요!"
"아, 귀찮은 자식. 얌마.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3개월 후에 뭔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아냐? 그러니 약속 못한다. 그딴 건 네가 알아서 해라. 이놈의 자슥은 자꾸 지 문제를 나한테 넘겨..." 비틀거리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이제 가자.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언능 일어나 인석아!"
"약속 안 해 주시면 안 갑니다. 약속해 주실 때까지 끝까지 앉아 있을 거예요!"
나는 하느님을 매섭게 노려보며 약속을 받아내겠단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 집에 가자고! 3개월 후를 어떻게 아냐고, 이 답답한 놈아!."
"안 가요! 안 간다구요!"
하느님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순간 번쩍이는 빛을 본 것 같았다.
"...이 우주는... 노빠꾸다.
뭔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른단 말이다.
그치만 뭐가 됐든 반드시 일어나긴 한단 말이다.
알았냐?
이건 약속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 무식한 놈아!!"
"그러니까 그 일이 제 주식이 오르는 일이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걸 바카라임지시면 되는 거잖아요! 하느님이신데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하느님은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마지막 소주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그깟 주식 좀 오르는 게, 인마, 지금 이 시기에 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끅... 가장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너 같은 놈 때문에 인마... 이 우주가... 네깟 놈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최상 중의 최상의 상황!! 이런 걸 만들어 주느라 얼마나 바쁜지 아냐? 약속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우주는 노빠꾸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우주가 노빠꾸라고? 젠장! 주식 빠진 건 제발 빠꾸해 달라니까? 최상 중의 최상은 또 뭔 말이지?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려다 다시 닫았다. 그러는 사이 하느님은 이미 식당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 뒤를 따라나섰다.
하느님이 고개를 돌려 힐끗 뒤를 봤다.
"참, 나는 너를 언더커버로 보낸 적이 없다. 절대로 없다.
네가 그냥 혼자 제풀에 지옥불까지 미끄러져 떨어진 거다. 그건 나하고 진짜 아... 무 상관도 없으니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라.
너 혼자 제 발로 갔다 온 거다.
내가 미쳤다고 너처럼 멍청한 애를 스파이로 보내겠냐? 일 없다."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
"노빠꾸...
불굴의 의지?"
"그깟 주식...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느님도 인정할 수 없는 언더커버...
극비 미션?"
"아...!"
"제가
......
블랙 요원이었군요!!"
"같이 가요, 하느님!!
저 살아 돌아왔잖아요! 흐흐!
살아 돌아오는 게 미션이었나 봐요?"
"살아남으면
3개월 후에 연봉 협상인가요?!
그거네!!
저, 연봉 엄청난 거 아니에요?
블랙 요원인데!"
"얼마 주실 거예요?
네? 얼마요?!"
하느님이 홱 뒤돌아봤다.
"으악!! 미친 새가슴!!"
해맑은 내 얼굴을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다시 정색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만큼 주마.
단, 욕망과 공포의 저울이
그 금액을 승인해야 한다!
어... 취한다!"
또 한 번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는
휘적휘적 사라졌다.
[다음 화 예고]
욕망과 공포의 저울
3장 [미지의 경로] 12화
큰돈을 벌고 싶은 새가슴.
그러나 얼마를 원하는 건지
스스로도 매일 헷갈려한다.
하느님은
욕망과 공포의 저울을 통과한 금액이라면,
어떤 금액이든 다 만들어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과연 새가슴은
저울을 통해
진짜 원하는 목표를 찾아낼 수 있을까?
10월 2일(금)에 발행되는
12화 〈욕망과 공포의 저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