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와 부자 아빠

2장 [무지의 자각] 10화

by아제

"어? 저기 파울로 코엘료다!"

내가 흥분해서 외쳤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이 말을 온 가슴에 품고 살아가던 때였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동남아 여행 중이었다. 여기서 파울로 코엘료를 보게 됐다고?


"너무 신기하다! 무슨 계시인가? 이제 좀 일이 풀리려나?"


희끗희끗한 수염과 현명해 보이는 눈빛의 그는, 노을을 등지고 일행들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과 노을이 뒤섞이던 바닷가의 그 장면이, 내게는 마치 계시처럼 보였다.


나는 신성한 기운을 받은 사람처럼 황홀한 기분에 취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이 풀리기는커녕 계속 꼬여만 갔다.


믿었던 한 사람에게 돈까지 빌려주었다.

그 사람은 곧 갚겠다고 했고, 그 말을 믿었다.

잠깐의 위기만 넘기면 되니 도와달라는 말 앞에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믿었다.

‘이번 한 번만’은 끝나지 않았다.


내 빚만 늘어나고 있었다.

빚도 잘 쓰는 게 능력이라던데.


문득 젊었던 때 푹 빠져 읽었던 바카라이 떠올랐다.






"정신들 차리세요! 아무리 고액 연봉을 받아도 당신들은 죄다 가난한 아빠라고요! 이런 답답한 사람들.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노예처럼 사실건가들?"


커다란 도끼가 머리를 쾅! 내리찍는 느낌이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은 후 나는 꽤 오랫동안 넋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엄청 열심히 살던 때였다. 목표로 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한창 인기 있던 커리어에, 유학도 다녀왔다. 내 나이대에 비해 고액 연봉을 받는다는 으쓱함도 은근히 있었다.


그런데, 이게 전형적인 가난한 아빠의 길이라고? 내가 뭘 한 거지? 그냥 똑똑한 척 착각하는 바보였나?

음...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연봉을 세게 받아봤자... 어디, 계산기를 두들겨보자. 이 회사에서 계속 승진을 한다고 치고... 연봉 오르는 거, 보너스 나오는 거 다 감안해서... '타닥, 타닥, 타닥...' 어휴, 그래봤자, 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 이 바카라 쓴 아저씨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죽어라 일만 해야겠는데?... 아아..."


바카라을 읽던 때가 하필이면 벤처 붐과 함께 갑자기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도토리 키재기 월급쟁이 중 키가 살짝 큰 사람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심장을 강타했다.






믿었던 그 사람은 “한 번만 더”를 계속했다.

결국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간신히 버티던 상황 속에 있던 나는, 예상치 못한 폭탄까지 맞아 빚더미에 앉아버렸다.

'이젠 월급쟁이 말고 부자 아빠의 길을 제대로 도전해 보자' 하던 때였다.

나쁜 일은 줄줄이 사탕으로 온다는 말을 우주가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추진하던 일들은 죄다 부러졌고, 수입은 깔끔하게 0원을 찍었다.


아득히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 《연금술사》가 눈에 띈 순간, 가슴속 가시철조망이 다시 당겨졌다.


“으아아아악!! 파울로 코엘료!”


서재를 정리하다 발견한 그 바카라을 손에 쥔 채, 나는 부르르 떨었다.


"띠이잉!"

명상용 쇠종이 내 머리를 쳤다.

이젠 별의별거로 다 때린다.


"으악! 또 왜요?"

"바카라 정리하다 왜 지랄발광이냐?"


"이 바카라이 눈에 띄었거든요. 그랬더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울렁울렁..."


"띠이잉!"

"으악!"


"가슴이 울렁울렁거리면 좋은 추억 아니냐? 근데 왜 발광이냐고!"

"좋은 게 아니라 절벽에 매달려 있는 울렁증이라고요! 죽는 줄 알았다고요!"


"안 죽었는데? 크흣!"

"죽을 뻔했다고요! 그때...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고... 인간들이 다 미워지고... 흑! 하느님은 모르죠? 세상에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 네가 들고 있는 그 바카라, 그거 쓴 놈 말이냐? ‘팔로 코로’인가 하는 놈? 그놈이 그렇게 나쁜 놈이냐? 흐흐!

근데... 걔는 조상이 코끼리냐? 코를 팔처럼 쓰는 놈이라 ‘팔로 코로’라고 불리는 게냐?"

"파울로 코엘료요! 세계적인 소설가요! 하느님이란 사람이 왜 이렇게 무식해요?

그 사람이 아니라! 전에 저에게 못되게 했던 나쁜 사람이 떠올라서 그런 거라고요!"

"근데 왜 그 바카라을 들고 지랄옘병이냐고! 그 바카라부터 딱 놔라!"


"띠이잉!", "띠이잉!"

"악!"


"그 나쁜 놈 얘기 좀 더 해봐라! 내가 혼내 줄 테니! 크크크!!"

"언젠 원수를 사랑하라면서요!"

"그게 내가 한 말이냐? 내가 그런 말 했다고 어떤 놈이 써 놓은 말이지. 됐고, 넌 그냥 내가 하는 말만 들으면 된다니까? 그게 어렵냐?"


혼자 조용히 바카라 정리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 삶이 돼버렸다.


"아, 몰라요. 저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해요!"


도망쳤다.






며칠이 지났다.


"이거였어! 진작에 이걸 알았어야 했어..."


바카라 정리를 다시 하다 이번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바카라을 만났다. 다시금 감동을 받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하고, 혼자서 허공에 하이파이브도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뱀의 교활함과 비둘기의 순수함을 함께 지녀라.

정직한 사람을 기만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믿는다.
어리석어서 늘 속는 것만은 아니다.
마음이 선량해서 속아주는 사람도 있다.

많은 이가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의 일로 만든다.
그 의도를 풀어낼 열쇠가 없으면 발을 디딜 때마다 함정에 빠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큰 상처를 입고 있는 당신의 손을 불에서 빼내도록 하라.

발타자르 그라시안,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사람을 얻는 기술》


그라시안의 가르침은 다시 일어서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뱀의 눈도 얻었다. 그러자 뱀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교활한 기술들을 쓰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나도 똑같이 뱀의 기술을 쓰는 건... 그건 여전히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도움이 된 건 좋았는데... 이젠 뱀도 아니고 비둘기도 아니고... 뱀의 눈을 가진 새가슴?... 이건 뭐냐. 참으로 씁쓸하네..." 푸념을 하고 있는데,


"푸하하하! 새가슴! 이제야 제대로 인정하는구나!" 하느님이 다시 등장했다.


"오늘도... 바카라 정리는 다 했군요." 김이 팍 새 버렸다.


"띠잉!" 쇠종이 또 머리를 친다.

"머리는 그만 치셨으면 좋겠는데요."


"너답지 않게 왜 얌전하냐? 재미없게."

"지금의 제 모습이 갑자기 싫어져서 그래요."

"지금의 네 모습? 새가슴인 게 싫어서? 너, 그건 죽을 때까지 안 바뀐다?!"


"새가슴인 건 타고난 거니까 할 수 없겠죠. 그게 아니라... 뱀눈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뱀같이 구는 게 다 보이거든요? 앞에서 웃는 이유가 뭔지... 숨은 의도가 뭔지. 이런 것들이 다 보인다고요! 점점 더 죄다 꼴 보기 싫어지고 경계하게 되고... 응팔 시절처럼 정을 나누면서 사는 맛은 싹 다 포기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이 쓸쓸하고 팍팍하고... 그렇다고요!"


"그렇다고? 그럼 그 뱀눈, 내가 빼줄까? 그럼 되네? 그치? 내가 빼줄게!"

"우왁! 안 돼요! 뱀눈까지 빼버리면 어디서 또 누구한테 뒤통수를 맞으라고요! 절대 안 돼요!" 나는 양손으로 두 눈을 필사적으로 감싸며 몸을 말아서 구부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흐음... 이거 뱀눈 중독증인데?"

"뭐라고요? 뱀눈 중독증이요? 그런 병도 있어요?"

"암, 있지! 특히 너같이 몸하고 눈하고 맞지 않는 경우에는 거부반응으로 몸과 마음이 뒤틀리다가 뒈질 수도 있다. 이거 언능 고쳐야 한다."

"저는 뱀눈 없어지면 안 된다고요!"

"날 못 믿냐?! 나 하느님이야! 뱀눈은 빼되 뱀의 시력만은 유지하게 딱 고쳐주마."


믿을 수 없다. 절대 믿을 수 없다.

나는 뱀눈을 한껏 치켜뜨고 하느님을 스캔했다.


"띠리리리릭... 진정성... 51%"


"못 믿어요. 안 할래요!"

"진짜라니깐! 이놈 참, 사람만 못 믿는 게 아니라 하느님도 못 믿냐?"


잠시 생각하던 하느님이 말을 이었다.

"그럼 플랜 B로 가자. 날 못 믿겠다 하니 내가 전문가를 부르마. 뱀눈 전문가, 나오쇼!"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안녕하세요, 뱀눈 전문가 그라시안입니다."

사제복을 입고 거대한 종을 들고 나타난 인물이 자기소개를 했다.


"설마, 발타자르 그라시안 님?"

"맞습니다."

"아니... 여기는 어떻게요? 돌아가신 지 한참 아니신가요?"

"인간계에서는 은퇴했고, 지금은 영계에서 뱀눈 전문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보겠습니다."

다짜고짜 손가락으로 내 눈을 벌리고는 눈동자를 뚫어지게 살펴봤다.


"흠... 역시. 뱀눈 중독증이 맞습니다. 천성적으로 뱀눈이 잘 안 되시는 분들이 과도하게 뱀눈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제가 바카라에서 뱀과 비둘기를 동시에 가지라고 쓰긴 했는데, 그게 뭐...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도 잘 안 돼요. 그래서 뱀눈 전문가를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꽤 많습니다, 하하!"


자기 일감이 생겨서 좋다는 말처럼 들렸다. 기분이 나빴다. 그라시안이고 뭐고... 하여간 다... 자기들 이득이 먼저인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독기를 빼내기만 하면 됩니다. 독기 때문에 뱀 기운이 가득해서 조절이 안 되는 거거든요. 독기를 빼내고 딱 필요한 순간에만 뱀의 시력을 활용하면 되는 거죠. 제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시면 됩니다."


청산유수로 하는 말에 대꾸도 제대로 못한 채, 어느새 하자는 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아직 원한이 가득한, 본인이 뱀눈을 달게 만들었던 일이나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어떤 게 있습니까?

"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버금가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음... 사실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요?"

"그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바카라의 저자인데요..."


"얌마! 그건 그냥 바카라이잖아! 너 그 사람 만난 적도 없잖아!" 갑자기 하느님이 끼어들었다.


“에잇! 꼭 만나야만 사달이 나는 건 아니죠. 제가 그 사람 말을 무슨 경전처럼 믿는 바람에, 갑자기 회사 다니고 있는 저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고, 빚내서 투자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멋있어 보였다고요! 떼돈을 벌어야만 부자고, 월급으로 차근차근 돈 모아가는 사람들은 완전 멍청하고 인생에 답 안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됐단 말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 틀린 말이었다고요!”

“그게 왜 또 다 틀린 말이냐? 그냥 다 생각 차이지! 지가 잘못 받아들여 놓고 또 남 탓 하냐?”


“적어도 저에게는 틀린 말이었다고요! 더 살아보니 멀쩡히 회사 다니면서도 엄청난 부자 된 사람들 많더라고요! 연봉의 단위가 바뀌어 버렸잖아요? 옛날에 제가 계산기 두드릴 때에는 생각도 못 했던 거죠.

더 중요한 건, 나중에 ‘부자 아빠’라는 얘기도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지어낸 얘기인지,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저는 완전 실화라고 믿었잖아요!”


"얌마, 어차피 바카라인데, 그게 진짜든 뻥이든 뭐가 문제냐? 이놈 참, 바카라 한 권 읽고는 무슨 다단계에서 사기 맞은 사람처럼 흥분하고 지랄이냐?! 하여간 넌 좀 맞아야 된다!"


"띠잉!", "띠잉!", "띠잉!"


"으악! 아! 악! 하여간... 부자 아빠가 진짜라고 내세워서는 그걸로 바카라 팔아먹고 비싼 세미나 만들고 팔아먹어서 돈 번 사람이라고요! 전형적인 뱀이라고요, 뱀!! 코브라!!"

"이놈이?! 그러든 말든 그때 바카라 값이 돈 만원도 안 했겠구먼! 바카라 한 권 읽고 훌러덩 넘어간 놈이 병신이지 그 사람이 나쁜 놈이냐! 에잇! 더 맞아라, 이 돌대가리야!"


"아, 두 분!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이게 다 뱀눈 중독 증상입니다! 제가 다 고쳐 놓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라시안이 중간에 끼어들어 뜯어말렸다.


"증상은 충분히 알았으니 바로 치료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라시안은 거대한 종을 내 옆에 바싹 붙여 놓았다.


"이 치료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래! 이놈도 뱀이다!


"뭐라구욧! 그딴 놈들을 용서하라고욧?! 못해요! 전 용서 못한다고욧!"

"하여간 못난 놈!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다, 이 새가슴아!"


"뒈에에에에에에에엥!!!"


고막이 찢어질 뻔했다.


"조용!! 두 분 다 정숙을 유지하세요! 지금은 치유의 자리입니다!" 그라시안이 낮지만 단호하게 외쳤다.

그라시안의 종소리는 그 크기만큼 데시벨이 남달랐다.


"그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뱀들에게 잡아먹혔던 비둘기의 모습, 비둘기였던 자신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그라시안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뱀눈 중독의 원인은, 그때 잡아먹히던 공포가 너무 깊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로 돌아가면 다시 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 두려운 거죠. 그러나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게...... 왜 잘못된 생각이에요?"

"환자분 정도로 뱀눈이 장착된 분은 필요한 순간에 자동적으로 뱀눈 모드가 켜집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지금은 뱀눈 모드가 꺼지지 않는 게 문제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것도 같았다.


"뱀눈 모드를 끄려면 비둘기였던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용서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제가 가져온 종을 활용하면 됩니다."


역시... 전문가인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종 속으로 들어가세요."

"네? 종 속으로요?"

"제가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의자에 앉아 있던 나를 거대한 종이 덮어 씌웠다.


"그때 비둘기였던 자신을 용서합니다."

"뒈에에에에에에에엥!!!"


온몸이 욱신욱신거리면서 울렸다. 고막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으악!


"그때의 비둘기 모습, 비둘기였던 내 모습을 모두 용서합니다."

"뒈에에에에에에에엥!!!"


온몸이 울리면서 살점이 전부 다 찢겨나가는 듯했다. 아아악!


"그 선했던 나를, 잡아먹혔던 순간까지 전부 다 용서합니다."

"뒈에에에에에에에엥!!!"


온몸이 더 크게 울리면서 좀비처럼 몸 전체가 다 꺾이고 뒤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꾸에엑!


"마지막입니다. 아직 자신 속에 남아 있는 비둘기를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다 받아들입니다."

"떼에에에에에에에엥!!!"


종소리가 청아한 울림으로 바뀌었다.


조각조각 부서졌던 몸의 파편들이 뚜두둑 맞춰지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온몸이 찢어지고 부서졌던 고통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개운했다.


"끝났습니다! 뱀눈 독은 꽤 많이 잡혔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온몸이 후들거리는 채로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뭐야? 그랬다고?

그걸 지금까지 몰랐다고?

왜? 그때는 뱀눈이 없어서?


"하느님... 그때 그 파울로 코엘료 있잖아요?"

"아, 그래! 그때 네가 동남아인지 어디서 봤다며."


"갑자기 선명히 떠올랐어요. 그때 그 파울로 코엘료의 모습이요.


자세히 보니까... 그 사람... 파울로 코엘료가 아니었어요! 엄마야! 수염만 파울로랑 똑같이 생겼었어요. 수염만요! 그냥 비슷한 느낌의 외국 사람이었어요!


흑! 그냥 다 가짜였네요. 왜 몰랐을까요? 제가 봤던 파울로도... 제가 믿었던 부자 아빠도... 전부 다 가짜였어요."


"...그냥 비둘기가 아니라 한심하고 멍청한 비둘기였네! 크크!!"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필요할 때,

뱀눈이 다시 작동하는 건 맞겠지?


맞겠지?


"하느님,

저 뱀눈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죠?

필요할 땐 작동되는 거 맞죠?"


"응."


"맞아야만 해요!!

꼭이요!!

네?!"


"맞다고!"


"하느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어휴! 얌마! 뱀눈을 뺐더니,

진짜 구구한 얘기만 지껄이는구나.

작동된다고 했잖냐!"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바카라임지시라고요! 흑!"


"답답한 새가슴 시키!

알았다, 알았어!

뱀눈 작동법을 알려 주마.

아주 쉽다. 잘 들어라.

구하면 찾게 될 것이다!

이제 됐지?"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사라졌다.


"하느님!!"


증폭하는 불안감 때문인지 내 입에서는 더 이상 사람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비둘기로 변신한 것 같았다.


"구구구구! 구! 구! 구!"

"구구구구! 구! 구! 구!"


그때! 순간적으로 뱀눈이 다시 켜졌다!

...

...

...

"그게 '구!' 하라는 말이었다고? 이런 XX!"


"크크크크!! 아, 웃겨!! 흐흐!! 이제 알겠냐? 크크!!"

다시 나타난 하느님은 눈물을 훔치며 깔깔대고,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근데 네가 '구!' 했기 때문에,

뱀눈 말고도

네 삶의 방향에 대한 진짜 계시가 곧 갈 거다.

흐흐! 행운을 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는 다시 사라졌다.


"???"


지금은 수수께끼보다 뱀눈을 작동시키는 게 시급했다.


"구구구구!"

뱀눈 번쩍.

그러나 금방 다시 사라졌다.


"구구구구!"

뱀눈 번쩍.

곧 다시 사라졌다.


"구구구구!"

"구구구구!"

"구구구구!"


뱀눈 시력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나는 며칠째

"구구구구!"만 외쳐댔다.





[다음 화 예고]


〈3개월만 죽지 말고 버텨라〉

3장 [미지의 경로] 11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주식투자로 괴로워하던 새가슴.

어느 날, 3개월 동안 투자를 전면 중단하라는

우주의 계시를 받았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기는 그런 계시를 내린 적이 없다며 발뺌한다.


새가슴이 봤다는 신호는

진짜 계시일까, 아니면 망상일까?


9월 30일(수)에 발행되는

11화 〈3개월만 죽지 말고 버텨라〉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