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아몬드. 그리고 나팔꽃.
복숭아나무를 두 그루 심었다. 분명히 황도 하나, 백도 하나를 심었다고 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나무는 가지만 무성했고, 꽃이 핀 듯도 했지만 힘없이 떨어져 버리기도 했다. 자리가 안 맞는가, 거름이 부족한가 싶으면서도 아직 어린 나무라서 자라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는 기대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백도라고 했던 나무에서 꽃이 한 송이 피는 듯 지더니 어느 날 뭐가 쬐끄맣게 달렸다.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복숭아나무 근처만 가면 단내가 진동을 했다. 꽃이 필 공간도 아닌데 뭔 향이 이렇게 달콤하게 좋은가 하고 수풀을 헤집어 보니 웬걸 복숭아나무에 열매가 벌겋게 색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불량했다. 신경을 안 쓰고 물만 줬더니 애가 눌려서 잘 크지를 못했나 봐. 냄새는 되게 좋은데 모양이 찌그러졌어. 과일이라는 게 모양이 좋은 게 맛도 있는 건데 어린 나무가 고딩 엄빠가 되면서 애를 제대로 못 키웠나 봐. 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유혹적인 단내가 얼마나 나를 꼬시던지 다시 무성한 복숭아 이파리를 헤집어 낸 후 복숭아를 비틀어 따냈다. 말캉한 촉감과 달콤한 향이 너무 좋은데 너무 못 생겨서 의심이 끊이질 않았다. 그날 남편이 퇴근하는 저녁까지 주방 선반에 그대로 두고서 험한 일을 남편에게 미루고 있었다. 이어 남편은 달콤한 냄새가 난다며 궁금해했다. 실은 말이야.... 그간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나의 의심과 두려움을 이러쿵 저러고 이야기한 후 자기가 한 번 잘라봐, 나는 복숭아 털 알러지가 있어서라는 너무나 뻔한 거짓말로 험한 일을 남편에게 미뤘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먹어 봐, 첫 복숭아니까 의미가 있잖아 하는 역시나 뻔한 속임수. "앗! 너무 맛있어. 입에서 그냥 녹아, 씹을 필요가 없어." 그래? 반을 나눠서 선 채로 홀랑 둘이 다 먹어버렸다. 못 생긴 주제에 너무 맛이 있었다. 그리고 내년에는 애지중지 키워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러면서 복숭아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시작을 했는데 키가 작은 한 그루는 언제 열매를 내줄지 기대도 됐다. 못 생기게 난 백도도 이렇게 보들하니 달콤한데 황도는 얼마나 맛있을까?
못 생긴 복숭아를 생산한 그 나무는 다음 해에 역시 못 생긴 복숭아 두 개를 생산했고 일관된 못 생김이 궁금해서 알아본 결과 우리의 백도는 '납작 복숭아'였다. 유럽에나 있다는 납작 복숭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집 정원에서 자라고 있었단 말이다.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무를 심은 4년 만에 이 외로운 아이의 정체가 납작 복숭아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 열매를 한 개, 두 개를 생산하던 나무는 봄에 엄청나게 예쁜 분홍색 꽃을 풍성하게 피웠고, 그동안 소식이 없었던 황도 역시도 꽃을 피웠다, 몇 송이. 너도 시작이구나. 그리고 다른 종류로 두 그루를 심은 아몬드 나무도 몇 년 만에 복숭아꽃 비슷하지만 좀 더 물 먹은 듯한 색감을 내는 여리한 꽃을 몇 송이 피웠다. 솔.직.히. 납작 복숭아나 아몬드 나무는 기대를 안 했다. 납작 복숭아는 유럽에나 있는 애고, 아몬드 나무는 우리나라 기후에 맞기나 할까?
꽃이나 이쁘게 피워주는 관상용 정도로만 기대를 했는데 웬걸...... 납작 복숭아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열매가 200개는 달린 것 같다. 그걸 서너 번 솎았음에도 불구하고 차고도 넘쳐 예쁜 애들은 이웃과 지인들에게 떠넘기듯이 나눠주고, 우리는 과숙되어 떨어지거나, 수확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것들만 취했다. 맛있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황도 역시 첫 열매로 여덟 개인가 났는데 납작 복숭아와는 다른 캐릭터의 단맛을 보여주니 올여름은 아주 달콤했다.
이렇게 달콤하기만 하게 여름이 지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8월의 긴 폭우는 도대체 웬 말이냔 말이다. 2주를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붓는 비가 와 재끼는데 태풍이 안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꿉꿉하고 질척한 날이 계속되고, 햇빛 먹고 자라는 리톱스는 계속 굶고 있고, 인간인 나도 비가 지겹다 싶을 정도로 지루한. 이건 장마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되는 거지? 지겨운 2주를 지내고 났더니 이런, 잡초! 장마와 폭염이 지났으니 뭐가 올라와도 얌전하게 올라오겠지 했는데 2주간의 폭우는 잡초를 군단으로 키웠구나. 지금은 모기도 극성인 때라 모기 뷔페가 되기 십상인데. 기침이 켁켁 나올 정도로 모기 기피제를 뿌려대도 극성맞은 모기들이 입을 갖다 대는 걸 피할 수 없는데 잡초라고! 6.25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무색할 정도로 빽빽하게 올라온 잡초 떼! 창밖으로 정원을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난다. 그리고 웃자란 도장지들도 거슬린다. 아, 또 생각나네. 작년 이맘때 생각 없이 나무를 건드렸다가 발견하지 못한 말벌집에서 말벌 떼가 족히 30 마리가 튀어나와서 죽을 뻔했던 기억. 나는 지금 잡초를 제거할 수가 없어, 말벌의 기억이 너무 공포스럽다고.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 어차피 추워지면 시들테니까.
주말 율 새벽 산바카라을 나간 남편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나팔꽃이 피었다. 여름이 이제 간다는 신호다. 그리고 차분한 이 양반이 보기 드문 흥분을 하고는 "아몬드 육과가 깨졌어. 다섯 개가 깨지고, 아직 두 개는 안 깨졌어."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몬드 나무는 꽃도 복숭아꽃과 비스무리 하더니 씨앗도 닮았다. 신기해. 진짜 됐어. 납작 복숭아 200개도 신기한데 아몬드 7개가 우리 정원에서 나왔다. 이게 좀 비현실적이지 않나? 긴 폭우 후 잡초 떼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는데 믿을 수 없게 비현실적인 사실들이 올해 한여름이 물러가는 시점에 오버랩이 되는 느낌.
얼떨떨한 상황에서 그나마 나를 붙잡아 주는 현실 속에 나팔꽃. 작년처럼, 재작년처럼 딱 이 즈음에 와서 하루 한 송이 씩 이른 아침 햇살에 활짝 펴서 두어 시간 정도 화사했다가 해가 높아지고 힘이 좀 생길만하다 싶으면 새초롬하게 닫혀 버린다.
그래서 매일 이른 아침 날이 밝자마자 오늘의 나팔꽃을 기대하게 하는 반가운 녀석. 그러다가 발걸음이 끝나는 때가 오면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어져 있다. 한 발짝 물러선 여름에 와서 찬바람과 자리를 맞바꾸고 가는 아이. 주말부터 피기 시작했으니 며칠은 아침을 기대하게 하겠지. 그리고 늦은 오전 중에 오늘의 나는 안녕. 내일은 다른 아이가 올 거야.
참, 이 나팔꽃 이름은 스칼렛 오하라다.
뜨거운 여름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