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 5일 차, 에스테야 가는 길
간단한 인사말 정도라도 현지어를 배워 가는 게 여행자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마침 사용 중인 어학학습앱에서 스페인어 코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출발 1년 전, 비행기표를 끊은 때부터 간간히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공부했다'는 건 과장된 표현이고, '구경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물에 빠진 다음에 수영을 배우는 것 같은데, 실제 제일 열심히 스페인어 공부를 한 건 산티아고를 걸으면서였다. 이렇게 지속하니 이번 마을에서 몰랐던 단어를 다음 마을에서는 써먹기도 했다. 첫날은 피레네 산맥 위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듀오링고를 했다.
https://www.youtube.com/shorts/ezkXrF-qvog
스페인어 표현이 몇 개 익숙해져서 반쯤은 영어로, 반쯤은 스페인어로 주문을 했다. 그래봐야..
운 카페(Un café 커피 한 잔)
이 운 카페 꼰 레체(y un café con leche 그리고 우유 탄 커피 한 잔(카페라테)
정도였지만.
나는 줄곧 카페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아내는 라테를 한 번 마셔보고는 반해서 자주 '카페 콘 레체'를 마셨다. 이렇게 주문하고 받아 든 두 개의 접시를 덜렁덜렁 들고 야외 테이블로 갔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었음을 동네 성당의 종소리가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또 잊은 것이 있었으니, '부탁합니다'였다. 뽀르 파보르. Por favor. 영어로 플리즈. 말하자면 반말로 주문을 하고서는 좋다고 뒤돌아 선 셈이다. 주문을 영어로 하건 손짓발짓으로 하건, 틀리건 맞건, 뒤에 '부탁합니다'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잘 배운 스페인어였을 텐데... 방금 전 주문도 그러므로 절반의 실패.
내가 듀오링고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면, 스페인에서는 한국어가 늘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출발한 지 3시간 후, 13km쯤을 걷고 나면 로르카 마을이다. 로르카 마을에 들어서면 한국어가 눈에 띈다. 마을 중심부에 홍보를 위해 세워 둔 간판인데 '아이스커피'라 씌어 있다.
간판을 세운 건 로르카 알베르게(Albergue de Lorca). 신기하게도,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이런 식의 이름을 수도 없이 봤다. 고민해서 특이한 이름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로르카고 내 가게는 알베르게니까 '로르카 알베르게'. 경쟁이 치열하지 않다는 자랑 같기도 해서 부러웠던 작명법이었다.
안내대로 50미터를 더 가면, 멀리서부터 한국 아주머니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국 순례객들에게, 시그니처 메뉴인 '감자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설명하는 중이다.
한국 출신 아주머니는 홀을 담당하고, 스페인 남편은 2층의 주방을 오가며 음식을 나른다. 위층에는 알베르게도 하고 있다. 딱 내가 하고 싶은 풍경이다. 경쟁하지 않는, 동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소박한 음식과 서비스를 내어 놓는 것...
맛집이 아니려야 아닐 수 없는 맛집
로르카를 떠나 걷다 보면 드넓게 펼쳐진 꽃밭을 만난다. 이 넓고 기름진 땅을 인간이 버려뒀을 리는 없다. 야생화가 아니라 작물이고, 예상대로 유채꽃이었다.
꽃에 문외한이라, ‘모여 있는 노란 꽃'을 보면 유채꽃이라는 말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개나리를 내가 좀 알기 때문에 개나리더러 유채꽃이라고 하는 바보짓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개나리 이외의 '노랗고 모여있는 꽃'은 내게 일단 유채꽃이다.
한국인 한 분이 '이 꽃으로 기름을 짠다더라' 하셨는데, 알아보니 그게 바로 카놀라유였다. 지지고 볶고 하는데 자주 쓰면서도 정작 유채꽃 씨앗을 짜낸 기름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다. 유채는 Rapeseed라는 이름 말고 Canola라는 만들어진 이름도 있다고 한다. 캐나다 오일이며 산도가 낮음 (Canada + Oil + Row Acid)의 준 말이란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순례길에는 한국어를 자주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에스테야의 시립 알베르게 안내판이다. 맨 위 큰 글자가 스페인어, 윗줄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바스크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 순이다. 바스크어(Euskara)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 바스크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라고 한다.
시립 알베르게 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어는 비공식 아시아 대표언어다. 각종 길안내 표지판과 시설 내부의 세탁기, 자판기 등의 사용설명서에서도 한국어를 자주 볼 수 있다. 유럽어 차례가 끝나면 한국어가 제일 처음 또는 유일하게 나온다고 보면 된다. 그런 다음 여유가 되면 중국어가 있고, 여백이 더 남으면 간혹 일본어를 병기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산티아고를 많이 걷는다는 얘기. 그래서 "왜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오는가?" 하는 질문을 끝없이 받게 된다.
세상을 등진 장거리 도보 여행자에게, 한 나라의 대정전은 어떤 의미일까? 우연찮게도, 에스테야로 들어간 날 이베리아 반도에 대정전이 일어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이 마비되었다. 우리야 맨몸으로 걸어만 왔으니 알 턱이 없었다. 다만 알베르게에 들어갔을 때, 이상하게도 어두웠고, 리셉션 직원들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어렵사리 알아들은 게 '정전'.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전 세계적으로 뉴스가 된, 규모가 꽤 큰 대정전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도 취소되는 분위기였다.
보일러가 작동되지 않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월 말의 쌀쌀함 속에서 찬물샤워를 해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덜덜 떨며 했던 이 찬물 샤워 중에 발견한 것은... 닭다리를 닮아가는 내 종아리였다. 기름기는 상당히 빠져 있었고, 근육이 볼록해졌다. 근육 사이의 골도 선명해진 종아리였다. 이때 연상된 것은, 도망생활을 하던 사내가 오랜만에 샤워를 하면서 자신의 여윈 나신을 바라보며 서글퍼하는 장면이었다.
세상을 등진 장거리 도보 여행자에게 대정전이란
사실 한 달 넘게 걷자고 드는 일은 '먹고살자고 하는 일'과 정반대의 일이겠지만... 먹고살자고 일부 영업을 하고 있는 번화가로 건너갔다. Ega 강을 건너서 중심가로 가니 다행히 그쪽은 전기가 살아 있었고, 가게들도 정상영업 중이었다. Rochas라는 퓨전 중국식당의 야외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2025년 4월 28일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Puente la Reina - Estella
구간 거리 21.6km
생장에서의 누적거리 111.5km (지도 기준)
p.s.
분류 오류가 있어 다시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