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 6일 차, 로스 아르코스까지
팜플로나에서 인사를 하게 된 한국분 일행이 계셨다. 모두 70세 내외셨다. 팜플로나는 겨우 3일 차 여정인데도 심신이 많이 지치신 상태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계속 걸으실 수 있을 지 의심됐을 정도. 에스테야를 떠날 준비를 하다가 그 중 한 분을 만났다. 다행히 표정이 좋아 보이셨다. 반갑게 달려가서 인사했다. 말로든 표정으로든 몸짓으로든 전하고 싶었다. 장하시다, 할 수 있으시다, 힘내시라,는 뜻을. 그렇게 인사하고 배낭을 둘러메면서, 평소보다 더 활기찬 동작을 취했다. 우리 부부의 늠름함이 힘내시는데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길은 호의를 베풀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다만 노란색 화살표를 무뚝뚝하게 보여줄 뿐.
길은 호의를 베풀 생각이 없을 것이다.
출발지에서 만드는 순례자 여권은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지만, 내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라기 보다는 여정을 기록하는 몫을 한다. 병풍식으로 접는 방식인데, 각 페이지마다 여러 개의 칸이 있어서 알베르게나 성당, 음식점 등에서 도장을 찍으며 채운다. 각각의 도장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어디를 들르는지, 어느 루트로 이동하는지 증명이 된다. 도장을 찍으며 날짜를 적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사실은 정신 없이 도장만 찍는 경우도 흔하다) 날짜와 장소가 모두 기록되는 타임라인이 만들어진다. 도착지인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이 여권으로 걸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스페인 말로 도장은 쎄요(Sello)다. 영어로는 스탬프(Stamp). 에스테야 다음 마을에 아예기 대장간(La Forja de Ayegui 라 포르하 데 아예기)이 있다. 60년 된 대장간인데 딱 순례길 길목에 있어서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이름도 역시나 그냥 보통명사의 조합인 '아예기 마을 대장간'. 입구에 '도장'이라는 한국어로도 안내를 하고 있다. 대장장이가 대장질(망치질)을 하는 모양의 멋진 쎄요를 찍을 수 있다. 내부 전시실에서는 수준 높은 철공예품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큼지막한 돌을 안고 있는 모양의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자신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의 모습이 저러하리라, 싶었다.
커다란 돌을 안고 있는 철인(鐵人)들
"아직 초반이잖아..."
무게 걱정에 사갈 엄두를 못 내며 아내는 아쉬워했다.
대장간을 뒤로 하고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앞쪽에 종탑이 서 있는 이라체 마을이 나타난다. 중세 때부터 있었던 베네딕토회 이라체 수도원과 와인박물관 등이 있다. 와이너리 벽 바깥으로 수도꼭지 두 개를 내어 놓고 무료로 포도주와 물을 제공하는 곳이 이곳 이라체다.
이라체는 에스테야 옆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3km 떨어진 마을이다. 여기에서 누구나 포도주와 물을 마실 수 있게 설치한 이라체 와이너리의 와인 분수(Fuente del Vino de Irache)를 만난다. 보데가스 이라체(Bodegas Irache) 와이너리가 1991년 설치한 시설로,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고 하나에서는 포도주 하나에서는 물이 나온다. 순례자를 위로하는 한 잔인 셈이다. 물병에 가득 채워가는 사람들을 경계해서, 이용수칙에는 '가져가고 싶다면 사라'는 안내가 있다. 겨우 흘러나오는 포도주 몇 방을을 손바닥으로 받아 마셨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Normas de uso — 이용 수칙
A beber sin abusar
te invitamos con agrado,
para poderlo llevar
el vino ha de ser comprado.
마음껏 즐기되 지나치지는 마세요.
기쁜 마음으로 한잔 대접합니다.
가져가고 싶다면
와인은 구입하셔야 합니다.
다음에 나타난 마을에서는 굳이 음식점을 찾지 않고 지나쳤다. 눈에 보이는 곳에 음식점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지만, 그 마을에서는 길목에 상점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 약속하고 역할을 나눈 것처럼, 마을에 없었던 음식점을 대신해서 푸드트럭이 나타났다. 메뉴판에는 '순례자의 오아시스'라고 써 놓았다. 푸드트럭치고는 꽤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었다. 조리시설까지 갖춰 놓아서 따뜻한 음식도 먹을 수 있었고, 아이스크림까지 있었다.
빵과 음료를 먹은 후에, 아내는 풀밭에 누워 낮잠을 잤다. 작게 코고는 소리에 주변 순례객들이 웃었다. "네 와이프가 많이 피곤한가 보다"면서. 아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몇이 떠났고, 몇이 도착했다. 모자 하나로 얼굴을 가리고 스페인의 태양 아래서 낮잠을 잔 여파로, 아내의 피부 속에서는 기미가 폭발적으로 세력을 키웠다. 푸드트럭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나무가 몇 그루 모여 있었고, 주변 풀도 무성해서 천연 화장실로 쓰이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여정에서 시간을 허송하며 꼼짝도 하지 않는 낮잠.
잠든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이 길에서 중요한 게 속도나 거리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 길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가?
이날 걸어야했던 거리는 21.5km. 부담스럽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7시 25분이라는 늦은 시간에 출발하면서도 마음이 급하지 않았던 이유다.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닿았다.
로스 아르코스는 중간 규모의 마을이었다. 잔디가 심어진 중정이 있을 정도로 꽤 크게 지어진 성당이 있었고, 그 옆으로 광장이 있었고, 광장 주변으로는 상점들이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서 시에스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열린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사온 음식들을 들고 광장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먹고 마시면서 맨발을 꼼지락거렸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제비들과 제비집을 많이 보았다. 이곳의 숙소 하늘 위에도, 제비들이 무척 많이 날아다녔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그 날렵하고 우아한 자태가 반가웠다.
2025년 4월 29일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
Estella - Los Arcos
구간 거리 21.5km
생장에서의 누적거리 133km (지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