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제 알베르게는 와이파이가 없다

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25

by설읽은

레온에서부터 같이 걸어온 M과는 사리아에서 작별하고 K와 함께 사리아를 지나쳐온 데에는 관광객들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순례길 마지막 기부제 알베르게로 가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라뇽에서 묵었던 기부제 알베르게가 너무나도 따듯한 기억으로 남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끝내기 전에 다시 한번 따듯함을 얻어가고 싶었다. 나와 함께 그라뇽에서 묵었던 K는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기부제 알베르게에 묵자고 제안을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다만 25km씩 걷게 되면 순례객은 주로 사리아를 지나 포르토마린과 팔라스 데 레이에 묵게 되는데 리곤데는 딱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계획 변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두가 묵는 사리아를 지나쳐 모르가데까지 걸어갔고, 다음날 포르토마린을 지나쳐 리곤데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리곤데에 위치한 기부제 알베르게는 선착순인데 심지어 7명밖에 받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모르가데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길을 떠났다. 이 날은 기부제 알베르게에 가는 것 말고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바로 산티아고 도착까지 100km 남았다는 걸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모르가데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00km 표지석을 지나게 되었다. 벌써 4주 동안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길을 한 발짝 한 발짝 더 짙게 간직하며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표지석을 뒤로 한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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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마찬가지로 포르토마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래로 내려가는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어제 미리 코스에 대해 찾아봤을 때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둘 다 크게 차이가 나는 코스는 아닐 것 같았지만, 조금이나마 덜 가파르게 내려가는 듯한 길을 택해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가는 다리로 내려갔다.


다리 위를 걸어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가려는데 저수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날이 맑았다면 멋진 풍경이었을 것 같은데 참으로 아쉬웠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 바로 앞에 100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이 나타났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이 헥헥 대며 계단에서 내려오더니 계단 오른쪽 길로 다 같이 사라졌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순례길은 포르토마린 마을 안으로 따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하늘 위로 뻗은 계단으로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 마을을 지나면 쉬면서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기도 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이 마을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워 K와 함께 계단을 오르기로 했다. (방금 단체관광객이 우리를 앞서 갔으니 곧 다시 마주치게 될 텐데 조용히 걷고 싶은 탓도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걸어 나니 구글맵에 리뷰가 많은 카페가 보였다. 우리는 꽤나 자리가 차있는 카페의 입구에 남은 자리에 앉아 주스와 베이글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내가 두 번째로 묵은 기부제 알베르게에서부터 같이 걸어온 독일인 친구 L이었다.


분명 오세브레이로에서 아침에 떠나는 길에 앞으로 50km씩 걷게 되어 못 보게 될 것 같다며 작별인사를 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영국인 친구 S의 비행기 출발일이 얼마 남지 않아 외국인 동행이 모두 속도를 올려 걸었는데, 결국 S는 비행기 출발날짜에 맞춰 산티아고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고,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갔단다. 2m 가까이 되는 덴마크인 S는 진작 자기들을 앞서서 벌써 지금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세상의 끝까지 가고 있을 거란다. 자기만 뒤에 남아 원래 페이스대로 걷고 있단다. 그러면서 오늘은 아주 재밌는 알베르게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오늘 내가 가려고 한 알베르게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8시면 숙박객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포르토마린에서 10시에 많고 많은 카페 중 이곳에서 다시 마주치고 같은 곳을 향해 간다니 놀라웠다. 만날 인연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가보다.


우리가 음식을 시키고 난 뒤 갑자기 손님이 몰려들어 L은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주문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따 숙소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한 뒤 먼저 카페를 빠져나왔다. 선착순으로 알베르게가 꽉 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한시보다 먼저 리곤데에 도착하려고 속도를 올렸다. 평소 같으면 쉬어서 갈 법도 했는데, 자리에 앉아 쉬다가 혹시라도 간발의 차로 숙소에 체크인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어 조금만 참고 더 걷자고 다독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은 레온 이후로는 컨디션을 회복해 쉬지 않고 걷는 데에 무리가 없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 저 멀리에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알베르게인가 하는 생각에 스틱에 무거운 체중을 싣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에게 들어와서 무료로 주스 한잔씩 마시고 가라고 안내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들 하나 같이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화살표 뒤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여러 나라말로 쓰여있었다.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이보다 적절한 성경 구절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을 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니 무료로 주스 한잔씩 마시려고 들어온 사람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뒤엉켜 복잡했다. 나에게 주스를 한잔 권하려 하기에 나는 체크인하러 왔다고 하니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것 같은 여자아이가 데스크로 오라고 손짓했다. 여자아이가 앉아있는 데스크 앞으로 가니 알베르게 스탬프가 놓여있었다. 나보고 순례자여권을 펼치라고 손짓하고는 도장도 간신히 잡히는 손으로 쿵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힘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절반밖에 도장이 찍히지 않았고, 아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번 더 쿵 하고 도장을 내리찍었다. 꽉 찬 도장을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방에서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쪽 방에서 나왔다. 나를 다시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과는 구분되어 조용한 라운지가 나왔다. 긴 식탁 옆에 놓인 장의자에 나를 앉히고는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내가 영어로 질문에 답을 하자 이 정도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니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블릿을 가져왔다. 태블릿을 보니 마치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처럼 내 인적사항을 적는 양식이 보였다. 아이는 여러 번 체크인을 받아보았는지 꼭 입력해야 하는 항목들을 알려주고는 이 숙소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저녁 식사부터 취침 시간 전까지는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으니 일정도 참고하라며 시간표를 보여주었다. 자기 나라말도 서툴 것 같은 어린아이가 영어로 손님들까지 맞다니 참 기특한 아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이 날 숙소 봉사자 중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이 친구와 브라질에서 온 한 어머니 둘 뿐이었고,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이 친구가 대표로 체크인을 맡게 된 것이었다.


짐을 챙기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정확히 침대 7개가 한쪽 벽부터 반대쪽 창이 있는 벽까지 놓여있었다. 한두 명은 융통성 있게 더 받아주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침대가 7개라니 놀라웠다. 언뜻 보기에 안쪽에 숨겨진 방에 침대가 더 보였는데 아마 성수기가 되어야만 더 개방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와이파이에 연결하려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벽에 한 사진이 보였다. 스페인어 적혀있는 이 말이 무엇인가 번역기를 돌려보니 아주 재미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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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세요.'


기부제 알베르게다웠다. 서로와 교제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한 것이다. 순례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고 힘든 시간을 함께 나누지만 정작 숙소에 돌아오면 모두들 스마트폰을 켜고 각자 할 일을 하기 바쁘다. 순례를 하러 온 순례객들조차 휴대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니 현대슬롯의 폐해가 몸소 느껴졌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휴대폰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짝 낮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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