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23
중국에는 예로부터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멀리 있어도 만날 것이고, 인연이 없다면 눈앞에 두고도 마주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세브레이로에서 다음 마을로 가던 날 대만 아주머니를 거의 열흘 만에 다시 마주치고 이 문장이 딱 스쳤다.
레온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걸음이 빨라진 데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더 이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세브레이로에서는 오랜만에 일출을 보러 아침 일찍 일어났다. S와 K는 산 위에서 일출이 멋지게 보일 것 같다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여섯 시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아직 밖은 깜깜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S도 일찍 깼는지 1층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출까지는 한 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같이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토스트를 먹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하늘이었지만, 구름이 제법 껴있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선명하게 해가 뜨는 것을 보기에는 글렀다.
아쉬운 마음을 두고 해가 뜨기 전에 잽싸게 밥을 먹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간단한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를 시켜서 S와 나누어 먹고 있는데 가게 문으로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부르고스 이후로는 열흘 가까이 보지 못했던 대만 아주머니 M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가게 문을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도 우리가 반가웠는지 추운 바깥공기에 얼어있던 표정을 환하게 푸셨다. 늘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여 방해가 될까 자리로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일출시간은 지났고, 일출을 보겠다며 아침을 거른 K는 구름 때문에 일출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대신 식당에서 대만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고 소식을 전했다. K는 대만 아주머니를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뒤에서 걷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계속 같이 걷고 계셨다는 사실이 힘이 되는 듯 반가운 얼굴을 비추었다.
그렇게 식당 앞에서 대만 아주머니의 소식을 전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고스 이후로 계속 나와 같이 걸었던 외국인 동행들이었다. 덴마크 할아버지 M이 보이지 않아 행방을 물어보니 노르웨이 할아버지는 어제 순례길을 중도에 포기하고 덴마크로 돌아가셨단다. 그리고 동행 중 20대의 젊은 영국인 친구 S의 비행기 출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 속도를 높여야 한다며 다 같이 오늘 50km를 걷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내가 레온까지 하루 만에 50km를 걸어서 가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독일인 여자아이 L과 2m에 육박하는 덴마크 청년 S은 누가 봐도 하루에 50km를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정작 야리야리한 영국 여자아이 S는 걱정이 가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한번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전하며 오늘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아니니 쉬울 거라며 응원했다. 이들은 오늘부터 앞으로 계속 50km씩 걷기로 해서 오늘로써 더 이상 못 보게 될 것 같다고 아쉽다는 인사를 전했다. 덴마크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지게 됐는데, 이렇게 이 친구들과도 헤어지게 되다니 참으로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다들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인사와 함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떠나는 이들을 축복하고 응원해 주었다. 인연이 닿으면 천리 밖에서도 만난다는 말은 비단 대만 아주머니만을 위한 말은 아니었는지 독일인 L도 우연한 기회에 식당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나는 오세브레이로 정상에서 길을 떠났다. 출발한 지 십 분쯤 지났을 때 대만아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걸음 속도를 올려 아주머니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내가 다가가자 아주머니는 다시 생끗 웃어 보였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볼 수 없었냐고 안부를 묻자 어제 이 언덕 위까지 올라오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오르막길 아래에 있는 직전 마을에서 묵었단다. 아마 레온 주와 산티아고 대성당이 위치한 갈리시아 주 경계석이 있던 근처 마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을 먹으러 가는 도중에 아까 마주친 식당으로 들어와 나와 마주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그동안 쭉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인데 지척에 두고도 열흘 넘도록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아주머니는 항상 누구보다 아침 일찍 출발해 나와는 걷는 시간이 다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 번도 스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두고도 인연이 아니면 스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운명의 신비에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