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24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꼽겠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가지 않은 길은 그러한 철학적 고민을 잘 담아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다시 읽어보게 되는 시다.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이 시가 떠오를 법도 했는데, 거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이 시가 떠올랐다.
오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아카스테야를 지나 하루만 더 걸어가면 순례자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리아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사리아는 순례자들이 완주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인 100km를 채울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순례길을 걸을 수 없는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순례길은 사리아 이전과 이후로 나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것보다 트리아카스테야에서 사리아로 가던 그 길로 사리아가 더 진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 날 하루동안 서너 번은 넘게 두 갈래길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순례길에서는 걷다가 눈앞에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혹시나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의심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순례길에서는 두 갈래 길에 들어서면 반드시 어느 방향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방향인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두 갈래 길에 다다르면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치다 보면 그제야 다른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는 표지석이 보인다.
그러나 트리아카스테야에서 사리아로 가던 날은 정반대였다. 두 갈래 길이 나올 때마다 표지석이 친절하게 양쪽 방향을 모두 가리켰다. 트리아카스테야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서부터 첫 번째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왼쪽은 사모스를 거쳐 사리아로 향하는 길이고 하나는 산실을 지나 사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같이 길을 걷는 외국인 동행을 통해 나중에 전해 들은 사실이지만, 사모스를 거쳐 가는 길은 평지를 걷는 코스가 많아 편하게 걸을 수 있지만 길을 돌아가기 때문에 2시간 정도 더 걸린다고 했다. 산실을 거쳐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 있는 데다가 산길을 걸어야 해서 거칠지만 빠르게 도착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는 전날 밤 미리 사모스에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한 곳이 있다는 사실을 찾았고, 수도원에 들를 생각으로 왼쪽 길을 걸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려 방향을 트니 바로 옆에 사모스 수도원이 나타났다.
순례길은 주로 작은 마을을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멋진 건축물을 보는 것은 간혹 나타나는 대도시 성당뿐이다. 그런 대성당을 제외한다면 사모스 수도원은 순례길에서 손에 꼽는 명건축물이었다. 숲 속에 조용히 위치한 수도원은 나 또한 수도자가 되어 그곳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피어오를 만큼 매혹적이었다. 높이를 자랑하듯 으스대는 대성당과는 달리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자연 안에 스며들고자 하는 수도원의 모습은 겸손해 보였다. 사모스 수도원도 아마 들어가서 견학을 할 수 있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시간에 맞춰가지 못해 안까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멋진 건물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더 짧은 길을 걸으려 산실을 거쳐 가는 지름길을 택했다면 이 길을 못 볼 뻔했다는 생각에 이 길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K와 수도원 바로 뒤에 있는 가게에서 뒤따라 오고 있는 M을 기다리며 온라인카지노를 먹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에 빵을 먹으며 한 삼십 분 정도 쉬고 있으니 M이 사모스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수도원 뒤편도 멋있으니 카페에서 같이 쉬자고 제안했지만 M은 힘들다며 코스를 벗어나 걷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잠시 쉴 수 있도록 5분이 지나고 나서 K와 나는 M과 만나러 다시 수도원이 보이는 다리로 향해 갔다. 다리를 지나쳐가니 저 멀리 벤치에 M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어지간히 코스를 벗어나 걷고 싶지 않았나 보다 생각이 드는 한편 내가 순례길을 막 걷기 시작했을 때 딱 저런 심정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돌아가지 않기 위해 지도를 손에 놓지 않았고, 마을을 지나가면서도 지름길만 택해서 걷는 탓에 보지도 않고 지나친 성당이나 명소들도 꽤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수도원을 보겠다고 두 시간이나 돌아서 이곳에 왔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M의 피로가 가실 때쯤 다시 우리 셋은 사리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가 두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다. 엄밀히 말하면 갈림길 표식이 있지 않았지만 K, M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택해 길을 떠났다. 나는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길로 올라갔고, K와 M은 지름길인 것 같다면서 차도를 따라갔다. 분명히 순례길 표지판은 내가 가는 길 쪼그만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카미노 앱에서는 둘 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K와 M은 이 쪽 길이 30분은 더 단축할 수 있는 길이라며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왼쪽 차도를 택했다. 과연 30분의 차이가 날지, K와 M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일지 궁금해하며 언덕길에 올랐다.
험한 길이 나올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는 평준한 길이 나왔다. 아직은 성수기가 시작되지 않은 탓인지 대부분의 마을에 있는 카페나 식당은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주민조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폐가 체험을 하러 마을에 방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여러 집은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괜스레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산실을 거쳐 사리아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인지 순례자조차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으스스한 느낌에 종종 뒤를 돌아보게 되다가도 이렇게 혼자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순례길이 주는 가장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30분을 더 짧게 걷는 동행 탓에 괜한 경쟁심이 붙어 한 번도 쉬지 않고 두 시간 반을 걸었더니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사리아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K와 M은 이미 사리아에 도착해 식당 안에 들어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사리아 초입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니 이미 K와 M은 맥주를 한잔씩 시켜놓고 피로를 녹이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하루의 피로를 맥주 한잔으로 가시게 한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는 없지만 매일 빠트리지 않고 꼬박꼬박 마시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꽤나 큰 순례길의 행복인 듯했다. 내가 오자 뿔뽀와 감바스, 파스타 등 이것저것을 시켜서 나누어먹었다. 쌀쌀한 날씨에 펄펄 끓는 솥에 담긴 감바스를 먹으니 속부터 온기가 차올랐다. 감바스 국물까지 떠먹는 것이 현지 스타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뜨근한 국밥이 당기는 쌀쌀한 바람에 그대로 숟가락으로 감바스 국물을 떠먹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난 뒤 M은 이미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맡겨두었다면서 바로 숙소로 발길을 향했다. 나는 M과 인사를 하고 K와 함께 사리아를 지나 다음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리아에서 묵는 것이 맞지만, 사리아에서부터는 순례객이 많아지면서 순례길이 시끄러워지고 알베르게 체크인도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어 순례객들이 그냥 지나치는 중간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묵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K에게 제안을 했었다. K는 잠시 고민하더니 기운이 남았는지 그대로 길을 더 걷기 시작했다.
사리아를 떠나 30분 지났을 때 철도처럼 보이는 길이 보이고 그 앞에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별다른 표시 없이 그저 양쪽 다 길이라는 표식만 있었다. 앱으로 보았을 때는 왼쪽만 옳은 길이라고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길이 더 이어져 보이지 않았는데 모험을 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네 시를 넘기고 있었기에 안전하게 왼쪽 길로 가기로 했다. 왼쪽 길로 걸어가니 다시 약간 오르막이 나오고는 조금 더 지나자 넓은 들판이 나왔다. 아침에는 쌀쌀하더니 오후에는 네시가 넘어도 해가 뜨겁게 내리쬐었다. M은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하더니 입고 있던 윗옷을 벗고는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나도 갈아입고 싶었지만 반팔로 갈아입으면 내일 입을 옷이 없기에 꾹 참고 길을 걸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걸은 탓에 마실 물도 다 떨어지고 땀으로 옷이 범벅이 되어 어디 쉴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앞에 먼저 걷고 있던 K가 길 옆에 놓인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웬 선반 위에 스탬프가 놓여있었다. 순례자들이 식당이나 알베르게에 갈 때마다 기념으로 찍은 스탬프였다. 사리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스탬프를 찍는 것은 보통 체크인을 하는 알베르게에 식당이 좋았다면 식당 한 곳 정도밖에 없었는데 확실히 사리아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사람이 많아져서인지 스탬프를 찍을 곳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스탬프는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왼쪽을 돌아보니 한국 편의점 같이 파라솔에 플라스틱 의자와 바카라상 여러 개가 놓여있고 한편에 자판기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목을 축일 겸 탄산을 마시자고 하고 그대로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내리쬐던 햇빛에 타들어갈 것 같은 더위가 그늘 밑에 앉아 쉬니 바람이 솔솔 들어오며 싹 가신다. 하루 중 이렇게 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며 K와 농담을 주고받는데 누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 마흔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국적이 잘 가늠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크라이나에서 왔고, 스페인에 산지는 십 년이 넘었단다. 며칠 전 폰세바돈에서도 우크라이나 사람을 한번 봤던 탓인지 평소 같으면 엄청 낯설 법도 했는데 은근한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아저씨는 벌써 여러 번 순례길을 완주했는데 이번엔 자전거를 타고 완주하고 싶어서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단다. 아저씨는 사람마다 순례길을 걷는 방식은 제각각이라면서 재미난 사진을 하나 보여주셨다. 바로 작은 나귀에 짐을 싣고 사막샌들에 방랑자 차림으로 걷는 수염 긴 젊은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파리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대성당을 거쳐 포르투로 향하고,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모로코를 지나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뒤 예루살렘까지 가는 순례객이란다. 몇 년 전에 이 청년을 길에서 마주쳤고, 연락처를 교환해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을 지켜봤단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순례자가 아니겠느냐면서 사리아에서부터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사리아부터는 확실히 순례길이 달라질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아저씨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길을 떠났다. 아저씨가 떠나고 나서 K와 나도 더 늦어지기 전에 오늘 묵을 마을인 모르가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