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숫자가 삶으로 치환되는 기적 : 현장 활동가의 일지]
국제개발협력 현장에 장기 파견된 활동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예기치 못한 변수나 척박한 환경이 아니다. 때때로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을 무너뜨리는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타국에서 프로젝트를 이끄는 일은 고도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작업이고, 그 에너지를 지탱하는 근간은 결국 ‘잘 먹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처럼 고려인 문화가 섞여 있어 한국 식자재를 구하기 쉬운 곳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하지만 물가가 낮은 저소득 국가에서 오래 살다 보면, 한국 마켓의 식재료 가격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한국보다 20~30% 비싼 고추장과 김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자제하게 되는 것이 오지 활동가의 소박하고도 서글픈 현실이다. 특히 인프라가 열악한 타지키스탄 같은 곳은 식재료를 수급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전'이 된다.
지난 9월,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인천 연안 부두의 젓갈 시장으로 향했다. 해외 파견자들에게 젓갈은 최고의 ‘가성비 생존 식량’이다. 염장 식품이라 냉동 포장만 잘하면 며칠의 이동 시간도 거뜬히 버텨내고, 무엇보다 갓 지은 쌀밥 위에 젓갈 한 점만 올리면 그곳이 바로 한국이 되는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시장에 늘어선 선홍빛 명란젓과 낙지젓, 오징어젓갈의 행렬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듯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왔다는 말에 사장님은 "멀리서 고생한다"며 박카스 한 병을 툭 내어주셨다. 그 시장 특유의 정과 활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현장에서 홀로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 같았다.
흔히 국제개발협력이라고 하면 거창한 담론과 화려한 지표를 떠올리지만, 그 지표를 만들어내는 활동가의 일상은 사실 '먹고사는 문제'와의 치열한 사투다. 특히 프로젝트 대상 지역이 지방 소도시나 오지인 경우,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때 활동가에게 필요한 필수 장비는 화려한 보고서 기술이 아니라, 든든한 전기압력밥솥과 고향의 맛을 응축해 온 젓갈 통이다.
요리 실력이 없어도, 입맛이 없어도 젓갈 하나에 밥을 물아 먹으며 기운을 차려야 다시 현장으로 나갈 수 있다. 먹는 즐거움을 잃은 활동가는 현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자신만의 ‘먹는 즐거움’을 찾는 것은 활동가로서의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기 관리다.
인천에서 가져온 젓갈은 무사히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 내 냉장고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아껴두느라 개봉 전이지만, 마음이 유난히 허기지거나 현장 업무에 지친 날 나는 이 '고향의 조각'을 꺼낼 것이다. 밥심으로 다시 현장을 누비고, 그 힘으로 주민들과 웃으며 소통하는 일. 어쩌면 위대한 개발협력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활동가의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젓갈 한 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