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숫자가 삶으로 치환되는 기적 : 현장 활동가의 일지]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단 하나의 핵심 질문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자기 일처럼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는가?”
오늘날의 개발협력 현장에서 단순히 물건을 주고 떠나는 시혜적 지원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긴급구호 상황이 아닌 이상, 모든 프로젝트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안고 디자인된다. 마을에 수도관을 깔고 학교를 짓는 외형적인 성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그 수도관이 마르지 않게 관리하고 학교의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울 ‘주인’을 세우는 일이다. 그 주인은 외부에서 온 파견 활동가가 아니라, 바로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주민들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주인의식'은 결코 문서나 강의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기여(Contribution)를 통해 싹튼다. 사람의 마음은 신기하게도 자신이 땀 흘려 기여하고, 자신의 소중한 자원을 보탠 곳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초기 단계부터 주민들의 역량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들이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 치열하게 협상한다.
어떤 마을에는 수도관 연결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우리가 자재를 지원할 테니,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고 관을 묻는 노동력은 마을에서 전적으로 제공하라”는 조건을 건다. 때로는 지방 정부의 예산을 끌어오도록 압박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금을 하게 유도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무상으로 땅을 임대해 주고, 특별한 기술을 가진 이는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며, 일반인들은 자원봉사로 힘을 보탠다. 만약 주민들의 이런 자발적인 참여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프로젝트 대상 지역에서 제외하거나 다른 마을과 경쟁을 붙이는 강수를 두기도 한다.
얼핏 보면 냉정하고 가혹한 조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현장을 지키는 활동가가 부려야 하는 가장 '선의의 고집'이다. 주민들의 피와 땀이 섞이지 않은 프로젝트는 지원금이 끊김과 동시에 녹슬고 방치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의 대정부 관계자, 까다로운 비즈니스 이해관계자, 그리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이 정교한 조율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활동가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최근 나는 이 '참여의 마법'이 일으킨 믿기 힘든 기적을 목격했다. 마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보건소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배정된 프로젝트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물가 상승과 현장의 변수들은 우리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누군가는 프로젝트를 축소하거나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때 기적이 시작되었다.
보건소가 우리 마을에 얼마나 절실한지 알고 있던 주민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회의가 열리고 주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모으기 시작하자, 그 열기는 지방정부까지 움직였다. 놀랍게도 주민들과 지방정부가 스스로 추가 확보한 기금은 우리가 초기에 설정했던 프로젝트 예산의 3배가 넘었다. 외부의 지원금보다 주민들의 의지가 더 큰 동력이 된 순간이었다. 마침내 완공된 보건소는 단순한 의료 시설이 아니라, 그 마을 공동체가 힘을 합쳐 일궈낸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주민들은 이제 그 보건소의 벽돌 한 장, 약병 하나도 자신의 것처럼 아끼고 살핀다.
화려한 글자로 채워진 프로젝트 제안서(Proposal)를 현장에서 그대로 실현해내는 일은 늘 거대한 도전이자 부담이다. 도너(Donor) 단체와 후원자에게는 혁신적인 성과를 증명해야 하고, 현장에서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 거대한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그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내가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결국 먼지 날리는 마을 광장에서 마주하는 뜨거운 생동감 덕분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예산의 한계를 넘어 기금을 마련하고, 함께 삽질하며 땀을 흘리는 그 모든 과정은 늘 감동적이다. 마침내 우리 마을에 보건소가 생겼다며, 우리 아이들이 이제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며 환하게 웃는 주민들을 만나는 순간. 그 찰나의 기쁨은 사무실에서의 고단한 서류 작업과 지루한 협상의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보이지 않는 후원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만나 거대한 기적을 일궈내는 현장. 그 역동적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제개발협력 활동가의 가슴은 다시금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