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보다 실무자, 중앙아시아 대정부 협상의 기술

[제4장: 숫자가 삶으로 치환되는 기적 : 현장 활동가의 일지]

중앙아시아 3개국—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 공화국—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내가 마주한 가장 큰 숙제는 현지 정부와의 협업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었다. 국가마다 정치 구조와 비영리단체(NGO)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명확하고 공통적인 한 문장의 메시지가 있다. “다양한 분야의 지원은 환영하지만, 정치적인 참여와 간섭은 하지 말길!”


현장에서 구호성 활동이나 기초 인프라 구축 같은 하드웨어 지원 사업은 언제나 극진한 환영을 받는다. 이는 정부의 부족한 예산을 메워주는 동시에, 지역 정치인들의 성과로 가시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동가와 국제 도너(Donor)들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건물을 짓는 것보다 그 안을 채울 사람들의 '역량 강화'와 '주민 조직화'라는 소프트웨어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여기서 활동가의 깊은 고민이 시작된다. 역량 강화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오기까지 막대한 비용과 긴 시간이 소요된다. 수원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다리나 보건소 건물 없이 교육에만 예산을 쏟는 것을 '실효성 없는 낭비'로 치부하기 쉽다. 만약 우리가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서구적 관점의 소프트웨어만 고집한다면, 프로젝트는 현지에서 겉돌다 이도 저도 아닌 실패로 끝나기 십상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현장 활동가의 역량이다. 때로는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인프라 지원을 마중물로 삼아 정부의 신뢰를 얻고, 그 토대 위에서 서서히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얹어가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정답은 교과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 정부와 우리가 맺는 전략적 파트너십의 농도에 달려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얻은 실전 노하우 중 하나는 ‘최고위급보다 실무자’에 집중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장차관이나 주지사 같은 고위 관료와의 인맥에 열을 올리지만, 그들은 정치적 풍향에 따라 언제든 자리를 옮기는 가변적인 존재들이다. 오히려 정부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무자급 인사들과 깊은 신뢰를 쌓는 것이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대정부 관계는 차가운 외교와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전장이지만, 그 끝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결국 '인류애'라는 순수함이다. 우리가 단순히 예산을 집행하러 온 외국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진정성 있는 파트너라는 사실을 증명할 때 정부의 문은 비로소 활짝 열린다.


486574311_9640783169331637_1221068524214215190_n.jpg키르기즈공화국, 농업부 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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