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의 기록, 언어 너머의 마음을 짓는 시간

[제4장: 숫자가 삶으로 치환되는 기적 : 현장 활동가의 일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발을 들인 지도 어느덧 햇수로 20년 차에 접어든다. 그중 16년을 해외 현장에서 연속적으로 보냈으니, 대학 졸업 이후 내 생의 가장 뜨거운 시간은 대부분 낯선 타국 땅 위에 새겨진 셈이다. 처음 시작할 땐 그저 딱 1년만 경험해 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장기 파견 중인 동료들 대부분이 비슷한 시작을 고백하듯, 나 역시 이 길이 16년이라는 긴 마라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오래 이 땅에 붙잡아 두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배움의 기쁨'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은 도서관의 정적 속에서 바카라장을 넘기며 얻는 지식이 아니다. 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맞닥뜨리고, 꽉 막힌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나가며 온몸으로 습득하는 생존의 기술이다. 현장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교과서였고, 부딪히는 모든 사건은 나를 성장시키는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가르침 중 가장 준엄했던 것은 바로 ‘소통’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는 법이었다.


사업국 현장에서 업무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어려움은 커뮤니케이션의 시행착오다. 흔히 현지어를 유창하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선교사처럼 그 나라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온 이들에게 언어는 절실한 생존이지만, 1~2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활동가들에게 현지어는 늘 ‘생존’과 ‘효율’ 사이의 딜레마를 낳는다. 업무 공식 언어인 영어를 쓰며 현지 직원들과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큰 지장이 없으나, 진짜 소통이 필요한 곳은 늘 사무실 밖, 먼지 날리는 마을 광장에 있었다.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16년의 세월은 나에게 '언어의 유창함'보다 '문화적 존중'이 먼저임을 가르쳐주었다. 아무리 현지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와 정서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 뛰어난 실력은 오히려 상대를 위협하거나 오해를 사는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한다. 반면, 언어는 투박하고 서툴러도 현지인들의 삶에 깊이 ‘딥다이브(Deep-dive)’하여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활동가는 '척하면 척'하고 상대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낸다.


소통의 대상은 마을 주민뿐만이 아니다. 국제개발의 현장은 복잡한 이해관계의 전장이다. 때로는 외교적 이권과 정치적 목적을 앞세운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밀당을 벌여야 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명분과 ‘내정간섭’이라는 오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그들을 설득해내는 것은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정교한 협상의 기술이다. 또한, 현장의 리스크를 숨기려는 지역 리더들의 속마음을 캐내기 위해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 동안 신뢰를 쌓아야 하는 과정도 소통의 일부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인간사의 모든 굴곡을 경험했다. 믿었던 직원의 배신에 밤잠을 설쳐보기도 했고, 반대로 풋내기였던 현지 직원이 훌륭한 리더로 성장하는 모습에 가슴 벅찬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다. 관리자로서 때로는 칼같이 냉철하게, 때로는 형처럼 따뜻하게 다양한 가면을 써야 했던 그 모든 순간은 나를 단련시켰다. 결국, 국제개발협력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짓는 일이며, 후원자의 소중한 기부금이 현장에서 헛되이 쓰이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또한 현장의 진실된 상황을 본부와 후원자에게 끊임없이 설득하고 소통하는 정직함에 있었다.


많은 동료가 한국의 안정된 관계와 경제적 안락함을 뒤로하고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망설인다. 하지만 나는 정체된 삶보다 매일이 도전적인 이 긴장감을 선택했다. 안주할 틈을 주지 않는 현장의 압박감은 나를 끊임없이 단련시켰고, 그 안에서 발휘되는 순발력과 결단력은 16년 차 활동가인 나를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든다.


국제개발협력의 길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현장은 당신에게 화려한 명성을 주지는 않지만, 대신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단단한 내면'과 '삶을 주도하는 힘'을 선물할 것이다. 언어라는 도구를 넘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법을 배우는 시간. 16년 전, 1년만 버텨보자던 청년의 무모한 도전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처럼, 당신의 1년 또한 평생을 지탱할 위대한 배움과 소통의 시작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키르기스스탄 지여개발프로젝트 마을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