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의 이면, 뜨거운 가슴보다 차가운 머리

[제4장: 숫자가 삶으로 치환되는 기적 : 현장 활동가의 일지]

국제개발협력 비영리단체(NGO)의 장기 파견 직원으로 산다는 것. 누군가는 나를 보며 "세상을 바꾸는 숭고한 일을 한다"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또 누군가는 뙤약볕 아래 마을 사람들과 땀 흘리며 삽질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16년 차 활동가인 나의 실상은 그 상상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나의 주 무대는 마을 광장이 아니라 먼지 쌓인 서류와 씨름하는 사무실 안이고,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삽이 아니라 치밀한 기획력과 리스크 관리 역량이기 때문이다.


장기 파견을 나온 한국인 관리자의 하루는 여느 평범한 온라인 게임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일하는 장소가 해외이고, 동료의 대다수가 현지 로컬 직원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끊임없이 협상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현지 정부와 업무를 조정하며, 예산 집행의 투명성을 감시하고, 각종 인사 이슈를 해결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현장에서 마을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듣는 소중한 역할은 주로 현지어에 능숙한 로컬 직원들의 몫이다.


외부에 공유되는 보고서나 홍보 영상 속 사진 한 장에는 대개 마을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남기기 위해 활동가는 사무실 창가에서 플랜 A, B를 넘어 C까지 고려하며 피 말리는 긴장감을 견뎌야 한다. 정해진 예산과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비영리단체(NGO) 활동가라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을 한다는 뿌듯함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장을 잘 모르는 이들의 순진한 오해일지도 모른다. 뜨거운 가슴보다 더 필요한 것은, 변수 가득한 현장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차가운 머리와 정교한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냉정한 비즈니스 같은 일상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프로젝트의 성과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원거리 마을을 방문하는 날이면, 그간의 수치와 지표로 인한 피로감이 씻은 듯 사라진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손님 대접에 진심이다. 가까운 사이라도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한국과 달리, 이곳에선 무조건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예의다.


상다리가 휘어질 듯 차려진 현지 음식을 마주할 때면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 특유의 누린내 때문에 넘기기 힘든 양고기 수프가 나올 때도 있지만, 그릇에 담긴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정성껏 수저를 든다. 나를 환대하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마을 사람들의 고마움은 내 개인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국의 후원자들과 동료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저 그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는 가교일 뿐이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결과보고서에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이 실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긴장과 눈물이 녹아들어 갔을까. 현장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수고와 노력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기적의 결집체다. 나는 오늘도 사무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엑셀 시트의 숫자를 들여다본다. 이 메마른 숫자들이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좋은 변화'로 치환될 것임을 믿기에, 나의 일상은 여전히 팽팽하고 뜨겁다.



486530748_9655461064530514_6963449880668162329_n.jpg키르기스스탄 마을 행사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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