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나는 운동처방사였다. 말이 좋아 처방사지, 국가 공인은커녕 변변한 민간 협회 자격증조차 갖추지 못한 이른바 ‘야매’였다.
첫 온라인 게임이었던 병원 물리치료실 보조 10개월을 시작으로, 운동처방실을 구색 맞춰 차려둔 한의원에서 1년, 대전의 양방병원 키 성장 클리닉에서 1년을 굴렀다. 그 뒤 1년은 어쩌다 연이 닿아 키 성장 관련 의료장비를 개발하고 납품하는 벤처 회사에 몸을 담았다. 전공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결론 끝에 사표를 던지고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로 돌아온 뒤 8개월간 백수 생활이 이어졌다. 겉으로는 취업 준비생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크게 조급하진 않았다. 당시 의료계에는 기묘한 운동 붐이 불고 있었다. 양방과 한방을 가리지 않고 저마다 비급여 수익을 노리며 '운동처치실', '성장클리닉'이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달던 시절이었다. 시장의 수요는 폭발하는데 정작 현장에 밀어 넣을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으니, 이 바닥에서 몇 년 구른 내 몸값은 어떻게든 팔릴 거라는 안일한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시장의 판은 순진한 비전공자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뒤집혔다. 돈 냄새를 맡은 물리치료사들이 도수치료라는 거대한 깃발을 꽂고 우르르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기다렸다는 듯 제도권의 손을 들어주며 급여·비급여 처방 항목을 촘촘히 신설해주었다. 제도권 밖의 우리들은 "운동이야말로 우리의 고유 영역"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메아리에 불과했다. 제도권의 테두리 밖에서 우리는 그저 흰 가운을 걸친 헬스트레이너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밥벌이의 낭만은 끝났고, 생존을 위한 냉혹한 채용 전선만 남았다.
그때 한 줄기 동아줄이 내려왔다. 광주에 새로 문을 여는 대형 한의원에서 어린이 키 성장 클리닉을 대대적으로 론칭하며 운동 전문가를 구한다는 공고였다. 자신감이 차올랐다. 대전 양방병원에서 키 성장 센터장을 지냈고, 키 성장 의료기기를 직접 만들고 팔아본 경력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이 채용 공고는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옷이나 다름없었다.
서류 통과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해야 하니까 미리 얼굴이나 보자."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켜며 동네 친구들과 합격 축하 술자리 약속까지 잡아두었다. 면접장에서도 막힘없이 말을 쏟아냈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다음 면접 대기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우리 학과 후배였다. 나보다 머리가 비상했던 그 녀석은 서울 명문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고, 국바카라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고향으로 내려오기 위해 지원서를 냈다고 했다.
"형, 여기서 뵙네요!" "어, 그래… 잘되면 좋겠네."
웃으며 어깨를 툭 쳤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 밤, 아무리 노려보아도 울리지 않는 가로본능 휴대폰을 앞에 두고 소주 석 잔을 연거푸 털어 넣었다. 나이 먹은 경력자보다, 젊고 스펙 좋은 서울 석사 출신을 뽑는 것은 자본주의 슬롯에서 너무나 당연한 섭리였다. 억울함과 패배감에 젖어 친구 앞에서 목을 놓아 울다 필름이 끊겼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찌르는 두통 속에 깬 휴대폰 화면에 낯선 번호의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전화를 걸자 원무과장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씨? 연락이 좀 늦었죠. 내일 10시까지 병원으로 나오실래요? 인테리어 공사 중인데 장비 배치도 같이 보죠."
전화를 끊자마자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포효했다. "그럼 그렇지! 굴러먹은 짬바가 있는데 나를 안 뽑고 누굴 뽑아!"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출근 후 알게 된 사실은 참담했다. 1등으로 합격했던 후배가 개인 사정으로 입사를 고사했고, 지원자가 둘뿐이었던 탓에 차선바카라인 내가 어부지리로 낙점된 것이었다.
나는 실력으로 뽑힌 게 아니었다. 후배보다 나이는 많았고, 학력은 초라했으며, 연차만 어설프게 쌓여 인건비 가성비가 떨어지는 '2등 탈락자'였을 뿐이다. 시장은 나를 원한 게 아니라, 당장 내일 개원에 맞춰 세워둘 빈자리의 머릿수 하나가 급했던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밥그릇을 쥐었으니 그만이었다. 운동처방실 업무는 손바닥 안이었다. 일반인과 환자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분야였기에, 적당한 해부학 용어와 운동 역학 단어를 섞어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사람들은 감탄 어린 눈빛으로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늘어나고 병원이 번창하자 내 밑으로 후임이 들어왔고, 직함은 '운동처방실장'으로 올라갔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늘어났을 때, 나는 낡은 중고차 한 대를 뽑았다. 덜컹거리는 중고차 운전대를 잡고 퇴근할 때면, 2등으로 주워 담은 밥벌이라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고만장해졌다.
그 기묘한 안도감에 취해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나를 뽑아주었던 원무과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제 방으로 불렀다. "실장님, 이것 좀 봐줘요. 기껏 작성해 둔 보고서 파일이 갑자기 안 열려요. 다 날아간 거 아니죠?"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한글 파일의 이름이 그냥 <작성중>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일 이름을 바꾸면서 확장자인 .hwp까지 지워버려 윈도우가 연결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허무한 오류였다.
키보드를 두드려 뒤에 .hwp 석 자를 붙여주었다. 딸깍. 문서가 마법처럼 열리자 원무과장은 입을 떡 벌리며 나를 무슨 천재 해커라도 보듯 치켜세웠다.
"아니, 실장님은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도 박사네!"
그날 이후 병원 안에서 컴퓨터가 멈추거나 프린터가 삐걱거리면 무조건 나를 찾았다. "노 실장이 가서 못 고치면 그건 기계를 버려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복도에 돌았다. 칭찬에 취해 나는 병원 곳곳을 누비며 의기양양하게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그 무렵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동정표로 얻어걸린 온라인 게임에서 누리던 달콤한 전성기, 그리고 무심코 눌렀던 그 사소한 '딸깍' 한 번이, 나를 운동처방실의 안락함을 앗아갈 줄이야. 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운동처방실로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