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일하세요?"

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byNoA


수화기 너머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아니,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 계세요?"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목을 움츠린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읊조렸다.

"죄송합니다… 인수인계를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한 번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원무과 사무실의 공기가 유독 서늘했다. 바카라상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심평원 서류 뭉치와 모니터에 가득한 미확인 업무 메일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내가 대체 왜 이 낯선 인간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빌고 있는 거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나는 병원의 '독보적인 능력자'였다. 당시만 해도 병원 직원 대다수는 컴퓨터와 친하지 않았다. 파워포인트는 외계의 프로그램 취급을 받았고, 엑셀은 미적분보다 난해한 벽이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대장이라더라. 별볼일없는 실력으로 나는 이 병원에서 유일무이하게 스마트한 엘리트였다. 매일 저녁 시재가 안 맞아 30분 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야근하던 접수처 직원에게 =SUM(A1:A30) 함수 하나를 걸어 퇴근을 선물했고, 오피스가 깔려 있지 않아 대표원장이 열지 못하던 발표 자료는 가벼운 '뷰어 프로그램' 하나를 깔아 보란 듯이 띄워주었다.

어려울 것 없는 사소한 조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나는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법사 같았을 것이다. 전임 원무과장은 틈만 나면 "노아 실장님, 이것 좀 부탁해요."라며 문서 작업을 맡겼고, 나 역시 칭찬에 우쭐해 기꺼이 돕곤 했다.


입사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원무과장이 퇴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인자하고 다정했으며 세심한 사람이었다. 전체 회의에서 그가 퇴사 인사를 전할 때 몇몇 직원들은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회의가 끝나고 원무과장은 나를 조용히 제 방으로 불렀다. 또 컴퓨터에 먼지라도 끼었나 싶어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섰던 그 방에서, 나는 차기 원무과장으로 지목되었다.

원무과장은 자신의 본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물러나야 하는데, 병원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행정 일머리(컴퓨터 활용 능력)가 뛰어난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대표원장은 이미 결재를 마쳤다고 했다. 나만 결정하면 되는 상황.


내가 지켜본 원무과장의 업무는 쉬워 보였다. 병원 라운딩을 돌며 청소 상태를 점검하고, 원장단 심부름을 챙기고, 회의 때 무게나 잡고 있으면 되는 자리 같았다. 어차피 굵직한 경영은 원장이 다 할 테니, 그냥 옆에서 서포트 정도나 해주면 되는 듯 했다. 젊은 패기로 부딪히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 따른 조건들은 구미가 당겼다. 급여 인상, 별도의 독방 사무실, 병원이 망하지 않는 한 보장되는 정년. 20대 후반의 청년에게 '과장'이라는 타이틀과 승진. 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그 날 저녁, 친구들을 모아 승진턱을 내며 거들먹거렸고 세상이 모두 내 것만 같았다. 이제 앞으로 꽃길만 걸으면 된다. 대타로 입사했지만 나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원무과장을 따냈다. 나는 2등이었지만 승리하였다는 도취감에 사로잡혔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 1주일간의 인수인계. 나는 운동처방실장직을 후배에게 인계하면서 원무과장에게 업무 인수를 받아야 하는 바쁜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바쁘지 않았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것은 독이 든 사과라는 사실을.

나는 업무 인수를 위해 원무과장을 찾았지만, 원무과장은 병원 밖 볼일로 내내 자리를 비웠다. 그의 업무라곤 퇴근 직전 나타나 모두를 배웅하고 마지막에 문을 닫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마지막 날, 그는 내게 A4 용지 딱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해야 할 일의 '목록'만 성의 없이 적혀 있었다.

보험 청구 (매월)

급여 계산 및 4대 보험 (매월)

시재 정산 및 결산 (매일)

직원 근태 및 컨디션 관리

원장단 행정 지원

기타 등등

종이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뉴얼은 단 한 줄도 없었다. A4용지를 읽으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내게 그는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일 많지 않아요. 노아 실장님은 똑똑하니까 잘할 겁니다. 모르는 건 언제든 전화해요. 난 실장님 믿어요. 아 이제는 과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

그렇게 꿀 같은 덕담을 남기고 떠난 그를, 나는 1년이 지나서야 겨우 한 번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날 이후로 나의 전공을 떠나 보냈다.

3화.jpg

원무과의 평화는 출근 사흘 만에 산산조각 났다. 월말이 다가오자 EMR 전산 프로그램은 알 수 없는 에러 코드를 뿜어냈고, 건강보험공단과 심평원 청구 화면은 외계어로 가득했다. 숫자가 1원이라도 안 맞으면 결산이 넘어가지 않았고, 삭감 통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원장실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운동역학과 해부학 용어에 파묻혀 살던 비전공자가 '의료 수가 코드'와 'EDI 청구 시스템'의 바다에 맨몸으로 던져진 것이다.

전임자에게 전화를 걸면 신호음만 공허하게 울릴 뿐 통화는 번번이 끊겼다. 결국 내가 기댈 곳은 프로그램 업체의 고객센터와 심평원 콜센터뿐이었다.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며 "그런 것도 모르냐"는 모멸적인 핀잔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엑셀 단축키 몇 개 안다고 행정을 안다는 착각, 남의 일이 쉬워 보인다는 오만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을 부르는지.

하지만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당장 내일 직원들의 월급이 나가야 했고, 환자들의 진료비 청구가 멈추면 병원의 돈줄이 끊어지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은 지 오래였다.


낮에는 모욕을 삼키며 콜센터 상담원의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 적었고, 밤에는 불 꺼진 병원에 홀로 남아 베개만큼 두꺼운 요양급여 적용기준 바카라자를 백과사전처럼 파고들었다. 운동처방실에서 환자들을 앞에 두고 으스대며 읊어대던 해부학 지식 따위는 이 거대한 행정의 늪 앞에서 단 1밀리미터의 방패도 되어주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처방도 능숙하고 컴퓨터까지 척척 다루는 병원의 대체 불가능한 인재였다. 하지만 이 낯선 원무과의 바카라상 앞에 앉은 순간, 나는 그저 밥값도 못 하는 생초짜이자 잉여 인력으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돈을 내고 배워올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무 행정이란 정형화된 학원 강의나 표준 커리큘럼이 존재하는 분야가 아니다. 도제식으로 사수가 부사수에게 귓속말로 넘겨주듯 전수되는 철저한 음지의 영역이다. 게다가 병원의 수익과 직결된 청구 노하우나 삭감 방어 기술은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병원 밖 타인에게는 절대 털어놓지 않는 일종의 영업기밀이자 금기였다.

물어볼 선배도, 기댈 매뉴얼도 없는 낭떠러지였다. 결국 믿을 것은 사지 멀쩡한 몸뚱어리 하나로 바닥을 기며 온몸으로 부딪히는 무식한 방법뿐이었다.


운동처방실에서는 가운을 걸치고 어깨를 쫙 편 채 전문가 행세를 하던 내가, 이제는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이 되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화기에 대고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것만 한 번만 더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원무과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와 무거워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밤하늘의 차가운 별을 올려다볼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서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올라왔다.

'내일 출근하면 나는 또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슨 일로 죄송해야 할까.'

전공이라는 온실을 완전히 벗어난 대가는 잔인하도록 뼈아팠고, 내가 서 있는 현실은 오직 생존을 위해 매일 자존심을 갉아먹어야 하는 냉혹한 야생 그 자체였다.

이전 03화2화: 나는 승리한 2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