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들기 전 노곤하게 풀어진 내 손가락이 고모의 마디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세월에 닳아 굵어진 고모의 손마디는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창밖으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모는 내 손을 가만히 쥔 채 옛날이야기를 꺼내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촌 순이는 까맸어.”
고모(경애)가 들려준 이야기는 까맣고 조그마하던 사촌 순이와 어린 시절의 경애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하얬다."
내가 아무리 단정하게 굴고 어른들 비위를 맞춰도, 할머니와 삼촌들은 늘 사촌 순이만 싸고돌았다. 순이는 어릴 적 병을 앓은 뒤로 말이 둔하고 행동이 굼떴지만, 식구들은 그저 가엾다는 이유로 순이의 손에 순무김치 한 조각, 알사탕 한 알을 먼저 쥐여주곤 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온 친척이 감색 비단에 분홍빛 꽃장식이 달린 예쁜 모자를 선물로 가져왔다.
순이가 서툰 손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가 열리자 모자 테두리에 붙은 감색 꽃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이는 모자를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순이 머리에 저 모자가 있는 게 죽도록 싫었다.
어느 날 오후, 부엌 아궁이 앞에서 순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순이의 눈동자 안에서 아궁이 불빛이 잘게 흔들렸다. 순이는 가슴 품에서 그 감색 모자를 꺼내 들고 가만히 만져보고 있었다.
나는 홧김에 담벼락 밑에 떨어져 있던 깨진 기왓장을 집어 들었다. 차라리 순이가 그 깨진 기왓장으로 나를 내리치길 바랐다.
그러나 순이는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모자를 아궁이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모자에 달린 감색 꽃이 불길을 머금고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고는 흙물이 든 손으로 자기 눈가를 쓱 문질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바보 같은 웃음이었는데, 그날만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울 살면서 이상하게 그 부엌문틈에서 나를 보며 웃던 순이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몰라서 웃었는지, 울음을 참으려 웃었는지…… 그 깊은 속을 내가 어떻게 다 알겠니.”
고모의 손이 내 손을 다정하게 그러쥐었다.
“지난번에 내려갔을 때 순이를 만났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마주 보고 서서 그 사탕을 입에 물고 웃었지. 하얀 가루가 입가에 다 묻은 채로 말이다.”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대추나무 가지를 흔들며 사락사락, 아궁이 속 짚이 타들어 가던 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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