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소래산 자락에 깔릴 때면 산길을 오르는 이들의 발걸음을 본다. 한 발이 땅을 지긋이 딛고 뒤로 밀려나면 다른 발이 다시 앞으로 나선다. 그 발걸음의 고요한 반복을 바라보다 문득 둥근 바퀴 하나가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이란 저마다 가슴속에 자신만의 바퀴 하나를 품고 한 세상 구르다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바퀴의 본질을 '구름'에 둔다. 바퀴는 구르기 위해 태어났고, 멈춰 선 바퀴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바퀴의 진가(眞價)는 단순히 동그랗다는 외형에 있지 않다. 거친 지면과의 마찰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바꾸어내는 데 있으며, 중심을 뚫고 지나가는 회전축을 품고 있다는 데 있다. 적은 힘으로 더 멀리 나아가고자 했던 인간의 절실함이 만들어낸 이 작은 원(圓) 안에는 오랜 삶의 지혜가 배어 있다.
인생을 바퀴에 비유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축과 테두리의 관계다. 바퀴의 테두리는 세상이라는 지면과 직접 부딪히는 부위다. 자갈밭을 만날 때도 있고, 매끄러운 아스팔트나 미끄러운 흙길을 지날 때도 있다. 때로는 뾰족한 돌에 긁히고 닳아 고무가 찢겨 나가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오해, 세월과 함께 희미해지는 이름과 자리,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련들이 일상의 테두리를 쉴 새 없이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테두리가 아무리 거칠게 흔들려도 바퀴가 제 구실을 잃지 않는 것은 그 한가운데를 묵묵히 꿰뚫고 있는 축이 있기 때문이다. 테두리는 끊임없이 돌지만, 회전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동중정(動中靜)', 즉 거센 움직임 한가운데 서 있는 깊은 고요함이 바로 이 축이다. 세월이 흐르고 삶의 겉모습이 지워져 갈 때 우리를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 단단히 박혀 있는 나만의 가치관이자 내면의 중심축이다. 축이 단단하면 테두리가 닳고 상처 입어도 쉽게 방향을 잃지 않는다.
바퀴의 속성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현재'라는 시간의 오묘함을 배우게 된다. 거대한 바퀴라도 지면과 맞닿는 곳은 하나의 점(點)처럼 작다. 방금 땅을 딛었던 부분은 이미 공중으로 떠올랐고, 아직 땅에 닿지 않은 앞쪽 테두리는 허공에 떠 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이 작은 접촉점 위에 서 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미련은 이미 지면을 떠난 바퀴 표면과 같아서 그것에 매달려도 이미 떠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역시 공중에 떠 있는 바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삶은 결국 지금이라는 작은 점을 하나씩 지나며 긴 궤적을 그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마찰은 역설적인 힘이다. 바퀴가 땅을 밀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바닥을 붙잡아 주는 마찰이 필요하다. 살면서 만나는 시련과 상처 역시 인생의 마찰력이다. 때로는 나를 옥죄던 세상의 저항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기도 했음을 깨닫는다. 삶에 남은 상처는 나를 갉아먹은 흔적만은 아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했다는 바퀴 자국이기도 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지만, 바퀴의 쓰임은 그 가운데의 비어 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을 전한다.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욕망과 명예, 타인의 시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마음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조금 비워두어야 사람을 품을 수 있고, 세월의 변화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소소한 일상을 가꾸고, 글을 쓰고, 산바카라을 하며 호흡을 조율하는 일. 그것이 매일 반복되는 삶을 매너리즘이 아닌 새로운 여정으로 만드는 비밀이다. 바퀴는 매번 같은 원을 그리며 회전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땅을 두 번 밟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은 오늘 하루도, 실상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처음 만나는 하루다.
그러나 무조건 빠르게 구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정확히 멈출 수 있는 제동 장치가 없다면 그 바퀴는 결국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가끔은 스스로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내 삶의 축이 여전히 중심을 잡고 있는지 점검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노을이 소래산 자락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돌아보면 내 삶의 바퀴도 많이 닳았다. 돌부리에 긁힌 자리도 있고, 깊이 파인 흔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닳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바퀴는 없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하루라는 길 위를 구른다. 내가 지나온 자리에는 나만의 바퀴 자국 하나가 길게 이어져 있다. 언젠가 바퀴가 멈추는 날, 그 자국이 곧 내가 살아온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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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