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기하학

by선비천사

1

그늘을 자처한 적 없으나 내부로부터 저녁이 온다.

손때 묻은 사물들이 돌연 낯선 모서리를 치켜들고

평생을 마주 서 있던 활자들이 대열을 이탈해 달아날 때,

여태껏 내가 받아 적은 세계는 어디로 퇴고되는가.


익숙한 말소리들이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부서지는 사이,

나는 궤도를 이탈한 소수처럼 외롭다.

사랑하는 이들의 눈빛을 향해 가만히 손을 뻗는 것은

내 안의 칠판이 지워지는 속도를

잠시만, 조금만 더 늦춰달라는 간절한 몸짓일 뿐.


2

수로의 가물거리는 잔광을 딛고

삼지창을 든 이들의 발소리가 유쾌하게 당도한다.

겨냥하는 곳마다 물컹한 이물질들이 백발백중 꿰어 차이고,

생태를 모독한 유죄의 육신들이 규탄받을 때마다

수로의 구경꾼들은 저마다 도덕의 박수를 보낸다.


풀꽃 모가지를 꺾어 바늘 끝에 꿴 채

의심 없는 허기를 낚아 올리는 팽팽한 손맛.

가차 없이 껍질을 벗겨 장작불 위에 얹는 동안,

하나의 깃발 아래에서

삼지창은 제 그림자까지도 의심하지 않았다.

명분을 쥔 자들의 어깨 위로 잔인한 도덕이 자란다.


3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말들을 쫓지 않기로 한다.


아무리 무릎을 꺾어 가며 그 굽은 미행을 이어 간들,

흩어진 분필 먼지처럼 떠도는 기억의 조각들이,

멀어져 가는 문장의 옷자락이,

내게 온전한 곁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는 것을 안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만이

내가 배운 마지막 문법.


4

등을 돌린 문장들의 끝방에서

요즘 나는 자꾸만 내 발바닥의 무게를 잰다.


한때 사냥꾼의 으쓱하던 어깨가 내 안에도 있었으므로,

나와 다른 궤적의 것들을 외래종이라 밀어내며

기꺼이 패대기치던 잔혹한 발걸음이 나를 키웠으므로.


이제는 안다.

나 또한 언제든 중심에서 밀려난 황소개구리가 되어

누군가의 정당한 삼지창 아래 꿰어질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길가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 앞에서도

오래도록 굽은 무릎을 들고 멈춰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저지른 무수한 명분들이,

저 작고 위태로운 숨통을 다시는

밟아 뭉개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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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던 것은 대부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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