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챙겨주는 생일, 그 발칙하고 따뜻한 상상에 관하여
단 하루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이유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름 석 자가 누군가의 입에 따스하게 오르내리는 날,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 정당한 갈망이 축제처럼 허락되는 날, 우리는 그날을 생일이라 부른다.
교단에서 서른두 해를 보내며, 나는 교실 뒷벽의 생일판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목격하곤 했다. 제 이름이 적힌 달이 오면 아이의 어깨엔 미세한 부력이 생겼다. 대단한 잔치가 아니어도 좋았다. 칠판 한 귀퉁이에 적힌 축하 문구와 친구들의 서툰 박수는 아이에게 "너는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야"라고 속삭여주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그 작은 의례는 아이의 하루를, 어쩌면 한 계절을 밝히곤 했다.
어제가 나의 생일이었다. 아내는 생일이 분기별로 있었으면 좋겠다며, 벙글거리는 내 얼굴에 농담 한 자락을 얹었다. 가족과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받고, 아이들이 건네는 빳빳한 봉투와 선물 꾸러미를 풀며 나는 잠시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촛불의 미열이 뺨을 간질일 때,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안착해 있다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축제가 남긴 온기 속에 홀로 앉아 찻잔을 기울이다 문득, 불편한 생각이 스쳤다. 내가 만끽한 이 소소한 축복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시린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었다.
세상의 모든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고 해서 그 방의 온도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방에는 일 년에 단 하루, 자신이 태어난 날조차 고요한 적막만이 고여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는 온종일 침묵을 지키고, 전자레인지 안에서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컵라면 미역국의 3분을 멍하니 바라보며 제 탄생의 무용함을 견뎌야 하는 이들. 플라스틱 뚜껑을 접어 올리는 순간의 비참한 증기 뒤에 숨은 청년이나, 낡은 달력에 제 생일을 동그라미 쳐두고도 찾아올 이 없는 노인에게 생일은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고립을 확인하는 잔인한 거울이 된다.
그들의 생일을, 단 하루만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처럼 대신 기억해 줄 수는 없을까. 차가운 행정의 서류 더미 사이에서, 오직 한 사람의 존재만을 축하하기 위해 움직이는 '공동체의 기억'이 있다면 말이다.
거창한 담론이 아니어도 좋다. 외로운 이의 문 앞에 갓 지은 밥 냄새가 나는 미역국 한 그릇과, "당신이 이 땅에 와주어 고맙습니다"라는 정갈한 문장 하나가 배달되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것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끼니가 아니다. 우리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공적 환대'다.
복지란 단순히 생존의 수치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이 무너져가는 삶의 품격을 지탱하도록 등을 밀어주는 일이다. 생일날 도착한 작은 소식은, 벼랑 끝에 선 누군가에게 '다시 일 년을 살아내 볼' 희망의 밧줄이 될지도 모른다. 국가가 국민의 가장 외로운 날을 기억할 때, 비로소 국가는 차가운 조직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 된다.
어제 내가 받은 금일봉보다 더 가슴을 울렸던 것은, 내 존재를 긍정해 주는 가족들의 형형한 눈빛이었다. 그 온기가 나를 다시 내일로 걷게 한다.
일 년에 단 하루만큼은 누구도 자신의 탄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차가운 골방의 문틈으로 따뜻한 국 향기가 스며들고, "우리가 당신의 오늘을 기억합니다"라는 인사가 복지의 가장 정겨운 종착역이 되는 세상.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산다. 오늘 밤, 어느 어두운 창가에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이 놓여 있기를.
그래서 그가, 다시 떠오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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