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침묵은 오래 남는다
2교시 수업을 마치고 점심 먹으러 강사실로 들어 서니,
동료 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 흥분한 어조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는다.
"선생님, 선생님,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세상에...."
평상시에 얌전하고 침착하신 선생님이 어째 상당히 화가 많이 난 듯하다.
들어 보니, 수업 전에 교실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선생님 근처로 1학년 남학생 둘이 킥킥대며 쑥덕쑥덕 거리다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빙빙 맴돌기에 쳐다봤더니, 그 중 한 명이 한국어로
"가슴!" 하고 선생님을 향해 내뱉더라는 거였다.
선생님은 순간, 너무 무안하고 수치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너네 그거 세쿠하라(セクハラ:섹슈얼 해러스먼트(sexual harassment)의 준말)인 거 알아!!!!"
하고 녀석들에게 겁을 주며 마구 퍼부었다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 녀석들을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설교를 시작했더니, 전체 교실 분위기도 쥐 죽은 듯 조용해져서 수업을 망쳤다고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선생님이 워낙 동안이고 예뻐서 남자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했나 싶었는데,
괜히 이런 말을 했다가는 상기된 얼굴로 노발대발하고 계신 선생님께 뼈도 못 추릴 듯해 선생님을 토닥이면서
"뭐 그런 한심한 녀석들이 다 있죠? 대학교 1학년이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이네요!"
같이 흥분한 척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난 학생들이 멍청하고 귀여워서 속으로는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녀석들...... 얼마나 관심을 끌고 싶었으면......
게다가 기껏 생각해 낸 것이 "가슴"이라니......
쯧쯧쯧...... 레벨하고는.
선생님은 참한 딸내미 둘을 키우고 계신 분이라 남자아이들의 이런 접근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불편한 모양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예전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였나, 조교를 하고 있던 때였나...
시기는 가물가물하지만, 당시의 그 상황은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복학생 몇 명과 카페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복학생 중의 한 명인 그놈이(언어 순화가 되지 않는 점, 용서 바랍니다)
담배를 피워 물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제 꿈을 꿨는데, ◯조교가 홀딱 벗고 내 꿈에 나왔거든. 근데 털이 하나도 없는 거야."
하면서 혼자 낄낄대는 것이 아닌가....
주위 다른 복학생도 당황한 듯, 나와 그놈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느껴졌다.
그때는 순간 너무 깜짝 놀랐다.
이게 뭐지? 농담인가? 재미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옷을 입고 있어도 마치 복학생들 모두의 앞에서 옷이 다 벗겨져 버린 것만 같은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화를 내면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혹은 지금 이 장소의 분위기를 망치는 게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에, 난 그놈 앞에서, 다른 복학생들이 힐끔거리는 시선 앞에서 바보처럼 비굴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30년이 지나도 잊히기는커녕, 가끔 불쑥불쑥 떠오르는 치욕에 그 자리에서 따귀 한 대 시원하게 날리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지기까지 한다.
점심을 먹으며 기억이 여기까지 이르자,
싱글싱글 징그러운 말로 당한 내가 이 정도로 불쾌하고 잊어버리기 어려울 정도인데, 정말 힘든 일을 겪은 분들은 과연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고 계실까...
새삼 마음이 아프고 무거워졌다.
난 솔직히 여러 매체에서 등장하는 섹슈얼 헤러스먼트에 관한 보도를 접하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쁜 놈들..."이라고 가볍게 반응했을 뿐, 그리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날 때마다 지나간 일이라고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절대로 잊히지 않지만.
그리고,
잠시나마 동료 선생님의 분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동료 선생님께 너무 미안해진다.
다음 주에 만나면 괜찮냐고 진심을 담아서 따뜻한 마음을 건네고 싶다.
녀석들이 나 같은 아줌마 선생님에게는 그런 시답잖은 농담은 하지 않겠지만,
만약 내 앞에서 그런 실언을 한다면,
난 볼륨을 크게 높인 마이크를 들고 모두 들으라는 식으로 그 남학생 둘을 향해 말할 것이다.
"우와, "무네(胸(むね)[mune])"가 가슴"인 걸 외웠네? 스고~이(すご~い [sugoi] 대단하다).
아! 근데 너네 "토가라시*"가 한국어로 뭔지 아니? "
라고 적나라하게 되받아친다면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너무 품위가 없는 말씀이 되려......나?
그리고 받아치는 김에,
30년 전의 그놈과 재회한다면,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하고 멋지게 뺨을 한 대 갈기고,
"네가 뭔데 허락 없이 멋대로 니 꿈에 날 출현시킨 거지?"
하고 조용하지만 엄하게 따지고 싶다.
*토가라시:唐辛子(とうがらし[tougarasi]) 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