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가진 돌멩이

by혜준

어제는 글을 쓸까 말까 하다가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어제의 주제일랑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글쓰기'를 클릭해

하얀 화면을 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잊으려고 했던 어제의 단편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뭔가 거창한 말이나 주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뱉어내야만 할 것 같을까.


어제는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어느 여배우를 둘러싼 '친일'논란이

TV도 없는 일본의 내 삶터에까지 스며들어왔다.

궁금했다.


'친일' '반일' '혐한'

이런 단어들은 여기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그냥 단어가 아니다.

속도감을 가진 돌멩이와 같아서

듣는 순간

나에게 던져지는 느낌에 아프고 쓰리다.

여기서 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아픔과 쓰림이 더해진다.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생길수록

그 아픔과 쓰림도 더해진다.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인간도 아닌데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와 전경이 도로에서 충돌했고

전경이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그 철창이 달린 버스에 마구 태웠다.

나 역시 잡혀서 철창 달린 버스 입구까지 끌려 왔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다른 전경이 나를 흘낏 보더니,

"야, 얘는 아니야" 하고 소리쳤다.

나는 풀려났고,

도망치듯 다시 정류장에 돌아와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철창 달린 버스를 바라보며

그때 내가 느낀

안도감과 미안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심정이다.

"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너는 그들과 달라"

라는 말을 들으면서 안도감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다.

이것인가 보다.

내가 계속 뱉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 답답함의 정체는.

자기혐오.


'친일' '반일' '혐한'

이런 단어 속에서

나는 늘 깍두기였다.

이런 입장이 나에게 주는

이 위화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내 삶을 '손님'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지워지지 않는

불편한 감정을 나는 어떻게 달래며 살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제 하루 종일을 보냈다.

결론도 없는 이야기를 쓰자니 막막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난 이런 불편함을 고백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일상과 내 마음을 다시 써 내려간다는 게

마치 나에게,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새로운 글을 쓸 수가 없다.

써지지 않는다.


난 이제껏

학생들 앞에서 '한국어'강사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정치나 역사에 대한 나의 의견이나 생각은

넘어가지 못하게 조심했다.


아니, 또 나를 속이려고 한다.


나는 울타리가 필요 없었다.

정치나 역사에 대해 무지함으로

울타리를 뛰어넘을 만한

힘찬 의견이나 생각이 없었으니까.

모르면서 떠벌리지는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장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엔 너무나 부끄럽다.


어차피

역사는 物語([monogatari] 이야기)일 뿐이라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여기며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내 게으름이

결국 무거운 자기혐오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솔직해지고 싶다.

일기장에 끄적이던 이런 말들을

용기를 내어 이렇게 적고 있는 지금,

이 글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